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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무경 Apr 01. 2024

예술에 관한 짧은 생각[短想]

예술은 그 자체 목적인가? 다른 활동의 수단인가?


예술은 그 자체 목적인가다른 활동의 수단인가? 


수단이라 함은 어떤 의도를 실현시키기 위해 행하는 방법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실현시키려는 의도로 설정한 그 어떤 의도를 우리는 목적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수단이라는 것은 목적의 하위 개념에 틀림없으며 목적과 수단은 주종 관계가 형성된다. 수단은 목적 개념에 종속되며 목적 개념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다.       

하나의 목적을 실현시키는 수단은 반드시 하나이여야 할 필요는 없다.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단 가운데 어떤 수단이 좋은 것인가는 전적으로 목적 개념의 달성 여부에 따라서, 즉 목적 실현에 얼마나 효과적이며 정확한가에 의해 평가되어 마땅한 것이다. 


<건강>이라는 목적을 상정해보자.     

적당한 운동을 한다든가 영양이 풍부한 식사를 한다든가 너그러운 마음을 간직한다든가 건강 검진을 자주해서 병에 걸리지 않게 예방을 철저히 한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건강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다.     

이 수단들은 어디까지나 건강의 종속적 개념들이어서 건강 달성 여부에 의해 가치가 평가되며 그 수단의 내용도 건강의 달성 여부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형태상 똑같아 보이는 태권도라 해도 그것을 건강 증진의 수단으로 수련한다면 그것은 건강에 종속되며 자기 신체의 방어 목적을 위해 수련한다면 그것은 건강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호신술의 범주에 들어가야 마땅한 것이다.  


만약에 예술이라는 것이 다른 어떤 목적의 수단적 활동이라면 예술은 그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편입되어야 마땅하고, 예술의 모든 활동은 그 목적의 달성에 효과적이고 정확한 실현을 위하는 쪽으로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미술이 만약 어떤 사상 ⎯예컨대, 정치사상이나 반전(反戰) 사상 또는 공산주의 이념의 홍보⎯ 의 달성을 위한 수단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종이 위나 동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형상과 색채의 창조적 행위라 하더라도 그것은 일반적인 미술(예컨대, 순수한 미의 창조라는 등의)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  

   

그것은 각종 투쟁/ 집회/ 선전 등의 활동과 동일하게 그러한 사상의 하나의 종속 개념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         

목적; 반전사상         


수단; (반전) 투쟁/ (반전 )집회/ (반전 )학생운동/ (반전) 강연/ 미술에 의한 ( 반전 )선전         

*이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것조차 내가 여기에서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러한 기초 중의 기초조차도 알지 못하는 이들이 학교에서의 학습이나 시정에서 어리석은 자들로부터 얻어들은 얼토당토않은 의견을 당연한 듯이 개진하고 있는 일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이라고 함은 아름다움(아름다움이라는 말의 의미가 그리 단순하거나 명확한 것이 아니지만)을 창조하는 활동이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나 역시 이러한 주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바이다.        

그러한 한에서 예술은 아름다움 창조의 한 수단이 된다.    

  

그리고 만약 이 정의가 타당하다면 예술은 아름다움의 수단 이외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아름다움 창조만을 목적으로 하여 활동해야 한다.   

  

곧 예술은 아름다움(미)의 창조를 위한 수단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 자체 목적이다. 바꿔 말하면 예술은 미의 창조라는 의미를 빼고는 그 어떤 활동의 수단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지금껏 예로부터 예술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내왔던 활동이라고 지적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개념의 활동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예술이 다른 활동의 수단이 아니라 미를 창조하는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예술을 다른 활동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몇 가지의 견해를 반박하려 한다.    

    

예술을 철학이나 사상의 표현으로 보는 견해에 관해.  


예술 가운데에서 문학 작품은 언어를 통해 그의 미적 감흥을 표현한다. 그런데 언어라는 것은 직관적인 면보다 개념적인 면에 강점이 있다(모든 학문이 언어로 표현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인지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문학가, 특히 소설가들은 그의 작품을 예술 창작품으로 여기기 보다는 논문으로 간주하는 일이 흔한 것처럼 여겨진다.      


