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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무경 Apr 17. 2024

중국의 4대 미녀 1 서시(西施)

1. 서시  2.왕소군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미녀. [? ~ ?]이름은 이광(夷光).서자(西子)라고도 한다.

서시는 흉노 선우에게 시집간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의 궁녀 왕소군(王昭君),《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가상의 여인 초선(貂嬋), 당나라 현종의 총비인 양귀비(楊貴妃)와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여인이라 불리는데 이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꼽히는 미의 화신(化身)이자 대명사이다.


그녀는 당시 월나라의 서울이었던 현 저장 성[浙江省: 절강성] 동북중부 샤오싱[昭興:소흥] 시내 서남쪽 주지[諸暨:제기]시의 저라산(苧蘿山: 127m)이라는 야트막한 산 아래 저라촌에서 나무꾼 아버지와 삯 빨래를 하는 어머니의 딸로 태어났다.


저라촌은 동쪽과 서쪽 2곳의 마을이 있었는데 그녀는 서쪽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서쪽 마을 사람들의 성은 거의가 다 시(施)씨였다.그녀를 서시(西施)라고 부르는 것은 서쪽 마을의 시씨(施氏)라는 의미에서이다.

그곳에는 역시 정단(鄭旦)*이라는 아름다운 처녀도 있었는데 이들은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그곳 완사계(浣纱溪)라는 시내 가에서 빨래하면서 서로 장난이나 치고 재잘거리는 것이 일상사였다.


*정단과 서시=정(鄭)은 서시의 아버지 성이요,시(施)는 서시의 어머니 성으로,실은 두 사람이 같은 인물이라는 여러 설이 있음.


원래 서시는 가슴앓이가 있어서 길을 걸으면 가슴이 울리는 통증에 시달렸으므로, 걸을 때마다 눈쌀을 찌푸리곤 했다. 그런데 그녀는 눈쌀을 찌푸린 모습까지도 아름답기 그지없어 보는 사람마다 넋을 잃고 감탄을 했다고 한다. [고사성어서시빈목 참조]


그 지방의 여인들은 서시의 흉내를 내기만 해도 그녀처럼 아름다워 보일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므로 그녀의 찌푸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넋을 잃고 감탄한다는 소문을 들은 동쪽 마을에 사는 시씨(施氏)의 추녀 하나가 서시를 흉내 내어 항상 눈쌀을 찌푸린 채로 돌아다녔다.


이를 본 마을의 부자들은 그 흉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외출을 삼갔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처자를 이끌고 이사를 가버렸다는 것이다.


*서시빈목은 방빈(倣矉)ㆍ효빈(效矉)ㆍ동시효빈(東施效矉)이라고도 함.


BC 496년, 월나라 왕 윤상(允常)이 죽자 이웃해 있던 오나라 왕 합려(闔閭: 재위BC?~496)가 그 틈을 이용해 월나라를 병탄하려고 침공해 들어왔다.


윤상의 아들로 새로이 왕에 즉위한 구천(句踐: 재위BC 496 ~ 465)이 지휘하는 월나라 군은 취리(檇李-저장 성 가흥[嘉興=자싱]남방)에서 오나라 군사들과 격전을 벌였는데 합려는 월나라 결사대의 기습을 당해 대패,몸만은 간신히 도망쳐 왔으나 다친 발가락에 대한 치료를 제대로 못해 상처가 덧나 죽고 말았다.


합려의 뒤를 이어 즉위한 그의 아들 부차(夫差: 재위BC495 ~ 473)는 부왕의 유언에 따라 이 치욕적인 부왕의 원한을 풀어드리려고 군사들에게 매일 궁술을 비롯한 전투 훈련을 시키는 한 편 복수심을 불태우기 위해 원앙금침 대신 울툭불툭한 장작개비[신(薪)] 위에서 누워[와(臥)]자면서 복수심을 불태웠다. [고사성어와신상담 참조]”


이 소문을 들은 구천은 부차의 힘이 더 강해지기 전에 토벌하려고 했다.

충신 범려(范蠡)의 만류도 듣지 않고 군대를 동원해 오나라를 침공한 구천은, 그러나 복수의 일념으로 똘똘 뭉쳐 일당백의 기세로 반격을 가해오는 부차의 오나라 군대에게 대패하고 회계산[會稽山: 현 저장 성[浙江省:절강성] 샤오싱[紹興:소흥]남쪽]으로 후퇴했으나 결국 사로잡혀 부차의 포로가 되었다.


