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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무경 Apr 04. 2024

도덕률[도덕의 근본 원리] [3] 균일율

도덕률[도덕의 준거 원리 ]  [3] 균일율(均一律)

도덕률[도덕의 준거 원리]


[3] 균일율(均一律) 

균일율 실마리

균일율의 구분

균일율은 근본 원리를 사물 본질의 외연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뽑아낸 형식적 원리이므로 사물의 외연이 같고 다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동일성을 기준으로 한 동일 원칙[동일율(同一律)]과 차별성을 기준으로 해서 각각의 사물에 따라 그 사물의 차이에 따라 적용하기를 지시하는 원칙이기에 필자가 [분당율(分當律)]이라고 부르기로 한 분당 원칙의 2가지 원칙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균일율은 [정의론(正義論)]이기도 하다.    

  

동일(同一원칙{동일율(同一律)}

동일 원칙

[내용] 본질의 외연이 같은 사물 각각에 적용해야 할 타당한 행동 원칙

[명제] “본질이 같은 사물들에 대한 대우는 그 내용이 같아야 한다.”

[증명낱낱으로는 독립되어 있되 본질이 같은 사물들에 대해 전개해야 할 타당한 행동은 어떠한 것이겠는가? 〘근본 원리〙는 사물의 본질에 타당하게 대우할 것을 지시하고 있으므로 사물이 예컨대 각각 ㈎·㈏·㈐·㈑………로 다르다 하더라도 그 외연이 동일한 [(ㅏ)]라면 그들에게 대우해야 할 행동은 (ㅏ)라는 공통점 위에서 영위해야 함에 틀림 없다. 따라서 이 원칙(동일 원칙, 또는 동일율)은 근본 원리의 의미에서 벗어남이 없으며 타당한 것임이 증명된다.     

[의의] 이 원칙을 위반하는 것을 필자는 [차별의 오류]라고 부른다. 뒤에서 좀 더 상세히 논하고자 하는바, 이 원칙은 본질이 같은 사물에 대해서 행동에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됨을 강조하는데 의의가 있다. 우리가 사실 판단에서 같은 사물에 관해 가지는 판단 작용을 행동에서도 똑같이 굳게 지니도록 하는 법칙이다.      


동일률과 [황금률]의 비교 

우리에게는 고래로부터 타당성을 인정하여 공리(公理)처럼 여기고 있는 실천적인 도덕률로 [황금률]이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예수의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이니라(마태복음 7: 7~12)"라는 말, 

공자의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 와 

랍비 힐렐(Hillel BC 110~AD 10)의 주장, 곧 힐렐에게 다가온 로마인이 “당신이 한 다리로 서 있는 동안 토라 전체를 암송할 수 있다면, 나는 유대교로 개종할 것이요”라는 말에 대해 “당신이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시오. 이것이 토라의 전부이며 나머지는 그저 주석일 뿐이니, 가서 이것을 공부하시오.” 등이 황금율의 하나이다. 


다만 예수의 말은 적극적인 표현의 명제이며 공자와 힐렐은 소극적인 표현의 명제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황금률을 동일률과 비교해 보자. 예수의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의 의미는 남을 대접할 때에는 자기가 바라는 것{자기 본질에 들어있는 요소}을 그대로 베풀라는 뜻이다. 곧 남의 본질은 곧 자기의 본질과 같으므로 남을 대접할 때에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돌아보고 자기가 바라는 대로 대우해 주는 것이 타당하다는 뜻이다. 


황금률의 소극적 명제인 공자의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 와 힐렐의 ”당신이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시오.”라는 명제에서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 또는 “당신이 하기 싫은 일”은 표현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똑같은 의미의 말이다. 


“남에게 베풀다.”와 남에게 시킨다.”는 말도 같은 의미의 말이다. 곧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와 “당신이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시오.”는 같은 말이다. 그 뜻은 행동 주체자인 자기의 본질적인 요소에 어긋나는 일은 남의 본질에도 어긋나므로 그런 행위 ⎯남의 본질에 어긋나는 일⎯ 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동일률과 똑같은 말이다. 바꿔 말해 황금률의 교훈은 동일률과 똑같다는 의미이다.    

  

분당 원칙{분당률(分當律)}

분당(分當원칙

[내용] 본질의 외연이 서로 다른 사물 낱낱에 적용할 타당한 행위의 원칙. 

