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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무경 Apr 26. 2024

퓌라모스와 티스베의 사랑 이야기

오디[뽕나무 열매]에 얽힌 전설의 사랑 이야기

    

나무의 열매인 오디는 비록 꽃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꽃들보다도 더 절절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아래의 이야기는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시리아의 전설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 이야기에서 그 소재를 땄다는 확인할 수 없는 풍문이 있다.     


옛날 데르케트 여신의 딸인 세미라미스(Semiramis) 여왕이 다스리던 아시리아(Assyria)의 수도 바빌론에 퓌라모스라는 총각과 티스베라는 처녀가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으로 살고 있었다.  

  

이들은 가까운 이웃이었으므로 자연히 어려서부터 자주 만나게 되고 서로 잘 이해할 수 있는 다정한 친구이기도 했다. 더구나 그들 두 남녀 모두 누구도 넘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이기도 했던 까닭에 깊은 우정은 사춘기가 되자 자연스럽게 뜨거운 연정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문제는 두 집안의 어른들이 이들의 결혼을 극력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부모들은 그들이 밖에서 만나는 것조차 엄격히 금지시켰다.     


두 연인 사이에는 높다란 돌담이라는 물리적 장애와 함께 밖에서도 만나지 못하게 금하는 부모님들의 반대까지 겹쳐져 있어서 거의 절망적인 상태였다.    

  

하지만 두 청춘남녀의 가슴을 태우는 연정의 불길은 이러한 장벽으로 쉽게 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절망적인 장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연정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더욱 더 안타까운 그리움으로 타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열망의 결과였던가? 두 사람은 돌담 사이에서 조그마한 틈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 돌담 틈을 통해 부모님들 몰래 연심을 속삭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집안사람들이 모두 잠든 늦은 시각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그 틈에 다가와 돌담을 사이에 두고 다정한 밀담을 나누다가 새벽에는 각각의 잠자리에 들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돌 틈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밀담만으로는 뜨거운 사랑의 갈증을 채울 수가 도저히 없었다.


“아아. 심술궂은 벽아! 왜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느냐? 우리가 서로를 껴안을 수 있도록 와르르 무너져 주면 좀 좋겠냐? 우리의 욕심이 지나친 게냐? 그렇다면 틈이 조금만 더 벌어져 키스라도 할 수 있게 해주려무나. 그나마 이 조그마한 틈을 만들어준 것은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사랑에 목말라 이렇게 하소연과 원망으로 지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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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만날 때마다 그들의 깊은 사랑을 가로막고 있는 서글픈 신세를 한탄하면서 대신 벽에다가 입을 맞추곤 하다가 어느 날 마침내 운명을 걷어차기 위한 결단을 내렸다. 두 사람이 서로 집을 빠져나가 성을 탈출해서 부모님들조차도 찾지 못할 머나먼 곳으로 달아나 결혼해 살기로 했던 것이다.

      

성 밖 멀지 않은 울창한 숲 속 넓은 공터에는 세미라미스의 남편인 니누스(Ninus) 왕의 왕릉이 있었다. 그리고 왕릉 앞의 샘가에는 눈처럼 하얀 오디가 주렁주렁 달리는 커다란 뽕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탈출을 하더라도 잘못하여 서로 길이 어긋나면 만날 수가 없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튿날 저녁에 그곳에서 만나기로 하되 우선 먼저 온 사람이 그곳에서 기다리다가 나중에 오는 사람과 합류하기로 했다.     

   

그 이튿날. 마음을 졸이며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하루를 지루하게 기다리던 티스베는 탈출의 시각인 밤이 되자 너울로 머리와 어깨를 감싼 뒤에 주변 사람들을 피해 살그머니 집을 나서서 성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부리나케 약속한 장소로 달려갔다.      


달빛만이 교교할 뿐 어둠에 휩싸여 있는 왕릉 주변 숲에서는 싸늘한 바람결에 부엉이 우는 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져 무섭기 그지없었지만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인한 흥분 때문에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마악 숲 속을 벗어나 달빛이 환하게 쏟아져 내리는 왕릉 앞 뽕나무 곁으로 거의 다 내려갔을 때 건너 편 어두운 숲 속에서 눈에 형광을 발하는 커다란 짐승 한 마리가 기어 나와 샘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한 마리의 암사자였다. 피가 흥건히 묻은 사자의 주둥이가 달빛에 드러나 보일 지경이었다. 

     

아마도 무엇인가를 잡아먹고는 목이 말라 샘을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기겁을 한 티스베는 뽕나무 밑으로 가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쳐 되돌아 와서는 얼른 근처에 있는 바위동굴로 들어가 몸을 감추었다. 너무도 놀라 자신이 쓰고 온 너울이 벗겨져 떨어지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퓌라모스가 뽕나무 밑에 도착한 것은 사자가 물을 마시고 자리를 뜬 직후였다. 그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티스베가 아직 도착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샘 주변에 보이는 움푹 패어있는 짐승의 발자국과 함께 흩어져 있는 천 조각은 무엇이란 말인가.     

