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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무경 Apr 02. 2024

양심(良心)의 구조와 역할

도대체 양심이란 무엇이며 양심은 어떻게 짜여 있나?

도대체 양심은 무엇이며 어떻게 짜여있나?


①양심의 뜻

 

양심은 이성적 존재인 인간의 도덕적 능소(能素: 기능하게 하는 요소)인 이의(理意: 이성의 정신적 의지)로 행위의 정사선악을 인식하고 실천을 주도하며 반응하는 역할을 맡은 자기 행위의 심판관{옳고 그름의 판단자}이다. 

 

필자는 예로부터 초들어 온 [양심(良心)]이 도덕성이라고 믿지만, 양심의 의미가 여러 가지로 거론되어 지나치게 혼란스럽기 때문에 필자가 생각하는 한에서의 양심에 관해 초들려 한다. 

 

우리가 보통 [양심(良心)]이라고 부르는 용어에는 “넓은 뜻”과 “좁은 뜻”의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넓은 뜻”의 양심은 행위의 정사선악(正邪善惡), 곧 도덕성에 관한 [인지적(認知的{의식적})]ㆍ[의지적(意志的)]ㆍ[정의적(情意的{감성})], 곧 〘지(知) • 의(意) • 정(情)〙 일체의 역할을 주관하는 이성적 정신을 가리키고, “좁은 뜻”의 양심은 이들 역할 가운데 하나만을 가리킨다. 

 

소박한 정의적(情意的) 양심론

 

그런데 상식에서는 그 가운데 주로 [양정: 양심의 정의적 역할]만을 양심의 전부로 여기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일이 많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양심의 현상으로 [죄의식]이 있다. 거의 모든사람들은 도덕적으로 크게 잘못된 행위를 하면 양심에 따라 죄의식이 저절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죄의식은 양심의 한 분야인 [양정]의 감정적 반응일 뿐이다. 양심은 지(知), 곧 인식의 기능인 [지능]으로서의 [양지]과, 의(意), 곧 행동의 기능인 의지로서의 [양의], 그리고 정(情), 곧 반응 기능인 감성으로서의 [양정]이 구비되어 있고 각각 다른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이들 양심의 역할을 〘지(知) • 의(意) • 정(情)〙에 따라 좀 더 상세히 설명해 보겠다. 

 

지(知): 양지(良知)양지는 도덕성의 심판자이다. 주체적 양지는 객관적 도덕률의 근본 원리를 받아들여 자기 도덕성의 근거로 삼는다. 

 

의(意): 양의(良意): 양의는 양지의 규정에 따라 선택된 도덕률을 실천하는 역할을 한다. 도덕적 동기이다. 

 

정(情): 양정(良情): 양정은 양지의 판결에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양의]나 [양정]은 [양지]의 결정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며 실제로도 양지에 따라 작동한다. 양심에 가책을 가져오는 죄의식은 잘못된 행동, 곧 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의 지적 판단, 곧 양지의 판단에 따라서 [양정]의 감성이 반응한 결과이다. 무엇보다 모든 감성은 객관적 사태에 따라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주관에 따라 규정한 자기의 도덕성, 곧 행위 규준에 맹목적으로 반응만 하는 기능이다. 양심의 규준이 되는 [양지]가 바르지 않더라도 양심의 감성인 양정은 바르지 않은 그대로 맹목적으로 반응한다. 

 

➁상식적 양심: 

 

그런데 소박한 양심을 믿는 대다수의 평범한 대중은 행위 자체의 참된 도덕성을 거의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다만 [양정]의 반응에 따라서 맹목적으로, 곧 어떤 행위를 했을 때 양정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바르게 행동한 것으로,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그 행동은 그릇된 행동으로 단정한다. 

 

이처럼 행동을 의식함에 따라 발생하는 양정의 반응에 따라서 도덕적 당위성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소박한 감성적 양심론자(良心論者)]라고 불러보자.