[명제] “본질이 서로 다른 사물들에 대한 대우는 그 내용이 서로 달라야 한다.”

[증명] 동일 원칙에서 표명된 것과 같이, 외연이 같은 사물들에 대해 적용해야 할 행위는 같아야 한다. 그런데 사물들은 외연이 같다고 해도 내포는 각각 다를 수 있다. 만약에 내포가 다른 사물들에게 외연이 같다는 이유로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 것인가? 


앞에서도 초든 바와 같이 ㈎ㆍ㈏ㆍ㈐ㆍ㈑………등의 사물이 (ㅏ)ㆍ(ㅏ)ㆍ(ㅏ)ㆍ(ㅏ) 라는 본질적 공통점을 지녔더라도 또 한 편으로는 ㄱㆍㄴㆍㄷㆍㄹ………이라는 차이가 있으므로 이 서로 다름에 따라 대우에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것도 역시 근본 원리에 의해 지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본질이 서로 다른 만큼 대우도 달리해야 함이 증명된다.     


예컨대 교사와 학생의 외연은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렇다고 교사와 학생에게 다 같이 가르치기를 요구할 수 있는가? 이는 분명히 부당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이라는 외연은 같지만, 내포는 교사 또는 학생이라는 점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포가 다르면 그에 입각하여 대우가 달라야 한다는 것도 근본 원리에 의해 지시되고 있다. 


이에 내포의 차이에 따라 적용할 행위에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지시하는 원칙을 연역할 수 있는데 이를 [분당 원칙{분당율}이라고 부르는바, 위에 적어놓았듯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곧 “본질이 서로 다른 사물들에 대한 대우는 그 내용이 서로 달라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사물에 관한 대우는 다 달라야 한다. 모든 사물에 대한 대우는 그 사물에 대한 가장 적합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옳다.  

    

[의의] 서로 다른 본질의 사물이란 종류가 전혀 다른 사물들이라는 뜻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물은 공통점{유개념}과 다른 점{종개념}을 거의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다. 같은 사물들 사이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기 마련이며 전혀 달라 보이는 사물들 사이에도 공통점이 있음을 우리는 통찰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사물들이 의미상 일정한 체계 속에 배열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예컨대 모든 생물은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유개념 상의 동일성을 갖고 있지만, 일체가 전혀 똑같은 생명체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종개념 상의 다른 점을 지니고 있다. 근본 원리에 의해 이처럼 다른 점에 대해서도 고려하여야만 진정한 도덕률이 될 수 있는 것이며 분당율은 바로 한 사물이 지닌 본질에서의 유개념과 종개념을 분별하여 비록 유개념에 같은 점을 가졌더라도 종개념이 다르다면 종개념 상의 차이, 곧 종차(種差)에 합당한 만큼 대우에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분당률은 황금률에는 전혀 없는 내용의 원칙이다.  

    

분당률 칸트의 [정언명법]과 [자포자기자(自暴自棄者)]

칸트가 [전형(典型: typus)]이라는 이름으로 정성 들여 다듬어 설명한 다음과 같은 언명, 곧      

“만약 네가 하고자 하는 행위가 너 자신을 일부로 삼는 자연의 법칙을 따라 일어난다면 너는 그 행위가 네 의지를 따라 가능하다고 인정할 수가 있는가, 없는가를 스스로 물어보라*.”      

는 정언 명법의 말은 의지의 상대성과 절대성을 판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함과 아울러 이를 권고하고 있다고 보겠다. 

  

칸트의 정언명법에 입각한 전형에 따르면 “네가 하려는 행위가 자연적 보편법칙이 되었을 때 네가 그 자연법칙을 받아드릴 수 있느냐 아니냐를 생각해 보라. 곧 달리 서서 생각해 보아라.” 


*달리 서 보기⎯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다[역지사지]하다.


그런데 이때 행위자의 주관성이 낀다. 곧 행위자가 취하려는 행위를 보편법칙에 견줘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게 된다.      


