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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무경 Apr 02. 2024

상대적 도덕

상대적 도덕론의 오류

도덕률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며 보편적이고 논리적 필연성을 띠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도덕이 사회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상대적 도덕률을 지지 한다. 필자는 상대적인 도덕률이 무엇 때문에 지지되는지 하나의 예를 들어 그 부당성을 반박해 보고자 한다. 



김태길 교수의윤리학에 쓰인 [언어]의 도덕성

상대주의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하나의 이론을 예로 김태길 교수*의 주장을 들어보겠다. 김 교수는 그의 저서《윤리학》에서 윤리적 절대론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표명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도덕을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타당성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뚜렷이 밝히고 있다.*  

    

필자가 상대주의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이 견해를 선택하는 이유는 이 견해가 매우 정교하여 세인들에게 상대주의의 오류를 간파하기 곤란하게 만들만큼 교묘하기 때문이다. 김태길 교수는 우선 상대주의 윤리설 확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 사회학자 W.G. 섬너의 도덕관을, 그의 주저인《풍습(Folk ways)》으로부터 인용하고 있다.


“도덕이란 어떤 이성적 관념의 체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일반적 생활양식, 즉 풍습에서 유래한다. 인류가 그들의 원시적 욕구를 채우려는 맹목적인 노력의 과정에 있어서 어떤 행동 양식은 유익하고 어떤 양식은 무익하다는 것이 거듭된 시행착오(trial and error) 끝에 알려진다. 유익함이 밝혀진 행동의 양식은 일반이 다 같이 따르게 되니 이것이 곧 풍습의 형성이다. 풍습이 사회의 복지를 위하여 공헌하는 것으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보통 말하는 관습(mores)이 형성된다. 


관습은 이미 개인의 의지를 초월하는 것이며 개인의 행동을 제약하는 구속력을 갖는다. 그리고 우리가 자랑하는 도덕이라는 것도 실은 저 관습의 세련된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개인들의 관습과 문명인들의 도덕 사이에는 오직 발달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근본은 같은 성질의 것이다. 도덕 판단이란 우세한 관습을 대변하는 것에 지나지 아니하며 가장 세력 있는 관습에 일치하는 행위는 옳은 행위고 그렇지 않은 것은 그른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김태길 《倫理學》 박영사 1989. 2 28. 중쇄판 158쪽     


문법과 도덕의 비슷한 점

김태길 교수가 도덕 현상을 시대와 장소의 제약을 받는 상대적인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또한 듀이(Dewey)에 의해 계발된 바가 크다는 도덕과 언어(또는 도덕률과 문법)의 비교 고찰의 결과가 특히 크게 작용하고 있다.*ibid 344p.     

그에 의하면 도덕 원리를 타당한 것으로도 만들고 부당한 것으로도 만드는 것은 절대적인 도덕률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이라고 한다.*ibid 343p.     


따라서

“사회가 다르면 언어도 다르듯이 시대와 국가에 따라서 다른 도덕이 신봉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약에 두 사회가 완전히 떨어져 있다면 이 두 사회에서 각각 타당성을 갖는 도덕의 체계는 상당한 차이를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ibid 346p.     


그리고 이와 같은 사정은 언어(또는 문법)와 도덕이 아주 비슷한 바가 있다는 것이다. 곧 “우리는 언어에 옳은 용법과 그른 용법의 구별이 있음을 믿는다.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좋은 발음을 애쓰고 철자법이 `틀릴'까 걱정한다. 그리고 우리는 문법상의 잘못이 정말 오류임을 믿는다. 


그러나 도대체 문법에 있어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어떤 말투는 현실에 있어서 옳은 것으로써 적용되고 있는 반면에 다른 어떤 것은 그릇되다는 인정을 받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 이외에 이 구별의 객관적인 근거가 될 만한 것을 생각할 수가 없다.*ibid 344p”

     

언어에 관한 김태길 교수의 이러한 지적에 대해서는 필자도 전적으로 공감을 표시하는 바이다. 그동안 이 세계 안에서 사용되어 왔거나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언어의 종류는 수 천여 종이나 된다고 한다. 그 언어들은 모두 사용되던 그때 그곳에서는 타당한 것으로 통용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언어들이 장소를 달리하고 세월이 지나면 타당한 것으로 통용되지 못하고 배척되었다는 사실 역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문법의 타당성도 마찬가지이다. 김태길 교수의 설명을 다시 그대로 인용해 보자. 