 

“ 넓은 뜻”의 양심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ㆍ정ㆍ의 모두에 해당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고 그 가운데 “좁은 뜻”의 양심은 그 감성적 반응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정의적 기능으로서의 양심은 주체자가 행위의 도덕성을 의식함으로서 촉발되는 반응으로서의 감정을 말한다. 따라서 [소박한 감성적 양심론자(良心論者)]들의 주장은 행위의[ 도덕성을, 행위를 지각하는 과정에서 촉발되는 감성적 기능, 곧 양정에 의한 감성적 반응에 따라서 판별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상식의 허방다리(함정)]이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개인의 사적 양심이 정사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엄청나게 위험하다. 수많은 범죄자들이 각각 자기의 소박한 감성적 양심이 반응하는대로 남을 이용하고 해치면서도 양심이 시키는대로 정의롭게 행동했다고 믿는 것이다. 

 

❷양심의 역할 : 양심의 기능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

 

◆양심의 의식인 〘양지(良知)〙: 

〘나와 남(자타)〙의 행위를 도덕률에 비춰보아 어긋나지 않고 맞아떨어지면{일치하면} “옳다”고 판정한다. 

 

그리고 긍정적 반응이나 부정적 반응을 이끌어 내는 능동적 역할인 도덕률의 판별력: 본질 발현의 타당성을 거부하면 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이성의 논리적 판단력에 따르는 양지의 판결은 “관계 사물의 본질을 발현하라.”는 도덕률이 맡는다. 이 도덕률에 타당하다고 의식하거나 부당하다고 의식하는 데 따라 양심의 의지인 양의(良意)와 양심의 감성인 양정(良情)이 따를 뿐이다. [양지]의 판단력에 잘못이 있거나 발현되지 않으면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없고 그 평가 결과로서의 떳떳함이나 양심의 감성적 반응인 죄의식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양지가 바르지 않으면 양의나 양정도 제대로 작용할 수 없다. 

 

양지의 바탕에 올바른 도덕률이 터 잡지 못하고 그릇된 도덕률 ―거짓된 도덕률 · 사이비 도덕률― 이 둥지를 틀고 있으면 그가 아무리 옳은 행위를 하려 해도 올바를 수 없다. 양지의 바탕에 마비된 양심 • 타락한 양심이 터 잡고 있으면 그의 만행(萬行)이 모두 만행(蠻行)이 되고 만다. 잘못된 사상 • 엉터리 교리 • 어긋난 교육 • 맹목적 관습 추종 등이 그런 경우이다. 

 

◆양심의 의지인 [양의(良意)]: 

양지가 “옳다”고 판정한 행위에 대해 “하라”고 명령하는 실천적인 의지. 

 

따라서 이 원인으로부터의 자유 가운데 로부터의 자유란 논리적 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위하는 능력을 의미하며 자유는 소극적인 개념이지만 다른 편으로 보면 행동의 가능성이다. 

 

②로부터의 자유란, 행위를 영위할 때 도덕률에 속박되지 않으려 하여 모순에 빠지더라도 개의치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방종(放縱)┈를 말한다.

 

◆양심의 감성인 [양정(良情)]

♥눈먼 양정

 

양심의 가책 등 양심의 감성적 반응 역할을 하는 [양정]은 독립된 주체적 의식이 없다. 양정은 단순히 [양지(良知)]의 판결에 붙좇아 긍정적 반응이나 부정적 반응 ―가책이나 죄의식― 으로 나타내는 수동적 반응으로서의 역할만 할 수 있다. 

 

곧 양정은 다만 양지가 “하라”, 또는 “하지 말라”고 내린 명령에 [양의]가 그데로 따르면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부정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따라서 양지가 도덕적 판단을 잘못 내려도 양정은 스스로 판단해 반응할 수 없이 양지의 판단만을 따르는 맹목적성을 보인다. 이 때문에 도덕성 판정에 엄청난 혼란을 불러온다. 

 

정의적 기능으로서의 양심은 우리의 일반 감정과 전혀 똑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수동적인 기관일 뿐이다. 그것은 도덕적 감정이 아닌, 심리적 감정이 그러한 것과 같이 특정한 행동에 대한 의식에 따라서 발생하는 종속적인 현상이다. 

 

예컨대 지극히 사랑하는 연인이 자동차 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의 심리적 감정을 가정해 보자. 그는 매우 놀라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병원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런데 그 소식이 실은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에 관한 오보였다. 

 

그의 연인은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그의 슬픔은 사실에 의한 감정이 아닌 오보의 [의식]에 의한 반응이었던 것이다. 곧 감정은 그 정세의 사실 여부와는 달리 자신의 [의식]에 맹목적으로 반응한 셈이다. 