아무리 언어로 표현하는 문학이라고 하더라도 그 본분은 예술 창작이기 때문에 예술적 측면에서 작품을 써야 하는데 그 수단인 언어의 특성에 매여 보통 소설이 아닌 철학 논문 같은 작품?을 쓰는 것을 흔히 본다.

      

말하자면 이야기가 있는 철학 논문, 풀어쓴 사상 같은 작품들이 넘쳐난다. 이것은 예술가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철학 우화 작가로서의 작가라 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작가(소설가)는 주제에서나 소설 내용상에서나 자기의 주장을 직설적으로 펴서는 안 되는 것이다(시는 이것이 가능하다). 그가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자마자 그것은 예술품이 아닌 우화 철학 논문이 되기 때문이다.       

작가에게는 무엇보다 철학적 주장과 예술적 표현의 구별이 필요하다. 


나는 예술가가 철학을 하거나 사상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실 예술가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사상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예술 작품의 창작 목표를 미의 구현에 두지 않고 사상의 전달에 두려 한다면 그의 작품은 이미 예술 작품이 아니다.      


※예를 들어 톨스토이의 일부 작품이나 실존주의 문학이 특히 그러하다. 실존주의는 그 주장 자체가 삶과 직접적 관련이 깊어서 문학적 주제와 관계가 깊은 것이 사실이고 실존적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서 예술적 감정을 촉발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는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사상을 주장하는 것으로 제시될 때 그것은 이미 예술의 범주 안에 머물지 못하게 된다. 카뮈의 《이방인》,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등이 그러한 예이다.      

예술가는 위대한 사상가가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예술 작품과 사상서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사이 일부 화가들이 그들의 시각적 작품을 사상이나 철학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작태를 나는 참으로 한심하게 본다.   

  

미술가가 철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철학은 엄정한 논리를 바탕으로 전개해야 한다. 따라서 철학을 하기 위해 극명한 언어를 구사해도 개념의 혼동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겠다는 그 만용에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끼워놓은 글하이데거 예술론의 문제조요한의 예술철학에 인용된-》 

조요한의《예술철학》제 1부 2. "예술가의 사명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명"이라는 글에서 조요한은 봔 고흐의 농부의 구두에 관한 하이데거의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의 근원"에서 이러한 주장을 했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이 구두가 어디에 놓여있는지 어디에 속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 구두의 닳아버린 내부의 검은 구멍에서 농부의 고달픈 걸음을 볼 수 있다. 이 구두의 거친 무게 속에는 변화 없는 똑같은 밭고랑을 궂은 알을 헤아리지 않고 오고간 이 주인의 강인성을 나타내고 있다. 대지의 습기가 가죽에 흔적을 남기고 있고 밑창에는 해 저무는 저녁의 숲길을 걸어오던 고독이 아로새겨져 있다. 

     

구두 속에는 대지의 말 없는 환호 소리와 익은 곡식의 선물을 전하는 대지의 정적과 겨울이 되어 황폐한 휴한지에 퍼져있는 대지의 알 수 없는 절교(絶交)가 아롱거리고 있다. 이 구두는 먹을 것의 확실성에 대한 불평 없는 염려와 곤경을 다시 극복하였다는 말 없는 즐거움과 해산 때의 안타까운 몸부림과 죽음의 위협에서 오는 전율을 묘사하고 있다.     


이 구두는 대지에 속하고 있고 농부의 아내의 세계에서 보존되어 왔다. 이 보존된 예속에서 이 구두(道具)가 생겨서 자족에 이르렀다(M.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Holzwege, 1963. s. 22 ~ 23.)        

철학의 제 문제소광희 ∙ 이석윤 ∙ 김정선 공저지학사 간의 미의 본질에 소개된 하이데거의 소론   

"여기에 농가 부인의 한 켤레의 구두 그림이 있다. 한 짝은 제대로 있고 한 짝은 눕혀져서 제멋대로 흐트러진 한 쌍의 구두 ⎯ 오직 그것 뿐 그밖엔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들어졌으며 실과 못으로 꿰매져 있다.………… 구두는 그 부인의 도구이며 부인에게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그것만을 표현한 것일까? 


