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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무경 Apr 04. 2024

[사랑]과 [좋아함]의 다른 점

애증(愛憎)과 호혐(好嫌)의 준별


애증(愛憎)과 호혐(好嫌)의 준별

사랑과 좋음은 같은 개념일까? 같은 개념인데 그 강도(强度)만 다른 개념일까?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에 관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필자가 그 차이점을 확실하게 밝혀 보려 한다. 


애증{愛憎: 사랑과 미움} 과 호혐(好嫌)

애증과 호혐의 본질과 현상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변의 사물들과의 접촉이 불가피하다. [관계]는 사물들과 접촉해 서로 맺어짐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관계는 대상이 삶에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대상에게 가까이 다가가거나 멀리 피하는 태도를 평가하고 결정하는 과정이다. 


대상과 관계를 맺으려는 마음에는 대상에 다가가고 싶은 긍정성으로서의 좋아함[호(好)]과 사랑함[애(愛)]이 있고 대상에서 멀리 피하고 싶게 하는 부정성으로서의, 싫어함[혐(嫌)]과 미워함[증(憎)], 곧 애증과 호혐이 있다.      


대상과의 관계는 심신{마음과 몸}의 역할인〘지 • 정  • 의〙에 의해 대상에 대한 마음의 기울임인 관심을 통해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정, 곧 감성이 대상과의 관계 형성에 가장 알맞은 기능으로 생각되지만, 다른 편에서 생각하면 의지가 가장 알맞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하고 의식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지 • 정  • 의〙의 어느 한 가지 기능만으로 한정할 수 없는, 곧  지 • 정  • 의 의 모두가 관계 형성에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심신의 기능이 대상과 관계를 맺을 경우를 나타내는 본성적인 개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좋음과 나쁨{호혐(好嫌)}”이며, 또 하나는 “사랑과 미움{애증(愛憎)}”이다. 호혐과 애증은 지 • 정  • 의 활동이  모두 작용하여 대상을 긍정적인 관계를 맺게 하는 가장 본성적인 개념이다. 

 

필자는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심신의 속성은 사랑과 미움이 아닌가 생각한다. 곧 호혐과 애증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심신의 본성이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사랑과 증오] 및 [좋음과 싫음]이라는 두 가지 개념에 대해여 혼란하게 표상하는 일이 너무나 흔하여 사랑의 개념을 명백히 이해하기 곤란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사랑과 증오를 단적으로 정의하기에 앞서 “사랑과 미움” 및 이와 혼동하기 쉬운 “좋음과 싫음”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먼저 살펴보면서 이 과정에서 “사랑과 미움” 및 “좋음과 싫음”의 정의를 찾아내려고 한다. 


좋음{좋아함 싫음{싫어함}과 좋음  나쁨

호혐의 두 가지 의미

좋음[호(好)]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필자는 좋음의 반대말로 “싫음[혐(嫌)]”과 “나쁨[오(惡)]”의 두 가지가 있음을 든다. 곧 좋음과 싫음[호혐(好嫌)] 및 좋음과 나쁨[호오(好惡)]이 있다고 주장한다.      


호혐에는 사물에 관해 느끼는 두 가지 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그 가운데 좋음과 싫음{호혐}은 사물을 순전히 자아의 주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평가로서 긍정적인 관계 개념인 “좋음, 또는 좋아함, 곧 [호(好)]”와 그에 반대되는 부정적인 개념인 “싫음[혐(嫌)], 또는 싫어함, 바꿔 말해 [혐오(嫌惡)]가 있고 다른 편으로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그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좋음, 또는 좋아함, 곧 [호(好)]“와 그에 반대되는 부정적인 개념인 나쁨, 곧 ”오(惡), 바꿔 말해 [호오(好惡)]“가 있다.