 

감정은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기관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의적 기능으로서의 [양정]도 이와 똑같다. 양정은 직각적 의식에 의해 반응만 한다. 

 

심리적 감정과 마찬가지로 [소박한 정의적 양심론자(良心論者)]에 관해서도 예를 들어보자.

 

종교적, 전통적 교육적 이유 등으로 잘못된 도덕관을 지닌 사람들이 자신이 지닌 도덕관의 타당성을 맹신하고 그런 도덕관에 의해서 느낀 맹목적 양정에 따라 당치 않은 도덕율에 따라 맹목적인 오류 판결을 내리고 이 명령에 맹목적으로 행동하며 또 이에 따라 맹목적으로 반응하여 쾌감을 느끼거나 죄의식을 느끼는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난다.

 

십자군 병사의 양심: 십자군 병사들은 그들의 성도(聖都)를 점령하고 있는 무슬림들에게는 커다란 증오심과 적개심을 품고 있다. 성도를 회복시키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로서는 적군인 무슬림들을 멸살시키는 데는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왼뺨을 때리거든 오른뺨을 돌려대라.”는 교조(敎祖) 예수의 지고한 교훈과 “살인하지 말라”는 엄숙한 십계명을 높이 받들어야 할 그들이 적군을 무찔러 죽이는 살인 ⸺그들은 아마도 이러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고 강변할지도 모르겠지만⸺ 을 저지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신에게 영광을 돌리면서 통쾌함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만 대표성을 나타내기 위해 강조했을 뿐 대부분의 [소박한 정의적 양심론자(良心論者)]들이 다 같은 심정으로 적을 대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안식일에는 쉬어야 한다거나 여호와 신에게 경배를 드려야 한다는 기독교적 율법이나 계명을 지키지 않는 등, 신에 대한 불경 ⸺기독교적 지성에 의하면⸺ 을 저지르는 행위뿐만 아니라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더라도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살인, 아니 남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죄의식으로 괴로워할 수가 있다. 

 

한편 전에는 죄의식을 느끼던 행위가, 그럴만한 근거가 없다고 믿게 된 이후로는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될 수도 있으며 반대로 처음에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저지르던 행위를, 그것이 잘못임을 의식하게 된 이후로 비로소 도저히 진정할 수 없는 격심한 죄의식을 느끼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하는 바이지만 문학작품 속에서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를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인《죄와 벌》의 경으를 예로 들어보자. 이 작품은 비록 허구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공감]을 느끼고 있는 명작이다. 그 작품에서 남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의 공리주의적 [양지]는 사회에 전혀 이로움이 없는 고리대금업 노파를 죽이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라고 믿고 살인을 저지르지만, 그것이 다수인의 쾌락을 증진시키는 일이었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당연히 살이넹 대한 죄의식[양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뒤에 여주인공인 소냐의 감화[양지의 인식(판단력)이 변해서]를 받아서야 비로소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가책을 느껴 자수한 뒤에 시베리아로 유형의 길을 떠난다. 

 

♥양정의 긍정감과 부정감

일부인들은 양정의 반응이 사람마다, 사회마다 다르다는 점을 눈치채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는 양정의 이 불합리함에 회의를 느끼고 아예 양지를 포함한 양심 전체를 불신하여 무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양심의 정적 반응은 매우 생생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정의적 능력인 양정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행위를 보고 의분을 느끼기도 하고 어떤 행동을 보면 감동을 받기도 한다. 남의 행동에 대한 지각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도 어느 때에는 떳떳함을 느끼고 어느 때에는 가책ㆍ죄의식ㆍ수치심 등 부정 감정[불쾌감]을 느낀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양정은 도덕률의 명령에 의한 실천의 결과에 따라서 선명한 [긍정감과 부정감]을 느낀다. 만약에 양심이 무시할만한 불신의 대상이라면 이러한 생생한 역할이 어떻게 작용할 수 있겠는까? 

 

긍정적 양정에는 마땅하고 떳떳하다는 기분인〘호연감(浩然感)〙등이 있고 부정적 양정은 부끄럽다, ┈본능적 부정 감정의 부끄러움은 열등 용질에 관한 것이다┈ 죄스럽다 등 죄의식 또는 가책 · 후회 등이 있다. 그러나 양정은 "본능적" 정취가 아니므로 양심의 정감 만족을 이기적인 만족과 같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자기애[자기애는 본능에 의해 일어나며 이기적이다.]와 이기심: 이타심은 이성의 양심에서 일어나므로 자기애가 아니다. 그러므로 양심의 긍정 감으로써의 떳떳함이나 당당함은 이기적인 감정이 아니다. 