이 한 켤레의 구두는 농가 부인의 세계에 속한다. 그 부인이 때로는 석양에 농장의 일을 끝내고 피로하여 무거운 다리를 끌고 돌아가기도 했을 것이며, 때로는 다가올 풍요를 꿈꾸면서 마음속으로 즐거워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이 한 켤레의 구두는 부인과 함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이 구두를 통하여, 빵을 확보한 부인의 기쁨, 곤궁을 이겨낸 말 없는 환희, 장래의 출산에 대한 두려움, 죽음의 위협에 대한 공포 등을 읽어볼 수 있다. 구두는 대지에 속하면서 동시에 부인의 세계 속에 보존되어 있다. 이런 속에서 구두는 구두로서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인은 단순히 그 구두를 신고 다닐 뿐이다. 지쳐서 고단하게 돌아온 때에는 구두는 내팽개쳐졌을 것이며, 아직 밝지 않은 새벽에는 구두는 부인의 발에 신겨져서 들로 동행했을 것이다. 축제일엔 부인은 그것을 신고 춤을 췄을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구두의 도구로서의 유용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인은 그것을 낱낱이 관찰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신뢰할 뿐이다. 이 신뢰성은 구두가 부인의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 부인과 일체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와같이 고호의 그림을 통해서 어느 농가 부인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그림은 바로 한 존재자의 세계를 현시한다.  예술 작품은 존재자의 참된 세계, 존재자의 진리를 현시한다. 즉 예술은 진실로 있어야 할 존재자의 진리, 세계를 들어내는 것이다.    

    

예술의 본질은 존재자의 진리를 작품 속에 완성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존재자의 세계를 작품 속에 완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가 개시될 때 비로소 역사가 시작된다. 예술은 역사 성립의 근원이기도 하다. 


나로서는 이 글을 읽고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한 켤레의 헤진 구두 그림에서 이렇게 풍부한 내용을 읽어내는 하이데거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도대체 이처럼 한 조각의 그림을 보고 상상을 하기로 말하면 아마도 이 구두 속에서 그리스 로마의 전 신화 체계를 읽어내지 말란 법도 없으리라. 아니, 온 우주의 삼라만상이 나오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상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고흐의 구두를 보고 그 구두 주인인 농부 부인의 삶에 그다지 관심을 가질 이유는 과연 있는 것인가? 


그리고 화가들이 무엇을 그리거나 짓는 등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또 음악가들이나 문학 작가들이 묘사하거나 언급하는 것마다 우리가 그들의 작품의 소재(素材)에 대해 일일이 그러한 관심을 기울여서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화가나 작곡가나 문학 작가들이 우연히, 또는 의도적으로 선정한 그 작품의 소재에서 어떻게 현시된 참된 세계를 파악하게 되는지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술을 혁명의 수단으로 보는 견해.  

  

예술은 정치도 아니요, 혁명도 아니다. 문학적 호소력이 대단히 효과적이라는 점은 여기에서 지적할 필요도 없이 자명한 일이기는 하다. 그래서 정치가나 혁명가들이 정치적 목적 달성이나 혁명의 성공을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고취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들의 정치적 주장이나 혁명의 성공을 기하기 위한 수단으로 흔히 예술적 표현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예술의 탈을 쓰고 있을 뿐, 실제로는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비유로 말하면 그것은 정교하고, 그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게 제작된 정치적/ 혁명적 팜플렛인 것이다.  

    

나는 예술가가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거나 혁명 대열에 합류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도 엄연한 현실적 존재이며 정치나 혁명에 열렬히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예술 활동과 정치/ 혁명적 활동을 혼동해서, 예술이 혁명이고 미의 창작이 정치적 활동이라는 등으로,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이 그 개념을 뒤섞어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예술을 사회 개혁 활동으로 보려는 견해


많은 사람들이 예술가가 사회 개혁을 위해 그의 글[바꿔 말해 예술] 솜씨를 발휘해 줄 것을 바란다. 현실의 모순(?: 도대체 그들이 모순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나 있는지 적잖이 의심스럽지만)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발전된 방향으로 가도록 하라는, 계몽주의식 역할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예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예술가가 현실의 불합리한 점과 질곡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묘사하여 그로부터 미적 정취를 향수할 수 있도록 도모하는 것은 훌륭한 예술적 감각이며 방책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을 개혁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고취시키는 순간 그는 예술을 버리고 사회 개혁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 된다.      