“남녀칠세부동석”“남녀칠세석부동”의 타당성은 다만 사회적인 인정에 따라서 결정됨. **ibid 344p     

이와같이 단어에서나 문법에서 옳고 그른 어법이 있어 왔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시대가 지나고 오랜 훗날에 이르면 어법이나 단어가 변하여 어느덧 타당한 말로 통용되던 언어가 퇴색하고 새로운 말이 발생하여 옛말을 밀어내고 옳은 것으로 행세하게 되는 것이 언어의 보편적인 현상임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특정 언어에 절대적인 타당성이 없다는 주장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김태길 교수는 언어에 관한 이러한 통찰을 똑같은? 사회적 현상의 하나인 도덕에 그대로 적용하여 도덕적 상대론을 개진한다.

“일정한 시대와 사회 안에서 실제로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는 어법이 타당한 어법이듯이 일정한 시대와 사회 안에서 실제로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는 도덕률이 타당한 도덕률(*ibid 368p.)”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상대주의적 도덕관에 입각한 도도한 웅변은 거의 대부분의 독자들로 하여금 도덕의 절대성에 대해 회의를 느끼도록 만들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에는 “실로 전문가들도 그 주장의 맹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터인” 중대한 오류가 내포되어 있음을 우리는 지나쳐 보면 안 된다. 


그것은 언어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다르면서도 그 시대와 사회에서 각각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 도덕의 상대성을 실증하고 있기는커녕 


오히려 그 자체가 실은 절대적인 도덕률이 있음을 확고히 입증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주장의 맹점

이 점을 똑똑히 밝히기 위해 우리는 [필자]의 결론인 "도덕의 절대적인 원리 {사물의 본질적 발현: 사물은 그 사물의 본질에 따라 대우하라}"에 따라서 언어를 고찰해 보자. 언어의 본질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 따르면 [언어]란 “음성 또는 문자를 수단으로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 또는 체계”이다. 


언어는 사전의 정의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음성 또는 문자를 수단으로 의사를 전달 · 교환 · 소통시킴을 본질”로 하는 〘행동 자체〙적 관계 사물의 하나이다. 의사를 교환·소통시키는 행위는 곧 2인 이상이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 행위임을 의미하며, 따라서 언어는 필연적으로 사회성을 띠고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 시대, 그 사회 ―아니 의사를 소통하려는 바로 두 당사자 사이에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곧 소통이 되지 않는 언어를 구사해 보라. 이는 분명히 언어의 본질을 도외시한 모순된 행동일 것이며⸺ 사물을 그 본질에 따라서 전화해야 한다⸺ 는 도덕의 절대적인 원리에 위반되는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그 본질이 서로의 의사소통에 두고 있는 사물이기 때문에 그 시대와 그 사회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극단적으로는 의사를 소통시키고자 하는 두 당사자⸺ 라는 상대적인 현실에 합당하게 쓰는 일이 옳은 행위요, 언어를 쓰는 데에 있어서 시대와 사회의 특수성〘상대성〙을 무시하고서는 언어의 사용 의도(본질)인 의사소통은 달성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 사용 시에 시대와 사회의 구속을 받는 것은 도덕의 상대성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사용자들이 오히려 도덕의 절대성에 합당하게 행위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셈이 된다.     


다시 말하거니와 언어는 그 사회와 그 시대에 통용되는 방식대로 사용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의사를 소통시키려는 상대방과 의사가 소통될 수 있는 방식으로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도덕률의 정신이다. 


따라서 우리가 농아와 대화를 하려면 수화를 사용하는 것이 옳을 것이며 젖먹이와는 “엄마” · “맘마” 등과 같은 젖먹이용 언어를 써야 한다. 만약에 상대방이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난해한 ―또는 우월하다고 믿어지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의 그러한 행동이 의사를 소통하려는 뜻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의 우월한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태도가 아닌가? 의심해 볼 일이다.  

   


언어의 본질과 현상의 혼동


언어의 상대성과 절대성을 혼동하게 만들어 도덕성에 관한 정당성까지도 의심하도록 만든 것은 “언어의 본질과 현상을 혼동한데 기인한다. 자기의 사용 권역 안에서는 타당성을 고집하면서도 시대와 사회에 따라서 달라야 할 언어의 상대적 측면은 언어의 본질적 측면이 아니라 언어의 형태적{현상적측면이다. 그래서 언어의 형태적 측면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서 서로 다름(곧 상대적임)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사용 목적 ⸺곧 소통⸺ 이라는 본질적 발현의 측면에서는 변함없는 절대적 타당성을 지니고 언어 활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 

    

사물의 존재 사실의 현상적 상대성과 사물의 행동성의 본질 발현이라는 본질적 절대성을 혼동함으로서 야기되는 이러한 오류 추리는 거의 모든 상대주의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오류의 기반이다.

     

●본고는 필자가 저술 중인 ❰도덕의 원리❱에서 끌어와 조금 고쳐쓴 글임. 

필자는 사실 김태길 교수의 저 책을 읽고 도덕적 정당성에 관해 깨달은 바 있어서, 이 글을 쓰면서 김 교수님에게 바끄럽게 생각하는 바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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