그래서 처지가 아주 어려워 극단적인 상황에 빠진 자포자기자가 “이미 나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고 잃을 것도 없으니 사회가 무너져 내리거나 지구가 망하더라도 개의치 않으며 이러한 자기의 소원이 자연법칙이 되어도 유감이 없다.”고 하면서 파괴적인 행위를 서슴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언명법을 어기는 일이 되지 않을 것이며 그는 자기의 행동이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하더라도 이에 대해 가책을 느낄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본질 발현〙은 그런 주관성에 의존할 필요가 없이 그 타당성이 객관적으로 결정된다.  

곧 [분당 원칙]에 따르면 자포자기자의 파괴적 행위자의 잘못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가 자기의 행위를 자기의 본질에 따라 행했으므로〘행동 주체〙적으로 타당하며 잘못이 아니라고 항변한다고 하면 그 말을 반박할 수 없지만 그가 남들에게조차 자기의 본질에 따른 파괴적 행동으로 대해서는 않될 것이며 [분당 원칙]에 따라〘행동 객체〙인 피행자〙의 본질에 따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파괴적인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면 그 행위는 분당율에 어긋나는 일임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예컨대 자기가 생명에 애착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남들의 생명도 똑같이 애착을 갖지 않은 사람일 것으로 생각하고 경시해도 좋다는 것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아래쪽 균일율의 한계 참조.     


공정[(公正귀바름)]과 공평[(公平{귀펀펀}]

질적 균일율(質的 均一律){공정(公正)}

동일율이 지시하는 내용 중에는 사물의 본질 자체에 관한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다만 외견(外見; 現象) 상 똑같은 사물은 본질도 똑같을 것이라는 자연의 제일성(齊一性)과 이에 근거한 유비적 추리에 따라서 행동 내용[그 내용의 실질이 무엇이거나 간에]이 같아야 할 것임을 지적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의지적 존재로서의 생물은 ―지능이 매우 현저한 인간에게 있어서조차도― 주관적ㆍ상대적인 생존을 영위하고 있는 까닭에 그의 행동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경중과 다소의 차별을 두는 편파적인 본성에 지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동일율을 지키려면 그러한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컨대 “[나]에게 인간으로서‘내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려 하는 애착'의 본성 ⎯그것이 나의 본질의 일부이다⎯ 이 있다면 같은 사물인 다른 인간들에게도 그와 같이 ”그들의 생명을 아끼려는 애착의 마음이 있음”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나의 생명을 아낀다.”는 준칙을 법칙으로 삼고자 한다면 같은 본질을 지니고 있을 남에 대해서 “그의 생명도 아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원칙을 필연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의 본질에 의해서 취하려는 행위를, 본질이 똑같은 남에게도 똑같은 형태로 적용하려는 “따로 서 보기{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태도가 바로 공정의 정신이다.      


양적 균일률(量的 均一律){공평(公平)}

균일율은 대우의 질적 균일성인 공정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우(待遇)의  균일성의 정신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양적 균일률인데 이를 우리는 [공평]이라고 부르고 있다. 곧 대상에 대한 대우의 양도 또한 공평해야만 한다.     


근로에 대해 지불하는 임금의 본질이 만약에 근로에서 발생하는 생산성에 관한 반대급부라면 근로자가 누구이거나 간에 생산의 질과 양에 비례하여 같은 생산성을 올린 사람은 같은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 근로자가 어린이라든가 타국인 또는 여성ㆍ흑인ㆍ미운 사람 등 생산성과 무관한 징표에 의해서 차별된다면 이는 공평의 원리인 동일률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 된다.


공평 역시 동일성{양적 동일성}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균일률은 동일성과 함께 상이성도 고려하기 때문에 공평의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는 사물들의 서로 다른 점도 면밀히 참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의의 원리  보상의 형평 원리

ⓐ〘형평 원리(衡平 原理)

형평 원리란 “주는 값[또는 받는 값]에 해당하는 값으로 갚아야 한다.”는 〘당가 보상〙의 관념에 따르는 〘보상 정애〙로, 일정한 행위에 대해 같은 값에 해당하는 행위를 통해 상쇄시키려 하는 심리적 경향이며. 주로 경제적 이해관계에 관한 거래의 보상이다. 이로움이나 해로움을 준 상대를, 감정적으로, 곧〘열보(熱報〙로 갚는 것이 아니라〘냉보(冷報)〙곧 타산적인 방식으로 갚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인 보상의 가장 뚜렷한 것은 우리가 늘 활용하는 상거래(商去來)이다. 자기에게 10000원의 이득을 주는 상대에게는 10000 원어치의 대가를 지불하고 10000원 어치의 손실을 끼친 대상에게는 10000 원어치로 갚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10000 원 어치의 물품을 사려면, 주로 10000 원 화폐의 반대급부로 주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긴다. 당가 보상은 일정하게 받거나 주는 것에 대해 그와 같은 값으로 갚는 것을 본질적인 행태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 행위에 합당한 대가를 치려야 한다는 근원적인 심리가 작동한다.  