      

이때 우리 말에서는 긍정적인 경우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이거나 모두 [좋다(好)]라 부르고 부정적인 경우에는 주관적으로는 [싷다(嫌)]라 하고, 객관적으로는 [나쁘다{악: 惡)}]라고 표현한다. 곧 [좋음과 나쁨{호오: 好惡)}] 및 [좋음과 싫음(好嫌)]의 개념에서 그 부정 감정은 [나쁨]과 [싫음]이라는 이름으로 달리 불리고 있으나 그 긍정 감정은 모두 [좋음]으로 표기되기 때문에 이름만으로도 구분이 되는 다른 감정과는 달리 그 두 가지 의미를 구별해야 한다.     


좋음과 싫음[호혐[(好嫌)]

“좋음[좋아함 포함]”과 “싫음[싫어함 포함]”은 사물에 관한 주관적인 평가어이다. [싫음]도 [나쁨]처럼 객관적인 의미로 쓰이는 일이 없지 않지만 하나의 대상, 예컨대 관계가 좋지 않은 것 ―친구 ∙ 이웃 ∙ 동물 ∙ 상품 ┄ 등에 대해서 우리는 [나쁘다]라고 하지 않고 [싫다]라고 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필자는 “[좋음과 싫음: 호혐(好嫌)]과 [좋음과 나쁨: 호오(好惡)]”의 두 개념을 함께 부르기가 번거롭기에 이를 합쳐 [좋음들] 또는 [호혐계(好嫌系)]라 부르도록 하겠다. 또 같은 의미로 “[사랑과 미움: 애증(愛憎)]”도 또한 단순히 [사랑들]이나 [애증계(愛憎系)]라고도 부르겠다.     


좋음과 나쁨{호오[(好惡)}

“좋음[좋아함 포함]”과 “나쁨[나빠함 포함]”은 사물에 관한 객관적인 평가어이다. [나쁨]도 [싫음]처럼 주관적인 의미로 흔히 쓰이지만 하나의 상품, 예컨대 품질이 떨어지는 ―연필 ∙ 신발 ∙ 헨드폰 ∙ 자전거┄ 등에 대해서 우리는 [싫다]라고 하지 않고 [나쁘다]라고 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❸호혐과 애증의 뚜렷한 차이점

일상에서의 구별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랑과 증오] 및 [좋음과 싫음]이라는 두 가지 개념에 대해여 혼란하게 표상하는 일이 너무나 흔하여 사랑의 개념을 명백히 이해하기 곤란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호혐계(好嫌系)]”및 “애증계[愛憎系]”의 분석을 통해 이 두 가지 감정적 개념의 뜻을 파악하면서 그 차이점을 준별해 보려고 한다. 호혐계와 애증계는 공통점과 차이점에서 모두 질과 양의 차이가 있다.

      

호혐과 애증의 공통점.

질적 공통점

호혐과 애증은 심신의 모든 기능에 걸쳐 적용되어 삶에 영향을 지닌 대상들과의 접촉에 불가피한 본성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기능보다 대상들과의 관계 형성에 더 근원적인 심신의 활동이다. 먼저 호오계는 예를 들어 분노ㆍ경멸ㆍ질투ㆍ조소 등의 감정들에 비해서는 애증의 개념과 가장 비슷한 감정임을 느끼게 된다. 호혐과 애증은 대상에 관한 범위가 조금 다르다는 점 이외에는 아주 비슷한 개념이다.     

 

그래서 호혐이나 애증의 본성은 때로는 구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사랑 및 좋음이 서로 혼동되어 사용됨을 우리는 전혀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특히 아주 빈번하게 [좋음]을 [애(愛: 사랑)]로써 나타내고 있는바 그 이유의 하나가 바로 이 두 개념 내용상의 비슷함 때문이다.   

  

[양적 공통점]

호혐과 애증은 심신의 기능 전체와 연관되어 있다. 애증은 다른 개념들보다는 더 [감성적]인 개념이지만 [의식적] 개념이기도 한 동시에 [의지적] 개념이기도 하다― 곧 마음의 모든 기능에 관계된다―는 점에서 동질성이 있다. 호혐과 애증은 대상과 대상이나 사물 사이의 서로에 관한 친소 ┄심신에 의한 멀고 가까움, 곧 대상에 관한 친소, 곧 얼마나 가깝게 다가가느냐? 또는 꺼리느냐?⸺ 및 대상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와 같은 문제 위주로 된 관계를 규정하는 관계 개념이다.    

