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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무경 Apr 02. 2024

결정론[숙명론]자 강숭명 (3)숙명론의 자가당착

강한 결정론인 숙명론의 역설

결정론[숙명론]자 강숭명 시리즈

[1] 결정론[숙명론]자 강숭명 (1)숙명론 수업 (brunch.co.kr)

[2] 숙명론자 강숭명 (2)강숭명과 고영빈의 대화 (brunch.co.kr)


강한 결정론인 숙명론의 역설


결정론을 신봉하는 고등학교 교사 정성민은 그의 반 학생인 강숭명을 그가 신봉하는 결정론의 열렬한 제자로 만들었다. 강숭명은 머리가 총명하여 전교에서 수위를 달리는 학생으로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스승인 정성민 보다 한걸음 뛰어 넘어  숙명론자가 되어 있었다.

 

숭명은 선배인 고영빈과 전부터 철학적인 대화를 자주 해오던 터였는데 하루는 한가한 틈을 타서 동창생인 명훈이가 일하고 있는 카페를 찾아가 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아침부터 철학적 담론을 벌였다. 유물론적인 생각을 지닌 강숭명과 관념론자인 고영빈의 대담은 언제나 불꽃 튀는 설전으로 이어졌다. 


고소 공포증에 관한 대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혹시나 아래로 떨어져 죽지나 않을까? 겁이 나는 것은 상식이다. 이른바 [고소 공포증]이다. 그런데 진화심리학자들은 이에 대해 새로운 신기한 현상을 발견해 낸 것처럼 수십만 년 전 사바나 지역에서 살아온 호모 사피엔스들의 진화에 따르는 적응 개념을 끼워 넣어 고소 공포증이 적응하기 위해 발달한 기제라고 주장한다. 

수직 수직 착시

진화심리학자 러셀 잭슨(Russell Jackson)은 그 이유가 높은 곳{고소(高所)}에서 함부로 활동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 곧 고소에서의 추락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화된 마음]에서 유래한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위험하므로 수직선을 더 높게 파악하도록 적응했고 그렇게 적응한 우리 조상들이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에 그 심리 기제가 우리에게 유전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숭명이 말했다. "여러분들은 진화심리학을 엉터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진화심리학으로 훌륭히 설명되는 사례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그러고는 숭명은 명훈에게 A4용지 한 장과 볼펜을 얻어 가지고 오더니 젓가락을 자(尺) 삼아 이런 그림을 정성껏 그렸다.     

 ”이 그림은 [수직 수평 착시]라는 것으로 고소 공포증의 진화한 심리를 잘 알려주는 사례입니다. 이〈⏊〉형 그림에서 수직선〈ㅣ〉와 수평선〈⎯〉의 길이가 어떻게 보이십니까?“ 

명훈이가 “세로선이 더 길게 보이는군.” 하고 말했고 이에 영빈도 동의했다. 

“그렇지요? 수직선〈ㅣ〉가 수평선〈⎯〉보다 길게 보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두 선은 길이가 똑같습니다. 그런데 왜 수직선이 더 길게 보일까요? 바로 진회된 심리 때문이지요."      


영빈이 말했다. “진화심리학적 적응심리 기제[진화한 마음] 이론은 타당성이 매우 높은 이론들이긴 하지. 그러나 다 맞는 것은 아니야. 지금 아우가 말한 [수직 수평 착시] 가설은 정말 그럴듯한 가설인데 그런데 말야. 만약에 그 그림을 이렇게 바꾸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말하면서 영빈은 숙명이 그린〈⏊〉형 그림을 90도 돌려놓았다.

 “이 그림은 숭명이가 그린 그림을 단순히 왼쪽으로 90도 돌려놓은 것이니까. 수평선과 수직선의 길이는 먼저와 똑같아. 그런데 이 그림에서도 수직선이 수평선보다 더 길어 보이나?” 