        

이러한 심적 원리를 필자는 보상의〘형평 원리(衡平原理)〙라고 부른다. 그러나 자신이 베푼 행위에 대한 가장 적절한 보상이 어느 정도의 질량이어야 하는 가에 관한 보편타당성은 무엇을 기준으로 형성되는가? 


당가 보상에는 감정적인 측면은 거의 반영되지 않고 냉정한 계산에 따라 피행자가 가행자에게 당한 만큼의 피해를 물질적 수량으로 계량하여 1대 1의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관념에 따라 어떤 사적인 [은수(恩讎)의 감정]이 끼어들지 않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보상되기에 보상의 내용으로는 거의 가 다 금품이나 물품, 특히 상품이나 노동이다. 이를 우리는 [교환] 또는 [거래(去來)]라고 한다.      


ⓑ〘당가 보상의 원칙

보상에서뿐만 아니라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한다."는 말처럼 일정한 상태에는 일정한 대우가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심리로 [당가(當價) 원칙]과 그 아래 당가의 질량을 결정하는〘형평 원리(衡平原理)〙가 그것이다. 우리 말의 [값]이 바로 이 현상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값]은 바로 갚는다는 말이었으며 한자의 대가[代價{물건을 산 대신 주는 돈}]도 바로 물건을 차지하는 대신 그 물건에 맞먹는 값어치⸺곧 물건의 당가⸺의 돈을 대신 [갚아] 준다는 원칙을 가리키고 있다. 빌린 돈을 되돌려 주는 것도 역시 [갚음]이다.      


평가층적 보상이라는 지적(知的) 보상의 가장 선명한 방식인 상거래(商去來)는 일정하게 받는 것에 대해 그와 비슷하거나 같은 값으로 주는 것을 본질적인 행태로 지니고 있기에 대단히 냉정한 태도의, 비교적 정확한 계산에 따른 합리적인 형평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으며 화폐는 가장 합리적인 교환 가치 평가의 도구이기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거래는 상품과 그 가치에 해당하는 화폐의 교환으로 이루어진다. 이를 경제적인 용어로 [교환(交換): 엇바꿈] 또는 [거래(去來): 오가기]라고 한다. 


그래서 필자는 보상의 평가층적 보상을 [교환보상(交換 報償)]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상거래의 심리까지가 포함된 모든 거래를 의미한다.         

  

형평 원리란 관계자들 사이의 세의 불균형[핸디캡]을 잡아 경쟁이나 분배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한 원리이며 이 원리를 실현시키기 위한 인위적인 조정이다.


많은 벼 농사를 효과적으로 짓기 위해서는 ⓐ물을 가두어 놓은 논에 벼를 줄 맞춰 심어야 한다. ⓑ물을 좋아하는 벼들이 골고루, 곧 공평하고 공정하게 자라도록 하려면, 논의 물이 모든 벼에 골고루 공급되도록 논바닥을 부드럽고 평평하게 골라주어야 한다. 이때 필요한 연장이 써레다. 써레질을 잘해야 논바닥을 부드럽고 평평하게 고를 수 있다. 


경쟁을 공정하게 할 수 있도록 하려면 [야생의 법칙]에 맡겨 자유 방임할 수는 없다. 경쟁에도 각각의 경기 방식에 맞게 써레질을 잘해 주어야 한다. 경쟁자들 사이의 세의 불균형[핸디캡]을 주어 경쟁을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한 인위적인 조정이다. 

    

야생의 법칙에 따르는 비이성적인 자연의 횡포를 고치려는 공정의 법칙은 약육강식적 위세에 제약[핸디캡]을 가해 경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써레질을 한다. 써레질을 통해 서로의 세(勢)의 균형을 맞춘다. 