구천은 대부 문종(文種: ?~BC472)과 범려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나라 태재(太宰) 백비(伯嚭)에게 미녀들과 금은보화를 보내 부차에게 화의를 주선해주도록 매수하면서 모든 월나라 백성들을 오나라의 노예로 받아달라는 굴욕적인 간청을 했다.


오자서(伍子胥)가 그 간청을 물리치고 구천을 죽여 후환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간했으나 부차는 간신 백비의 건의를 받아들여 강화를 성립시켰으며 범려는 인질이 되어 오나라에 들어갔다.*


*구천도 오나라에 들어가 수년 동안이나 노예로 있었다는 설이 있음.


한 낱 평민이 되어버린 구천은 여느 농부들처럼 직접 농사를 짓고 그 아내는 베를 짜면서도 부차에게 당한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서 짐승의 쓸개[담(膽)]를 걸어두고 밤마다 핥아 그 쓰디쓴 맛을 보면서[상(嘗)] 굴욕을 상기하는 한 편,백성들을 독려하고 용기를 심어주어전의(戰意)를 북돋우기 위해 진력(盡力)하는 등 복수의 날을 기다렸다.


심지어 그는 그의 수레 앞에서 힘을 불끈 내는 개구리를 보고 몸을 굽혀 경의를 표했다.

종자가 이상히 여겨

“왜 개구리에게 경례를 하십니까?”

하고 묻자 구천이 이렇게 대답했다.

“저 개구리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그 때문이다.”


왕이 하찮은 개구리의 용기를 보고도 경의를 표했다는 소문이 온 나라에 퍼지자 자신들도 용감하게 목숨을 바치겠다는 용사들이 속출했다. [고사성어 월왕식노와 참조]


인질이 되어 2년간 억류되었다가 귀국한 범려는 부차가 큰 뜻을 품고있으나 음탕한 호색한이라는 약점이 있음을 떠올렸다. 미인계를 쓰면 대단히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범려는 구천과 상의하여 병력을 양성하는 한 편 미인계를 통해 부차를 멸망시킬 계책을 세웠다.


전국을 돌며 미녀들을 뽑아 올리던 범려가 서시와 정단의 미모에 관한 소문*을 듣고 저라촌에 들러 서시를 만나보았더니 그녀는 소문에 듣던 이상으로 천하절색이었다.    


범려는 그녀를 보자마자 그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반해버려 마음이 설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국가를 위해서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감(私感) 따위는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서시는 이미 어떤 사람이 구천에게 바쳐 그의 애첩이 되어 있었다는 설, 이미 범려와 부부사이였다는 설도 있음.


범려는 그녀들에게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한갓 빨래나 하던 시골 처녀들에게 국가의 위기를 설명하고 적국에 들어가 죽음을 무릅쓰고 몸을 바쳐 간첩활동을 하도록 설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서시는 일신의 안위를 국가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범려의 제안을 수락했다고 한다.

범려는 첩보를 위한 진정한 미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모여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고 가무를 잘 해야 하며 자태도 나무랄 데 없이 고와야 했다. 그러나 서시에게는 지금 그 중에 미모라는 한 가지 조건만 갖추어져 있을 뿐 가무의 실력과 요염한 자태 두 가지는 매우 미흡한 실정이었다.


범려는 그녀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회계산 부근에 비밀 장소를 마련하고 악사(樂師)를 비롯한 우수한 교사들을 선발하여 간첩 양성을 위한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서시는 훈련의 고통을 참고 분발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는데 원래 총명했던 그녀는 3년여가 지나자 사교술과 예절에 달통하고 노래의 고저장단과 우아한 자태로 경쾌하게 춤을 출 수 있는 훈련도 충분히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서시는 빨래나 하던 시골 처녀에서 사람들을 미혹시킬 수 있는, 요염하고 기품 있는 훌륭한 간첩으로 환골탈태했다.