명훈이가 말했다. “그렇게 돌려놓으니까 수평선이 더 길어 보이는데요”    

  

그래. 수직선이 수평선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는 점만으로 고소 공포증의 기제가 다 설명되는 것은 아니야. 더 중요한 점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을 확률이 높다는 점을 [의식(잠재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지. 의식은 수직 수평선 문제와는 관계없는 전혀 다른 요소이거든. 뿐만 아니라 고소 공포증은 현대 인간의 지능으로 단숨에 예측할 수 있는 직관적 현상이지. 롤러코스터 같은 현대적인 놀이기구를 호모 사피엔스들은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후손인 현대인들이 그런 놀이기구에 스릴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릴은 위험을 동반해서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지.  만약에 고소 공포증이 사바나 지역에서 살아온 호모 사피엔스에게 적응을 위해 진화한 기제라면 그런 적응을 하지 않은 동물들은 고소 공포증이 없을까? 돼지나 염소, 양, 거북이 등은 사바나 지역에서 살아온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어서 사바나에서 적응하기 위한 기제를 발달시키지 못했을 거야. 그렇다면 돼지나 염소 ∙ 양 ∙ 거북이 등은 높은 건물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고소 공포증을 느끼지 않을까?     


숭명은 갑자기 화제를 돌려 전에 영빈이가 초든[언급한] 생명 안에 들어온 이(理) 이야기를 꺼냈다. 

[강숭명]  “이(理)가 어떻게 물질 속에 들어왔을까요? 증거는 있나요?” 

[고영빈]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理)는 생명체의 물질적 요소 분자들, 예컨대 아미노산이나 단백질이 합성될 때 끼어들어 와 융합되어서 최초의 생명 창조 때에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강숭명] “그럼 아미노산이나 단백질의 필수 요소들을 분석해 보면 알 수 있겠는데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과학자들이 아미노산이나 단백질을 분석하면서 이(理) 같은 요소를 발견했다는 말은 전혀 없는 것 같은데요?”

[고영빈] “이(理)는 물질이 아니어서 아미노산이나 단백질에 들어있는 성분의 물리 화학적 분석 방법으로 찾아낼 수는 없지. 다만 이(理)는 합리적이고 목적적이며 모순율과 동일률 • 배중률 • 이유율 등 논리적 사유의 근본 원리의 원천이거든. 그리고 이러한 원리들은 물질에서 나올 수 없지. 따라서 그러한 원리들이 논증되거나 발견된다면 그것이 바로 이(理)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겠지. 그런데 어떤가? 인간들이 사물을 인식할 때 그러한 원리들을 쓰고 있지 않는가? 아우도 그렇고.  아우가 지금 결정론을 공부해서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물리화학에 따른 것이었나? 마음, 곧 정신에 속한 의식에 따른 것인가?  

  

결정론의 올무

제손에 올무

아우의 주장은, 아우  스스로의 연구나 사유에 따라 그 주장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도 아니요 그러한 신념의 결과도 아니야. "아우의 주장을그대로 적용한다면" 아우의 뇌에 빅뱅 ┈이 아니라 태초라고 해도 마찬가지이지만┈ 때 생긴 물질파가 여러 가지 경로를 거쳐 아우의 뇌파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아우  자신이 알 수도 없고 어찌할 수도 없는 뇌파의 작동에 따라………… 흡사 산마루에 서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매달린 마른 나뭇잎이 겨울의 삭풍에 흔들려 스산한 소리를 내어 울 듯이,………… 아우의 입에서 그냥 무의미하게 쏟아져 나오는 비명{?}일 뿐이야. 


자기가 한 말[법칙]은 당연히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되겠지? 결정론자의 주장은 자기 자신도 그러한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을 시인하는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자신의 결과가 자신의 원인이 됨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아우의 숙명론적 사상은 내용[원인과 결과 등]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핵심은 똑같은 주장이 아닌가. 결국, 세계가 물질[단백질ㆍ전기적 신호ㆍ뇌파]로 되어 있고 물질적인 요소의 신호로 작동한다는 결정론적인 주장이니까.