나는 예술가가 사회의 개혁에 눈감으라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유능하다면 훌륭한 예술가인 동시에 얼마든지 위대한 사회 개혁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산물로서의 작품에 사회 개혁을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술과 사회 개혁은 전혀 별개의 활동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를 혼동해서 작품을 통해 사회 개혁을 부르짖자마자 그는 예술가로서의 작가적 소명을 버린 것이 될 것이다.   

   


예술가를 과학자로 여기려는 견해


일부 사람들이 한동안 화가를 정밀 묘사가로 착각한 일이 있었다. 미술 전시회에 전시된 회화를 실물로 착각하는 관람객들을 보고 그 화가의 솜씨에 감탄하곤 했다. 그 작품이 참된 회화 작품일까? 물론 그 작품에서도 예술적 정취를 향수할 수 있다면 그것은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작품의 작품성(작품으로서의 가치)이, 실물을 사진처럼 찍는 그 기술에 두는가, 아니면 정취의 유발에 두는가에 있는 것이다. 만약에 사진처럼 찍는 기술에 가치 평가의 기준을 둔다면 아무리 훌륭한 화가라고 해도 10만 원짜리 사진기만 못할 것이다. 


그런데 정교한 사진기가 대중화되어 있는 현대에도 위대한 화가들이 작품 활동을 한다. 그것은 예술이 실물을 그대로 묘사하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라 시대의 솔거 이야기도 그러한 측면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그가 그린 소나무를 실물로 착각한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다가 미끄러졌다는 점에서 솔거의 화가로서의 가치를 평가하려 한 옛날 교과서의 어리석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의 본분에 관해 그와 유사한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부지기수로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예컨대, 예술이라는 것이 현실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이라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조요한씨의《예술 철학 서론》첫머리에 이러한 글이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바슐라아르(Bachelard)는 시인(詩人)들은 타고난 현상학자(現象學者)이다'고 말하였는데 예술은 실로 사물과 인간의 모습에로 인도하는 길잡이이다."  

    

그 바로 위 첫 줄에 이러한 글이 쓰여 있다.  


"예술은 인간으로 하여금 "보는 것"을 가르쳐 준다. "보는 것"이란 눈동자에 비추인 사물을 보는 일에서 시작하여 나아가 그 사물의 본질을 보는 일이다. [햄릿]의 비극을 보는 일이란 인쇄된 서적을 읽는 일이나,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 일에서 시작하여 셰익스피어에 따라 햄릿 자신을 보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보는 일이란 한 사람의 성격, 말, 행동을 통하여 "사람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일을 말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사실이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과연 그러할까? 우리가 [햄릿]을 보는 것은 그의 성격과 말과 행동을 보고 햄릿이라는 사람을 파악하기 위함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가 햄릿을 보는 것은 심리학자이기 때문도 아니고 인물 연구가이기 때문도 아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할 수 있다고 나쁠 것은 없겠지만, 우리가 [햄릿]을 감상하려 하는 의도는 햄릿의 심리나 성격을 파악해서 인간이란 이러한 존재로구나! 하고 인간성을 파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만약에 작품 속의 인물들의 성격, 말, 행동을 통해 사람이라는 것을 파악하려 한다면 우리는 왜 현실의 인간 탐구를 젖혀두고 소설 속에 그려 넣은 가상의 인물을 탐구하려 한단 말인가?     


왜 하늘에 떠 있는 달을 관찰하지 않고 연못 속에 비친 달그림자를 관찰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햄릿의 비극을 통해 얻으려 하는 것은 그 극이 주는 정취[情趣: 햄릿의 비극에서는 비감성(悲感性):  이 이상의 상세한 설명은 뒤에서 하려고 하며 우선은 이렇게 표현하려한다]를 향수하려는 것 이외의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사군자(四君子)의 대나무 그림을 보려는 것은 대나무의 생물학적인 특성을 보려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대나무에 관한 사실을 알려고 하면 왜 직접 대나무 숲으로 가서 관찰하지 않고 사군자의 대나무를 보려 하는가?  우리가 사군자의 대나무 그림을 보려는 것은 그 대나무 그림을 통해 나타나는 화가의 정취를 공감하려는 것일 뿐이다.

      

아주 소략하게 적었지만, 결론은 예술가는 과학적 탐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훌륭한 예술가가 위대한 과학자일 수는 있지만 모든 예술가가 과학자일 수 없고 과학자가 예술가일 필요도 없다. 과학과 예술은 엄연히 그 분야가 다르고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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