  

호혐과 애증의 차이점

호혐과 애증에는 이러한 공통점이 있는 반면에 분명한 차이점도 있다. 

 호혐은 사물 일반에 지향되는 감정이고 애증은 오로지 의지자에게만 지향되는 감정이다. 이것이 호혐과 애증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사랑하리(사랑하려는 이)〙에 관해서는 희로애락을 비롯한 긍효[肯效: 이해(利害) • 귀천 • 길흉 • 화복 등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 것]를 함께할 만하다. 곧 공감한다.    

  

싸랑하리와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 테도의 차이

 자원(소유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원을 나누어 주어도 아깝거나 섭섭하지 않다. 

 좋아하는 사물은 멀어지면 그것으로 서운할지언정 안절부절하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대상은 멀어지면 견디기 힘들다. 

 사랑하리를 위해서는 애써 일하는 것이 기쁘고 즐겁다.

 사랑하리를 위해서는 자기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 

 좋아하는 대상은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화할 수 있으나 사랑하는 대상은 수단화하지 않는다. 

 자기 위주가 아닌 사랑하리 위주로 행동할 수 있다.     


곧 사랑과 좋음의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첫째 사랑이 좋음보다 대상을 더 값있게, 의미 깊게 여길 때 지향된다는 점이다. 사랑의 대상에게는 때로 자기희생도 불사하는 정도로 힘을 들여 지키려 하는 등 심신을 기울여 보살피지만 좋은 대상에게는 그렇게까지 애쓰지는 않는다  

   

질적 차이점

의지(意志유무의 여부

첫째로 애증의 대상은 거듭 강조하여 말하지만 의지를 지닌 자{생명체}와 의지와 연관이 깊은 사물에 국한되어 있다. 곧 애증은 생명{유정자}에게만 지향되는 감정임에 견주어 호혐은 유정자이든 무정자(無情者: 무생물ㆍ물질ㆍ물리적 존재)이든 가리지 않고 모든 대상에 지향되는 개념으로 그 지향 범위가 테두리 없이 넓다는 점에서 애증과 다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데다가 이해하기 쉽지 않을 수 있으므로 아래에서 좀 더 상세히 논해 보겠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사랑[애(愛)]이 포함된 낱말 몇 가지를 예로 살펴보자. [애연(愛煙)] [애주(愛酒)] [애완(愛玩)] [애향(愛鄕)]…………


[애(愛)]의 뜻은 “사랑” 이외에도 “즐기다.” “아끼다.” 등으로 다양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의미가 “사랑하다.”임에는 틀림이 없다.      


먼저 [애연(愛煙)]이라는 말을 검토해 보자. 애연은 [담배를 사랑함], 또는 [담배를 즐김 ∙ 아낌]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담배를 좋아함]이란 말인가? [애주(愛酒)]란 술을 사랑한다는 말인가? 술을 좋아한다는 뜻인가? 


위에서 필자가 호혐계의 대상은 무한하고 애증의 대상은 의지적 존재[생명체]에 국한되어 있다고 했으므로 의지적 대상과 물리적 대상, 특히 [물건]에 [사랑계]와 [좋음계]를 적용해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어떤 대상에 지향된 감정이 호혐계인지 애증계인지 확정할 수 있는 근거는 대상의 본질이 의지자인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좋음]은 두 개념에 같이 사용되는 낱말이어서 혼동의 우려가 있으므로 낱말 자체부터가 다른 부정 감정인 [나쁨]과 [싫음]만을 고찰해 보겠다.