생물의 행동이 결정론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톱니바퀴처럼 엄격한 결정론에 따라 규정된다면 숙명론자나 결정론자의 모든 주장 또한 태초로부터 끊임없이 이어져 온 엄격한 인과율의 규정 사슬에 따라 결정된 그들의 뇌의 파장에 따른 결과일 뿐 다른 아무런 과학적 추론의 결론일 리 없다. 


곧 결정론적 주장은 자기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판단에 따라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결정론적인 원인의 종속적이고 노예적인 결과일 뿐이라는 그들의 결론에 따라서 불가피하게 그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이러한 이론을 주장하는 것이 되는데 이를 주장하는 순간 자기의 주장 자체를 스스로 무효화시키는 지경에 이르고 말지. 이는 당연히 자기모순이며 자가당착이다. 


그래서 나는 소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위와 같은 주장을 피력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자가당착에 빠트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가끔 [제 입에 재갈]을, [제 손에 올무] [제 발에 차꼬]를 채우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정론의 올가미

아우의 주장에 관한 결론은 우리가 ┈물리적으로는 필연이겠지만 이유율에 따르면 우연에 지나지 않기에┈ 왜 우리가 아우 뇌파의 우연적이며 무의미한 결과물에 귀를 기울여야 할까? 그렇게 말하는 아우 자신도 전자기파이거나 단백질 덩어리이거나인데 우리가 전자기파나 단백질 덩어리의 말에 의미를 부여하여 귀 기울여 경청할 가치가 있는가? 만약에 아우가 숙명론자라면 위의 저 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모든 것은 물리적 법칙에 따라서 결정되는 거니까.     


자 이 주장에 공감하는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유물론자인가 관념론자인가를 판가름할 거야. 위의 견해처럼 인간의 뇌가 진화의 우연적인 산물이며 따라서 뇌의 작용이 엄동설한의 삭풍에 우는 삭정이 끝의 가랑잎 소리에 불과하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 공감한다면 결코 결정론이나 숙명론을 지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정론에서는 아무 것도 [주장(主張)]을 할 수 없다.

영빈은 이렇게 지적하고 덧붙여 말했다. 

“그러나 아우, 아우는 이 세상이 오직 물질뿐임을 강력히 주장한다┈면. 아우의 이 주장은 위에서 열거한 주장 ┈단백질ㆍ 전기신호ㆍ 뇌파의 활동 등┈ 과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다른 주장은 제외하고 대표적으로 뇌파의 영향만을 검토해 보자. 곧 아우는 이 세상이 변전하는 것에 관념 따위는 결코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다만 뇌파의 전기적 신호에 의해 조종된 작동 결과만일 뿐이라고 강력히 주장(主張)한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보다도 숙명론이나 결정론에는 [주장]이라는 개념 자체의 설 자리가 없다는 점이야. 주장이란 남에게 자기의 의견을 내세워 남이 자기의 의견이 타당함 ┈곧 그 의견이 진리임┈ 에 동의하기를 바라는 행동인데 결정론은 그런 주장을 할 수 없다. 


자연의 법칙은 엄중하다. 자유의지의 작용에 따르는 극히 작은 변혁을 빼고는 침범하여 고치거나 항거할 수 없는 현상이다. 따라서 결정논자들이 구차하게 자기의 이론에 동의하기를 구걸하는 주장을 펼칠 이유가 없다. 또한, 그 주장을 듣는 사람들은 그 주장에 동의할 수도 없다. 동의를 하든, 반대를 하든 그 결과는 이미 태초에 결정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지. 결정론자들이 그것을 주장해서 듣는 이에게 각인시키려 한다고 해도 그것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하다. 


듣는 이에게는 이미 듣는 순간의 행동이 빅뱅 때  다른 내용으로 채워질 것으로 결정되어 있었을 것이아닌가? 따라서 결정론자의 주장으로 이미 결정된 결과를 바꾸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결정론적 과학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그들이 할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다. 그들이 하려는 것을 성사시키기 위해 빅뱅 때부터 비워둔 자유 공간이나 시간이 배정되어 있을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결정론자들의 주장 여부에 관계없이 결정된 일은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결정론자들에게는 주장할 수도 없고 주장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아우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아우가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아무 데에도 없다. 아우가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오직 전기적 신호에 따라 조종되는 아우의 뇌파의 작동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이미 결정되어 있을 것인 결정론을 주장하는 것은 지붕 위에 지붕을 잇는 것{옥상가옥}처럼 불필요하며 그 결론은 무의미하다. 결정론적인 자연에는 그럴 필요성조차도 전혀 없다. 