 

수상하게 여긴 퓌라모스가 그 조각을 집어 들고 보니 그것은 여인의 너울. 뿐만 아니라 그는 그것이 바로 티스베의 것임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들이 아직 우정을 나누고 있던 수 년 전에 자신을 만나기 위해 나올 때마다 티스베가 즐겨 착용하던 낯익은 너울이었기 때문이었다.     

 

짓이겨진 너울 조각에는 아직도 끈적끈적한 핏물이 묻어있었다.  그것이 사실은 샘에서 물을 마시고 돌아가던 사자가 티스베가 떨어트린 너울을 보자 이상하게 생각하여 이빨로 물어뜯고 발로 밟아 뭉갰기 때문에 생긴 자국이었다.         


그러나 퓌라모스는 엉뚱하게도 어떤 불행한 사태를 상상하게 되었다.    

  

“먼저 도착해 나를 기다리던 티스베가 짐승의 습격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아아 이럴 수가!”      

이렇게 단정한 그는 절망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이 괴로워 눈앞이 깜깜하고 현기증으로 어지러워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의 의식은 자신에게 이렇게 속삭여 댔다.      


“이 모든 불행의 싹은 너에게 있다. 어쩌자고 이런 위험한 숲 속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단 말이냐? 설령 그랬더라도 그녀보다는 네가 더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야 이러한 불행한 사태를 방지할 수 있었던 게 아니냐?     

결국 너의 어리석음과 무책임함이 한 없이 사랑하던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만든 것이 아니더냐! 너는 살아있을 가치도 없는 놈이다.”      


그는 티스베를 죽게 한, 자신의 용서할 수 없는 과오와 티스베를 잃은 절망감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손에 움켜 쥔 찢어진 티스베의 너울에 입을 맞추면서 이별을 고하고 그녀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 뒤에 그가 언제나 지니고 다니던 단도를 꺼내어 자신의 가슴을 찔러버렸다.    

  

그의 터진 심장에서 솟구친 선혈은 샘 가 뽕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하얀 오디를 검붉게 물들일 지경이었다.      



바위틈에 숨어서 사자가 가버리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티스베는 주변이 잠잠해지자 위험이 사라진 것으로 느끼고 얼른 일어나 샘가 뽕나무 밑으로 내려왔다.   

   

그 동안에 파라모스가 와 있을지도 모를 일이어서 사자를 피해 숨을 때 보다 더 황급한 마음으로!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환한 낯으로 기뻐하면서 반겨주는 파라모스가 아니라 피를 뿜으며 쓰러진 채 의식을 잃어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가엾은 존재였다.     


그녀는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비참한 마음으로 달려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껴앉고 흔들어 보았으나 그의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울부짖어 말했다.     


“퓌라모스! 어느 심술궂은 손길이 우리의 깨끗한 심신을 이렇듯 비참하게 앗아간단 말인가요? 퓌라모스! 당신을 사랑하는 티스베가, 당신이 사랑하는 티스베가 바로 이렇게 당신 곁에 앉아 있는데 어찌 아무런 말도 없이 이렇게 누워만 계시는 거예요? 어서 말 좀 해 보세요!”     


티스베의 절규를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퓌라모스의 감겼던 눈이 게슴츠레하게나마 잠깐 떴으나 죽음의 손길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다는 듯이 이내 스르르 감기면서 목을 떨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퓌라모스가 사자에게 공격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던 그녀는 연인의 손에 들린 자신의 피 묻은 너울과 상아(象牙) 자루의 단도를 보고는 사태의 대강을 전광석화처럼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떨어트린 너울을 보고 자신이 참담하게 짐승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오해한 퓌라모스가 애통함을 못 이겨 자신의 칼로 자결해 버린 것이라는 사실을.       


“아아! 당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바로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던 저였군요. 이제 저도 당신의 길동무가 되기 위해 이 세상을 하직하겠습니다.     


무정한 양가의 부모님들! 부탁하노니 제가 퓌라모스를 뒤따라 가 하나가 되려 하옵니다. 그러니 들으실 수 있다면 저희들을 한 무덤에 묻어주세요.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들의 이 비참한 모든 과정을 내려다보는 그대 뽕나무여. 사람들이 우리의 운명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부디 그대의 열매를 어둡고 슬픈 색깔로 물들여 주세요.” 

    

티스베는 이렇게 기도한 뒤에 아직도 퓌라모스의 혈온이 남아있는 단도 끝을 자신의 가슴에 대고는 엎드려 자결했다.     


티스베의 기도는 신들과 양가의 부모들에게 영통(靈通)했다. 신들은 그들의 비참한 사랑을 기념해 주기 위해 뽕나무 열매, 곧 오디가 익으면 검붉게 해 주었고 양가의 부모들은 두 남녀의 결합을 방해한 그들의 행동을 크게 후회하면서 두 연인의 시신을 화장하여 한 항아리에 넣어 묻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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