이 점은 이 낱말을 사용하는 우리 한국인에게는 명백한 심상을 주는 것 같지 않아서 애증이 오직 의지자에게만 사용된다는 점을 납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대상에 대한 애증은 감정의 주체인 자기의 심정에도 동시에 싫음이라는 감정을 촉발시키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글월을 보면 이런 의문의 부당함이 바로 이해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보통 좋음과 사랑을 긍정적으로만 쓸 때에는 “사랑은 강도가 좀 더 짙은 좋음이며 좋음은 강도가 좀 더 옅은 사랑”이라는 정도의 차이밖에 느끼지 못한 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개념들은 그 개념의 부정형 낱말을 사용해 나타내 보았을 때, 필자가 사랑의 개념이 의지적 존재에게만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명백해진다. 곧 [사랑] 대신에 [증오(미워함)]라는 말을 사용해 보는 것이다. 


[사랑]이 긍정적 개념임에 견주어 [증오]는 그 부정형 개념으로서 사랑의 감정과 [한 축의 양쪽 바퀴]처럼 똑같은 역할을 하는, 짝이 되는 부정적 갈말이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개념의 적용 대상에는 증오의 개념도 적용할 수가 있고 [좋음]의 대상에 대해서는 그 부정형인 [싫음]의 감정도 지향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호(好)와 애(愛)의 개념의 적용 대상을 구별하기가 모호한 경우에는 그 반대 낱말[부정적인 낱말]을 사용했을 때 의미가 순조롭게 전달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애연가(愛煙家: 담배를 사랑하는 사람)]라는 낱말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이 담배와 결합될 수 있는가의 여부 ┈바꿔 말하면 애증(愛憎)의 개념이 무의지적 존재와 결합할 수 있는가의 여부┈ 를 알고자 하는데도 긍정적 명사인 “사랑하다.”를 사용해서는 파악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부정적 명사인 “미워하다.”로 바꿔 넣어 살펴보라는 말이다. 곧 사랑 대신에 증오를 담배와 결합시켜 본다. “담배를 [증오]함”과 같이. 


이 글월은 분명히 어색함을 느끼게 한다. “담배를 싫어[嫌煙]함”이라는 말은 가능하게 생각되지만 “담배를 증오(미워함)”함이라는 말은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술을 사랑함(愛酒)”이라는 표현의 타당성 여부를 판별하기 어려우면 역시 사랑 대신에 증오를 사용, “술을 증오함”이라는 글월을 작성해서 고찰해 본다. 이 글월 역시 어색함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애주(愛酒)의 반대 개념으로 “증주(憎酒: 술을 미워함)”라고 표현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든다. 왜 이렇게 어색한 느낌이 들까? 


그 이유가 바로 “사랑이나 증오”의 개념적 대상이 “의지적 존재”에 국한되는 것임에도 이를 무의지적 존재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대상이 무의지적 존재여서 자기에게 일부러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않을 때에는 애증의〘정애〙는 지향되지 않는다. 의지적 사물들 ⸺사람 ∙ 뱀 ∙ 강아지 ∙ 연인 ∙ 폭력배⸺ 과 물질적 사물 ⸺연필 ∙ 담배 ∙ 사진기 ∙ 펜타닐 ∙ 우레⸺ 들에 대해 아래의 표에 나타냈듯이 애증과 호혐을 적용해 보면 그 차이가 뚜렷하다는 점을 느낄 것이다.     

                             

 대상인 사물들에 좋음과 사랑함을 적용했을 때의 타당성 결과표

*위의 표에서 사랑하다 대신 즐기다 • 아끼다로 바꿔 생각해 보자.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양적 차이점

강도의 차이: 둘째로 느껴지는 것은 호혐과 애증에는 강도가 다르다는 느낌이 있다는 점이다. 언뜻 생각할 때 애증은 대상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 모두 호혐보다는 관계가 짙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호혐은 옅은 애증”이고 “애증은 짙은 호혐”이라고 느껴질 정도이다.