 

본능이 감성 및 기력과 쉽게 결합되는 특성이 있는 것과 같이 양심은 지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과 같이 지능이 자주 본능에 의해 차용되어 영리함을 자랑하는 까닭에 지능이 영리함과 동의어로 여겨져 양심이 지능과 밀접하다는 사실을 이해함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양심이 요구하는 지능은 영리함의 지능과는 다르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 자기에게 유익하고 유리하게 행동함에 도움을 주는 지능이 아니라 행위의 논리적 타당성 여부를 예민하게 판별해 내는 현명한 지능인 것이다. 

 

영리함은 생존에 도움을 주지만 현명은 도덕적 법칙과의 일치 여부를 판별함에 도움을 준다. 그래서 이 법칙을 준수하기 위해 생존의 불리와 불익을 감수하는 일도 적지 아니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행위의 모순성을 파악하는 데에는 큰 지력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보통 이성이라고 할 때 이미 여기에 지적 성격이 반영되어 있음을 간취하기 때문에 이성의 지적 측면을 별도로 구분해 보지 않는 결함이 있다. 칸트는 이러한 결함을 간파하고 이성을 [이론 이성]과 [실천이성]으로 불러 구분하여 이론 이성을 지적 측면의 이름으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도덕적 법칙의 파악보다 순수 이념의 인식 능력이라는 의미를 더 강하게 준 바 있다. 

 

이처럼 양심이란 실천적 측면에서 볼 때는 이성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성과 기성이 대립되어 갈등하듯이 본능과 대립 갈등하는 위치에 있다. 

 

➁양심의 역할 오류

양심 자체는 제대로의 구실을 하지만 양심에 유입되는 외부의 잘못된 도덕률 때문에 그릇된 역할을 하는 오류(誤謬)가 없을 수 없다.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오양지(誤良知)], 그릇된 행위를 저지르는 [오양의(誤良意)], 그릇되게 반응하는 [오양정(誤良情)]이 생길 수 있다.

 

행동의 정당성 여부를 판정하는 능력은 이성의〘예지적(叡智的)〙[의식]인 [양지]이다. 양심이 이처럼 행동의 가치 판정자인 이성(理性)의 기준에 종속되어 반응하는 수동적 기능이기 때문에 양심이 행위의 정사선악(正邪善惡)을 독자적으로 판정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상식의 견해는 잘못이다. 도덕성 판단은 이성적 정신 기능인 의식이 담당한다.

 

양심을 불신하게 되는 것은 양정이 양심의 유일한 역할인 줄로 잘못 판단한 탓일 뿐이다. 양심의 도덕성 평가가 확실하게 합리적이라는 점을 보증하는 역할은 양지가 맡는다. 

 

이러한 감정[양정]은 행동의 이해(利害)나 호오(好惡)와는 다르다. 그것은 분명히 행동의 도덕성에 관한 반응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에는 많은 의문점이 제기될 수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이 주장이 타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몇몇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③양심 발현의 장애물들-양심의 타락(墮落)과 마비(痲痹)

 

마비란 신경이나 근육, 또는 어떤 체계의 기능이 극히 둔해지거나 아예 정지되는 일을 뜻한다. 생명체의 몸에 마비가 일어날 경우, 감각이 없어지고 힘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된다. 흔히 두부외상이나 뇌졸중 등 뇌의 내·외부적 손상으로 인한 경우나 타격이나 화상 등에 의해 경추 부위나 상하지의 신경에 손상이 가해지는 경우, 지나친 음주로 말초신경이 손상되는 경우 등, 마비가 발생할 수 있는 경로는 다양하다. 어딘가에 크게 부딪힐 때 통증과 함께 해당 부위가 얼얼하면서 근육을 움직이기가 힘들어지는 경우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겪을 수 있는 마비이며, 일시적으로 졸음이 생기거나 정신 기능이 저하되면서 마비가 동반되기도 한다.[나무 위키] 

 

양심의 마비 : 마비란 신경이나 혈맥이 저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양심의 마비란 양심의 〘지 • 의 • 정〙 역할 일부가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 현상을 가리킨다. 