서시를 부차에게 보내기 위해 오나라에 들어가자 그녀의 미모를 한번 보고자 역관(驛館)으로 몰려든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범려는 역관 내에 돈궤를 마련해 두고 서시를 보려는 사람은 돈을 내야한다면서 돈을 받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돈궤가 가득 차고 넘쳤으며 3일간 거두어들인 돈을 월나라로 가져가 국가 재정에 사용했다는 믿기 어려운 전설도 있다.

범려가 부차에게 꿇어앉아 말했다.


“천신(賤臣) 구천이 대왕의 은덕에 감복하여 나라 안을 뒤져서 가무에 능한 여자를 구해 바치오니 하녀로라도 쓰시기 바랍니다.”

라 하며 서시를 바치자 오자서(伍子胥)가 부차에게 간언했다.


“신이 듣기에 하(夏)나라는 말희(妺喜)로 인해 망했고, 은(殷)나라는 달기(妲己)로 인해 망했으며 주(周)나라는 포사(褒姒)로 인해 위기에 빠진 바 있습니다. 무릇 미인이라는 것이 나라를 기울게 하는 것이오니 물리치시오소서.”


그러나 서시의 미모와 자태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려 정신이 몽롱해진 부차는

“이것은 구천이 우리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징표로다.”

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오자서의 간언을 물리쳤다.


서시는 오나라에 들어온 뒤에 부차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이 되어 갖은 애교를 다 부리며 부차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부차는 서시가하고 싶다는 일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고 한다.

부차는 그녀를 위해 무리하게 거대한 각종 토목건축공사를 벌였다. 고소대(姑蘇臺)에 춘소궁(春宵宮)을 짓고 링옌 산(靈岩山, 영암산)위에 관왜각(館娃閣)ㆍ영관(靈館) 등을 지었다. 또 커다란 못을 판 뒤에 못 가운데에 청룡주(靑龍舟)를 만들어 띠웠으며 그 주위에 아름다운 화초를 심었다.


 서시가 향리무[響履舞]라는 춤을 잘 추었으므로 궁리 끝에 땅에 항아리를 묻고 그 위에 나무 널로 덮은 향리랑(響履廊)이라는 회랑을 만들어 서시가 작은 방울을 단 치마를 입고 향리랑 위에서 춤을 추면 방울 소리와 항아리 울림소리가 서로 어울려 영롱하게 들리도록 했다.

그리고 봄가을에는 고소대(姑蘇臺)에서 거하고, 여름과 겨울에는 관왜각에서 자면서 때맞춰 호수에 그림배를 띄워놓고 연꽃을 따거나 꽃구경ㆍ달구경을 했으며, 거문고를 타면서 하루 종일 그녀와 함께 지냈다.

부차는 이처럼 정사를 돌보지 않고 그녀들과 함께 가무와 산수를 즐기는 데만 열중했다. 이리하여 오나라는 국력이 낭비되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매긴 높은 세금과 강제노역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이에 백성들은 왕을 외면했고 친지들과의 사이도 소원해져 갔다.


이처럼 부차가 사치와 환락에 빠져 오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지는 반면에 구천은 부국강병을 위해 뼈를 깎는 인고의 노력을 기울여 월나라의 국력은 날로 강성해져 갔던 것이다.


그러나 부차는 이러한 정황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BC 490년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죽고 나이어린 태자 안유자(晏孺子)가 왕위에 오르면서 대신들 간에 권력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어수선 해지자 이를 틈타 주력 부대를 이끌고 강국인 제(齊)나라를 공격하여 대승했다.


의기양양해진 부차는 이제 자신이 천하의 패자가 되려고 천하의 제후들을 황지(黃池- 하남 성 봉구현(封邱縣))에 초청하여 성대한 잔치를 벌이면서 회맹을 주도했다.

그동안 절치부심, 복수의 기회를 노리던 월 왕 구천이, 이 틈을 타서 오나라에 침입해 들어가 월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태자 우(友)를 죽였다.


이러한 급보를 받은 부차는 급히 귀국했으나 원정으로 지친 병사들로는 월나라 병사들과 대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를 후하게 하여 구천에게 강화를 청했고 구천도 군사를 거느린 부차와의 일전이 부담스러워 이를 받아들였다.