그러나 생명체의 본성인 이기심으로 인해 써레질 자체가 불평등의 온상이 될 수도 있다. 공산주의적 정치 체제에서라도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이 없을 수 없고 이런 조직을 운영할 주도적 인재인 우두머리가 필요한데 과연 그 우두머리라고 해서 


♣첫째 이기심이 없는 사람을 가려내어 임용할 수 있느냐 아니냐? 

♣둘째 그런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뽑을 수 있느냐? 가 관건이다.      



     

균일율의 의의와 효용성 및 한계

의미와 효용성

일상생활에서의 도덕적 판단에 제공되는 균일율의 적용상 장점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탁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균일율은 사물의 본질 그 자체에 입각한 판단에서가 아니라 외연적 질만을 고려하는 형식적 원리이기 때문에 이러한 한계에 따르는 결함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잘못 적용할 수 있는 위험이 언제나 일어날 수 있음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칙적으로 균일율에 따라 도덕의 완벽한 실천을 기하기 위해서는 합목적률의 도움을 받아야만 된다.  

    

사물의 본질의 개념적 파악이 쉽지 않다는 점을 생각할 때 사물의 징표의 이동(異同)만으로 상당한 도덕적 행위를 영위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원리처럼 일반적이며 적용에 쉬운 원리는 없다.

      

이 점은 이 원리가 우리의 4종의 준거 원리 가운데 고래로부터 명제화 •  이론화되어 활용되어 온 거의 유일한 원리라는 사실을 유의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많은 현자(賢者)들이 이 점에서 일치하고 있어서 거의 모두가 공평과 공정의 도덕성을 인정한 바 있으니 이는 이 원칙들이 합목적률처럼 사물의 본질 내용 그 자체를 파악하는 인식 상의 난점에서 벗어나 다만 논리의 직관적 일관성을 견지하기만 하면 되는 편리함이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전형(典型 Typus역시 균일률의 기반 위에 놓여있다.

* 칸트는 도덕률의 인식을 위해서는 “탁월하게 투철한 날카로운 지력을 요하지도 않으며 별다른 학문이나 철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그리고 우리의] 통속적 인간 이성은 그 도덕적 원리를 특별히 보편적 형식에서 생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항상 실제로는 이 원리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그것을 그의 판정의 규준으로 사용하고 있다.”

고 지적했다. 


*《도덕 형이상학 원론》- 정진 역.을유문화사  발행 《도덕철학 원리》

  

설혹 의식적으로 도덕을 부정하거나 도덕의 논리화 및 객관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조금이라도 예지력 ⸺예지력이 주는 논리적 일관성이라는 사유 법칙에 입각하고 있는 한⸺ 이 있다면 본질적으로 똑같은 사물에 대해 차별 대우함이 부당하다는 느낌을 결코 떨쳐버리지 못할 것이다.


이는 균일율은 개념화를 통해 구분하기에 매우 어려운 감정의 미묘한 움직임까지도 반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탁월한 효용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논리가 포착하여 계량화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까지도 도덕적 행위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원리를 의식하고 적용하는 능력은 지적으로 명석한 사람보다는 예민한 감정의 소유자가 더 우수한 바가 있다. 예를 들어 생존 의욕이 더욱 풍부한 공감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생존 의욕에 비례하여 남의 생존 의욕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고난과 번뇌ㆍ비애와 갈등 등 인생의 시련에 자주 직면해 본 경험이 많은 사람이 그러하지 못한 사람보다 남의 그러한 처지를 더욱더 잘 이해할 수 있어서 그에 따라 남에 대한 행동의 도덕적 발현을 더욱 타당하게 볼 수 있다.

     

행동 주체가 자기의 의욕에 따라서 실천하려는 행동, 곧 실천 규칙(實踐 規則)은 균일율에 의하면 동시에 자기와 본질적으로 똑같은 모든 [개별적] 존재에게 대해서도 실천 규칙으로 의욕될 가능성이 있음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또한 행동 주체가 만약 자기의 준칙을 확정하고자 하면 모든 동질자(본질이 동일한 자)에게도 똑같은 준칙을 확정할 권리가 있음을 전제해야 하고 또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만약 확정된 준칙이 동시에 모든 동질자의 동일한 준칙과 서로 저촉[현실적으로는 충돌, 이론적으로는 모순]됨이 없는 실천 원칙이라면 그러한 원칙은 법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준칙이 동질자의 동일한 준칙과 서로 저촉되는 실천 원칙이라면 이는 법칙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균일율 위반의 오류

차별 대우(差別 待遇{편대(偏待))}의 오류

균일율이 지시하는 여러 원칙에 어긋나는 [균일율 위반의 오류]는 균일율의 원칙에 상응하여 두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다.