 

양심의 타락: 마비가 양심이 저려서 그 역할을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타락은 아예 양심 자체가 정신력에서 제외되어 활동할 수 없이 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여겨진다. 마비보다 더 절망적이다. 

 

양심의 마비나 타락은〘갈말[용어]〙의 뜻이 조금 다르지만, 그 영향력은 큰 차이가 없다. 양심의 〘지 • 의 • 정〙한쪽이 마비되어도 결과는 타락과 거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심의 타락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결국 양심의 마비를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양지]의 판단력 타락{마비}

 

의식의 기능 저하: 중독 • 맹신 • 판단력 부족

 

잘못된{사이비 • 맹목적} 도덕률을 지닌 경우: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믿고 있는 신념이 사실은 잘못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양정은 판단자가 이미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도덕률 ―올바르지 않은 주관적이고 사적인 사이비 도덕적 신념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이 쉽게 직감적으로 잘잘못을 판정하는데 이를 그대로 믿고 따르기 때문이다. 

 

사상의 경우: 자기가 지지하는 사상에 문제가 있음에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맹신하는 까닭에 벌어지는 마비{타락}이다. 특히 도덕률이나 양심의 역할을 부정하는 유물론적인 사상을 지닌 경우, 인과율에 따라 판단력의 타락이나 마비가 올 수밖에 없다. 

 

종교 신자의 경우: 종교의 교리 자체가 비도덕적이어서 엉뚱한 도덕의식인 〘오양지〙를 주거나 본인이 교리 해석을 주관적으로 해석해 〘정도(正道)〙를 걸을 수 없음에도 그릇된 신앙으로 무장해 양심이 마비되고 타락해서 잔인해지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비도덕적 신앙에 따른 그들의 오양지는 오히려 의기양양하고 기고만장하며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도 복수심의 만족 • 정의를 수호했다는 신념 등〘오양의〙달성에 따른〘오양정〙의 통쾌감을 느낀다. 

 

많은 사상가과 종교인들은 도덕의 근본 원리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한 채 자신들에게 타율적으로 주어진 주관적 도덕률이나 [교리]를 맹목적으로 신봉하고 이에 입각해 선악과 유죄 • 무죄를 심판해 왔다. 

 

사례: 

●마녀 재판관의 양심

 

서양 중세의 마녀 사냥꾼들과 심판관들은 이런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들은 애매한 사람들을 잡아 고문하고 잔혹하게 화형을 시킨 사탄 이상의 악마들이었다. 올바른 도덕성에 따라 올바르게 행동하기는커녕 잘못된 자기의 주관적 오양정이 반응하는 대로 행동하여 오히려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고서도 자신의 행동이 비도덕적일 뿐만이 아니라 엄청나게 사악한 행동이라는 싸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사랑이 넘치는 여호와 신의 대리인이 되어 마귀에 뒤덮인 어두움의 세상을 밝게 정화한 [정의의 사도]로 여기고 의기양양하여 환호했다. 

 

마녀 사냥꾼들의 행동은 역사상 가장(?) 악랄했지만, 그 밖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악행이 정의나 정당한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 왔다. 

 

❉일부 모슬렘들은 코란의 일부 교리를 맹목적으로 수호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잔인하게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사후에 천국에 들어 72인의 처녀들에 둘러싸여 호강하며 사는 상상으로 크게 기뻐 날뛰면서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이 잘못임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엉터리 매체와 잘못된 교육 등이 포함된 제도에서 얻은 잘못된 정보에 의한 의식의 마비와 타락.

 

ⓑ책임 의식의 분산: 단계가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사회 체제에서 상부의 지시가 하부에 전달되거나 반대로 하부의 보고가 상부에 전달되더라도 틈이 벌어져 늘어난 층 ―책임소재 불분명 등― 때문에 양지가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는 〘오양지〙 상태가 되기 때문에 정조(情操: 이념적 가치 감정) 역시 순조롭게 작용하지 못한다. 