그 4년 후에 구천이 거느린 월나라 군대는 하남 성 기현의 입택(笠澤)에서 오군을 다시 대파시켰으며, 3년 동안 계속 공격한 끝에 BC 471년 오나라의 수도인 고소(姑蘇- 현 장쑤 성[江蘇省:강소성] 쑤저우[蘇州: 소주] 서남쪽)를 포위했다.


부차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구천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에 구천은 부차에게 100호의 봉읍을 주어 살게 하려 했으나 자신이 이미 늙어 구천을 섬길 수 없었던 부차는 오자서의 간언을 듣지 않았음을 후회하면서 자결해 생을 마감했고 태자까지 살해된 오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30여 년에 걸친 오와 월의 치열했던 갈등은 결국 월나라의 승리로 종막을 고했던 것이다.

오나라가 이렇게 월나라에 연속으로 패배하여 멸망된 데에는 바로 서시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 중론이다.


정사(正史)에는 몇 줄 되지 않고, 주로 야사나 야담에 등장하는 서시의 이야기. 그녀의 모습을 전혀 볼 수조차 없는 현금(現今)에도 미녀 숭배 신드롬에 빠져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미모를 상상하여 수없이 많은 상찬의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며 전설을 과장,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서시의 종말에 관한 여러 가지의 설도 마찬가지이다.


구천은 부차를 쳐 멸망시키고 패자가 된 뒤에 그 동안의 공로가 지대했던 범려를 상장군으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범려는 “큰 위세 아래(大名天下)에서는 무사하기 어렵다.”

하면서 구천의 만류를 무릅쓰고 오히려 그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작별을 고했다. 구천이 월나라를 나누어 주겠다고 하는데도 범려가 완곡히 고사하자 구천도 더 이상 만류하지 못했다.


저자가 후한의 원강(袁康)이라는《월절서(越絶書)》에는 오나라가 망한 뒤에 그녀가 범려에게 돌아와 함께 오호(五湖)로 도피했다고 한다. 부차에게 바쳐지기 전부터 두 사람은 이미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다는 것이다.이는 명나라 때 호응린(胡应麟)의《소실산방필총(少室山房筆叢)》에 나오는, 서시가 원래 범려의 연인, 또는 처였다는 기사와도 일치한다.

   

또《묵자(墨子)》〈친사편(親士篇)〉에는 그녀가 강에 빠져 죽었다는 암시가 있다.


다른 전설에도 그녀가 익사했다는 말이 있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구천이 회군하면서 서시를 데리고 귀국하자 남편이 서시에게 반할 것을 두려워한 구천의 왕비가 사람을 시켜 몰래 서시를 빼내어다가 “이 계집은 한 나라를 망하게 한 년인데 어떻게 머물게 할 수 있겠느냐?”하면서 자루에 넣어 강 물 속에 쳐 넣어 죽였다고도 하고 오나라 사람들에게 서시가 오나라를 멸망시킨 요부라고 모함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녀를 자루에 넣어 강물에 빠트려 죽게 했다고도 한다(《동주열국지(东周列国志)》등).


후에 사람들이 강에서 발견된 조개의 발을 보고 서시의 혀라고 하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현재 서시의 고리(故里)인 주지시[諸暨市: 제기시]주뤄산[저라산]에는 21000㎢에 이르는 [서시 고리 여유구(西施故里 旅游區)]에 서시대전(西施大殿)ㆍ저라정(苧蘿亭= 주뤄팅)ㆍ월국고도성문(越國古都城門)ㆍ범려사(范蠡祠)ㆍ서시 장랑(西施長廊)ㆍ이광각(夷光閣)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서시의 전설이 국가 급 비물질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 주지 시를 비롯해 이웃 항저우[杭州: 항주]시내 샤오산구[蕭山區:소산구] *린푸[临浦: 임포] 등에는 서시와 관련된 고래의, 또는 신조된 여러 지명이 있다.


*옛날에는 주지[諸暨: 제기, 또는 여기(余暨)]가 샤오산 린푸에 속해 있었다거나, 또는 샤오산은 주지의 오기(誤記)라고도 함.


또 수많은 시인문사(詩人文士)들이 서시를 주제로 글을 지었고 영화로도 만들었다.    

주뤄산[苧羅山: 저라산]에 조성된서시 고리 여유구(西施故里 旅游區). 솟아있는 누각은 주뤄팅[苧羅亭: 저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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