     

말이란 엄격히 정의된 개념에 따라서 사용되는 것만은 아니기에 우리가 여기서 애연가나 애주가라는 표현의 사용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랑하다”가 “좋아하다.”를 좀 더 짙게 나타내는 뜻으로 쓸 수도 있다는 점을 무시하거나 비난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사랑이 좋음과 달리 의지적 존재에게만 지향된다는 필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애연가ㆍ애완물 등의 낱말이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이들 대상은 의지적 대상이 아닌 데도 [애(愛)] 자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독자 중에는 어색하기는 하지만 [담배를 미워함]ㆍ[술을 미워함] 등의 표현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시다가 폐암에 걸리신 우리 아버지는 담배를 원수로 여기고 미워하셨다.”라고 하듯이. 이러한 사례는 앞에서도 열거해 보았던 바와 같이 한둘이 아니다. 애연가(愛煙家)ㆍ애주가ㆍ애장품(愛藏品)ㆍ애완물ㆍ지혜 사랑{애지(愛智 philosophia}ㆍ애용(愛用) ………등등.


따라서 사랑이라는 낱말이 이들 무의지적 사물에 대해서도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해서 필자의 주장을 반박할 수도 있으리라. 우리가 [애증]이라는 낱말만을 주목한다면 이 낱말도 [좋음]처럼 모든 대상에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의미상 다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를 신중히 검토해 보면 사실 이러한 표현 ┈곧 호혐(好嫌) 이외의 애증 개념을 무의지적 존재에 결부하는┈ 은 자주 사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 초든 바와 같이 특별한 경우에 현실적으로 사용되는 예를 자주 발견하게 됨을 부인할 수 없다. 예컨대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 가운데 술을 미워하는 사람도 있고 담배를 증오하는 사람도 있다고. 


그런데 더 치밀하게 살펴보면 그 사람들이 그 대상들을 무의지적인 존재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들은 그 사물들이 ┈실제로는 무의지적인 사물임에 틀림이 없지만┈ 하나의 의지적 존재로써 자신에게 일부러 악영향을 미친 것으로 믿는 경우가 그러하다. 


비록 무의지적 존재일망정 그것이 해당자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칠 때 해당자의 감정이 그 대상을 의지자로 의인화해 그렇게 지향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 때문에 패가망신한 사람은 술을 증오하고 담배 때문에 건강을 해쳐서 죽음에 이른 사람은 담배를 원수처럼 미워할 때가 있다. 


술이나 담배 이외에도 ―악령ㆍ천사ㆍ귀신ㆍ삼신할머니ㆍ천신ㆍ요정ㆍ하느님………등 이른바 영적(靈的: 가상적인 관념) 존재로 표상되는 대상들은 물론이고 담배ㆍ해ㆍ홍수ㆍ바다ㆍ세월ㆍ산ㆍ바위ㆍ태풍ㆍ화산………등의 무생물[자연물]들도 의지를 구사하는 존재로 표상하는 사람에게는 애증이 지향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무의지적 사물에 대해서는 결코 애증을 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대상에게 의지적 존재의 표상을 갖지 않는다면 정애가 지향되지 않음이 명백한 까닭에 [사랑]이라는 개념의 적용 범위는 의지적 존재 ┈또는 적어도 의지적 존재로 표상되는 존재┈ 에 한정시켜야 하는 것이다.   

   

[적용의 대상본질과 현상[또 하나의 차이점]

호혐계와 애증계의 또 다른 차이점은 호혐계가 현상적 ∙ 경험적 ∙ 과학적 개념과 밀접하게 이어지고 애증계는 본질적 ∙ 예지적 ∙ 철학적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점이다. 이 점에서 사랑은 사물의 현상보다 본질적인 측면에 관계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달리 나타내면 애증은 정신적인 대상 ⸺ 윤리적 대상과 성리적 및 종교적 대상⸺ 에 지향되는 철학적 개념이고 호혐은 주로 경험적 물리적 대상에 지향된다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문제는 애(愛)라는 글자가 사랑을 나타내는 글자라는 점에만 주목해, 그 의미를 잘못 해석함으로써 사랑이라는 말이 어떠한 대상에게라도 지향되는 개념인 것으로 오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만 유정자에는 관념도 포함시킬 수 있으며 대상에 대한 좋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랑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두려고 한다. 어쨌든 호혐의 감정은 대상에의 지향적 반응이어서 정애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글은 필자가 집필중인  ❰사랑 그 참뜻과 모습❱ 에서 옮겨온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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