    

숭명은 결정론적인 주장이 불가능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결정론자들은 무엇인가를 주장하거나 설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장하든 안 하든 또 그 주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모든 것은 이미 태초에 결정되어 있으므로 무엇을 주장한다고 동의할 수도 없거니와 반대할 수도 없겠지요. 아니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그런 주장을 하거나 말거나 그것들은 이미 태초에 결정되어 있었을 테니까요.”


숙명론이나 자유의지론이나 결과는 같다

[영빈] 지금 내가 음식점에 갔다고 하자. 나는 내 자유의지에 따라 음식점에 갔는데도 이것은 결정되어 있었나?

[숭명] 당연히 태초에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죠. 

[영빈] 내가 음식점에 가려던 생각을 내 자유의지에 따라 음식점에 가지 않고 갈 곳을 바꿔 커피점에 갔다면?

[숭명] 역시 당연히 태초에 결정되어 있었다고 해야 합니다.

[영빈] 내 자유의지에 따라 음식점에 가거나, 커피점에 가도 이미 태초에 결정되었던 일이라고 한다면 무슨     일을 해도 이미 태초에 결정된 것이라는 말인데 맞나?

[숭명] 맞습니다. 

[영빈] 그렇다면 무슨 일이 되었든 내가 자유롭게 해도 그것은 결정되었던 일이므로 결국 결정론의 결과나     〘이유율〙에 따른 자유의지의 결과는 똑같지 않은가? 내 자유의지로 한 일에 대한 결정론적인 해석은           자유의지론과 결과적으로 전혀 다를 바가 없네? 

[숭명] 그렇더라도 그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된 숙명에 따르는 결과일 뿐. 결정론적 과학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태초에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죠.

      

숙명론자 가운데에 진정한 결정론자는 없다

[영빈] 지금까지 결정론자나 숙명론자가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자기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결정론적인 신념을 충실하게 유지하기 위해 자기를 단순히 운명에 내맡기면서 [무위자연]하는 사람은 거의, 아니 전혀 없었다고 나는 장담한다. 노자까지도.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론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대도―의 순리대로 받아드려 기다리지 않고 그들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애쓰고 개선한다.

     

그들은 결정론을 믿게 된 뒤에도 계속 성공과 출세를 얻기 위해 열심히 학업에 매진하고 만점을 받기 위해 시험지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답을 쓴다. 그렇게 해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결정론자가 운명을 바꾸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운명이 바뀐다면 그것은 결정론이 아니지.


아니 그들이 결정론을 주장하는 자체가 믿기지 않는다. 그들은 과연 인과관계의 연구 결과 결정론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얻어서 주장하는 것이 맞을까? 내 생각에는 그들 자신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체가 이미 태초에 결정되어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스티븐 호킹은 아시다시피 생물의 행동이 톱니바퀴처럼  엄격한 뇌파의 결정론에 따라 규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위대한 설계》라는 책도 썼지. 그는 인간의 행위가 단백질의 작용이라면서 자신의 주장을 열렬히 소개했다. 그는 그 편치 않은 몸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주문 제작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런 의자는 아마도 그가 바라서 제작했겠지⎯ 그의 [(자유)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매진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결정론적으로 움직인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는 그러한 결정론에 거역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의지를 구사하기 위해 진력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유효이론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제한적으로만 유효한 자유의지가 있다고 한다.