●동일 원칙에 관한 오류.

●획일 대우(劃一 待遇)의 오류: 분당 원칙에 대한 위배

동일 원칙의 위반이란 본질이 같은 사물을 똑같이 대우하지 않고 차별하므로서 야기되는 오류이다.      

【예】같은 학생이니까 • 같은 병자이니까 • 같은 범죄자이니까 • 다 똑같이 대우했으니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분당율의 위반일 수 있다.  

    

분당 원칙은 유개념적 동일성을 소유한 사물들이라도 종개념에 본질적 차이가 있다면 그에 상응한 정도의 차별 대우를 함이 타당함을 강조하는 도덕률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도덕적 이념을 도외시 내지 무시하고 유개념적 동일성에만 집착하여 종개념이 서로 다른 사물들을 똑같이 대우하는 데에서 야기되는 오류가 [획일 대우의 오류]이다.      


강이와 낭이는 다 같은 국민임에도 강이가 저명한 정치가의 자제라는 이유로 강이의 법률 위반은 눈감아 주면서 낭이의 동일한 행위에는 낭이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가차 없는 처벌이 가해진다면 이는 분명히 국민으로서의 두 사람의 동일성을 망각하거나 일부러 무시하는 차별 대우일 것이다. 


강이와 낭이가 똑같은 직장에서 똑같은 작업을 하여 똑같은 성과를 올리고 있는데도 강이가 ┄여자 • 노인 • 다른 나라 사람 • 미성년자 • 무학자라는 이유 등으로 봉급에서 낭이와 차등을 둘 때. 이러한 것이 잘못인 이유도 위의 예와 똑같은 바가 있다. 


오늘날 여성 차별화에 대한 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된 까닭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차별 대우가 잘못임을 명백히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것이 잘못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지금도 다른 분야에서 이와 비슷한 차별화의 잘못이 전혀 인식되지 않고 자행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동일 원칙을 위배하고 있는 편대의 오류에 대한 우리의 도덕 의식적 반응이다.  

 

획일 대우의 오류 

하루에 3시간씩 간단한 사무를 보는 단순 아르바이트생인 강이가 하루에 8시간씩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힘든 작업을 하는 낭이와 똑같은 보수를 요구하는 것은 분당율에 어긋나는 행위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 때로는 심리적 • 관습적 이유로 인해 그 같은 요구를 제기하는 일도 없지 않아 있지만, 이는 작업의 질적] 양적 차이를 무시하는 획일화의 오류에 빠지는 일이 될 것이다.      


생업을 구하기 어려운 것이 장애인들의 일반적인 형편이어서 다수의 나라에서 장애인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선대의 유산을 받아 정상인보다도 풍족하게 사는 장애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사람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생업에 대한 특별한 대우를 아끼지 않는다면 그가 장애인이라는 유개념만을 유의했을 뿐 부유한 자라는 종개념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처사라 아니 할 수 없다.  


남녀 성의 차별 대우는 명백한 균일율 위반이다     


편대의 오류 

힘쓰는 일이 아닌 모든 일에서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성과를 올릴 수 있는데 이를 성적인 차이에만 의거해서 대우를 달리하면 이는 동일율의 위반이 된다.      


동일률 오류: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의 판결

간음한 여인을 처벌하라던 사람들을 물리치는 예수의 일화를 모르는 성인들이 있을까? 그러나 다시 한번 적어 본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예수 앞에 세우고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있었다.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는 고개를 들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고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있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양심의 가책을 받아*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예수가 고개를 들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하고 말했다. 가버린 이들은 동일율의 의미를 알고 실천한 사람들이었음에 틀림 없다. 동일율 위반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반증이다.

-요한복음서 7장 53절~8장 11절(공동번역성서)


필자가 집필중인 ❰도덕의 원리❱에서 옮겨 적은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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