 

ⓒ사회 가치관의 문제: 사회가 양심 등 이성적 가치관에 등 돌리고 있으므로 이에 물든 대중의 양심 발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눈먼 정의감: 청년들의 양지는 표면적으로는 매우 정의롭다. 그런데 국가나 사회의 교육과 가치관 때문에 오도되어 그 양심의 발현이 매우 부정의하여 정당성 없는 행태를 정의로운 행태로 오인하는 일이 흔하다. 히틀러 유겐트 • 마우쩌퉁의 홍위병 •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 • 북한의 주체사상 등은 청년들의 대표적인 [눈먼 정의감(盲目 正義感)]의 현상이다.

 

♣[양의]의 실천력 타락{마비}

 

 이기심에 의해

자기의 생존 • 자기애 등의 이기심이 성하면 도덕성이 쉽게 위축될 수 있다. 생존과 연결된 이기심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가내하한 독재적 〘폭세〙를 저지른다. 이에 따라 독재적인 이기심이 양심의 역할을 어렵지 않게 마비 타락시킨다. 

 

 중독에 의해

자기가 제어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본능적 • 신체적인 인과 관계의 유혹과 조종에 의해 지배되어 벌어지는 도박 • 게임 • 음주 • 펜타닐 • 아편 등의 약물 중독에 의한 타율적인 심신 마비와 타락은 흔하게 벌어지는 현상이다. 

 

 욕망에 의해

자제할 수 없는 본능의 타율적 탐욕: 굶주린 성욕 • 식욕 • 호기심 • 만용 • 자기 제시욕에 따른 경쟁욕의 시기심 • 질투심으로 인한 양심의 마비와 타락


♣[양정]의 반응 타락{마비}

 

 양지의 잘못에 따라 맹목적 비합리적 감성: 주로 의식에 의해 반응하는 감성은 당연히 잘못된 양지에 따라 잘못된 반응을 나타내 보인다. 

 

 감성의 반응성 이상: 감성 자체의 이상에 따라 일어나는 마비의 비정상적 반응

 

 쾌락의 종{노예}: 정도(正道)를 마비시키는 쾌락적 중독의 약품 복용: 펜타닐 술 담배. 사도로 빠지는 악습에의 중독: 도박 • 색욕 • 게임 등 자제할 수 없는 행동 등의 마비와 타락.

 

특히 양심적 능력 가운데 탁월함을 가장 세게 발휘하는 부분은 [자기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심판관 역할을 하는 [자기의식(자의식)]으로서의 양지이다. 

 

무엇보다 양심은 바깥에서는 그 누구도 파악할 수 없는 자기 행위에 관한 은밀한 진실을 자기의 의식적 기능에 의해 파악할 수 있다는 점 ⸺현대에는 예컨대 [거짓말 탐지기] 같은 장치로 얼마간의 진실 파악을 시도 중이지만⸺ 이다. 아무리 완전범죄를 시도하는 사악한 범죄자라도 자신의 양심의 법정에서는 자신의 행위의 의식{진실}을 감출 수 없다. 그래서 대중이 “너는 양심이 있느냐? 없느냐?”고 힐문하면서 가장 많이 제기하는 분야가 바로 이점, 

 

곧 드러나야 하는데도 남들은 파악할 수 없는 그만의 은밀한 진실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상대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사악하고 영리한 범죄자라 하더라도 진실을 감추려는데 대해 “양심의 자기 법정의 심판관으로서의 자의식인 양지”는 양정을 통해 스스로에게 가차 없는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며 [가책(苛責]이라는 처벌을 부과한다. 자기의 의식과 양심은 한 몸으로써 그 가운데 하나를 떼어버릴 수는 없기에 가책을 피할 수 없다. 


양정은 남의 행위의 정사선악을 꼲아 가릴 수가 있으며 남의 정의적 기능을 비록 짐작할 수는 있지만, 밝히 알아낼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동기와 행위의 정사선악의 판단과 행위에 관해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곧 양지의 의식이 자각하는 한]에서 일 뿐이기는 하지만 뚜렷한 지각과 그 지각에 입각한 평가에 따르는 반응, 곧 떳떳함이나 가책을 떨쳐버릴 수 없게 한다. 

 

[결론]

 

따라서 정사선악을 심판하는 역할은 [양지]가 맡는데 양지가 정사선악의 판단으로 삼는 기준이 도덕률이다. 그리고 이 도덕률을 위반하면 모순에 빠진다. 인간은 모순에 빠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이성적 존재이므로 도덕률을 자기의 의무로 삼아 지키지 않을 수 없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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