*❰위대한 설계❱ 읽기에서 인용     

  

그들은 어려서부터 그들의 생존의 목적과 이상을 세우고 그들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애쓰고 이것을 달성시키기 위해 매진한다. 말로는 결정론을 주장하면서도 명예와 출세를 위한 목표를 세우고 비결정론적인 몸짓을 주저하지 않으며 숙명을 거부할 뿐, 만약에 그들이 진정으로 강한 결정론을 믿었다면 그렇게 했을 리가 없다."   

   

결정론의 반동 라플라스

어느날 숭명과 그의 스승인 정성민 교사가 만나 숙명론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숭명이 말했다. 

“라플라스가 결정론의 아버지인가는 모르겠지만 그는 완벽한 결정론자가 아니었습니다." 

" 그건 또 갑자기 무슨 말이냐?"

"라플라스가 결정론을 정립한 것은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숙명적인 인과관계에 따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인이라고 칭송할 근거가 없습니다. 더구나 라플라스는 그 뒤에 반동적인 행동을 계속합니다. 라플라스는 어떤 비판도 좋게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곳에서 사소한 트집을 잡았다고 합니다. 


라플라스는 또 나폴레옹이 집권하자 그에게 내무부 장관직을 얻고자 찾아갔었다고 합니다. 그가 찾아가거나 말거나 그는 결정론에 따라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거나 임명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랬을 텐데 왜 일부러 나폴레옹을 찾아갑니까? 그런 다음에 나폴레옹의 세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신호를 감지하자 재빨리 부르봉 왕가 쪽으로 돌아섰다는 것 아닙니까? 결정론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짓이지요. 


결의했다거나 일부러 한다는 것은 모두 자유의지를 지지하는 목적론적인 행동입니다. 따라서 일부러 한다거나 결의한다는 것은 결정론에 입각해 보았을 때 가장 악질적인 반동입니다." 


 "라플라스는 결정론 개념을 선도한 선구자다. 그런 위인에게 네 말은 좀 심하지 않냐? 그리고 너도 그와 마찬가지다. 네가 지금 라플라스에게 반동적인 행동을 했다고 비난하는데 반동이니 악질이니 하는 말들 역시 목적론적인 용어 아니냐? 결정론자라면 선악이니 미추, 진위 등의 가치 판단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 더구나 라플라스도 그에게 닥친 숙명을 어쩌지 못하고 그랬던 것 아니겠느냐?” 


“그건 그렇네요. 제가 좀 흥분해서 판단력이 흐려졌나 봅니다. 하지만 제가 한 말 역시 태초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을 겁니다.”


"차라리 절름발이 노예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진정한 결정론자죠! 그는 화가 나서 자신을 때리는 주인에게 말했다면서요? ‘그러시다가는 제 다리가 부러집니다. 거봐요. 부러졌잖아요.’ 자신을 보지 않고, 자신의 숙명을 바라보는 노예는 부동심의 여유를 얻는데. 그 주인은 평정심을 잃어버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결정론자들은 자신은 결정론이 옳다고 핏대를 세워 주장하면서도 스스로 결정론에 어울리는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아요." 


“또 오리게네스가 했다는 이야기 안 들어보셨어요?”

“무슨 이야기인데?”

“이렇게 말했다잖아요? ‘당신이 질병에서 치유될 운명이라면 의사의 진료를 받건 받지 않건 간에 치유될 것이다. 그렇지만 치유되지 않을 운명이라면 의사의 진료와 상관없이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질병이 치유되거나 치유되지 못할 운명 둘 가운데 하나이므로 의사의 진료는 필요 없다.’ 라구요. 


저는 오리게네스의 말이 숙명론의 표어처럼 꼭 맞는 정확한 진리라고 생각해요. 지금 의사들이 환자들을 치료해 보려고 열심히 노력 중이신데 다 쓸데없는 짓이지요.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치료해서 낫거나 치료하지 않는다고 죽거나 환자가 낫겠다고 결의한다고 나을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결의한다는 생각 자체가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말이잖아요? 나을 운명이라면 치료하지 않아도 나을 거구요. 죽을 운명이라면 치료해도 못 살아요.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요”


이 글은 필자가 집필중인  ❰마음의 얼개 ❱에서 옮겨온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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