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해지기 위해 자기를 드러내 보이는 심리적 과정
사람이 자기의 존재를 남에게 드러내보이기 위해서 벌이는데는 순서가 있다. 그 과정을 따라가 보자.
➀수용의 뜻과 필요성
자기 제시는 일정한 과정을 밟으며 나아가는데. 제시 본성에는 이 과정 가운데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 앞에서 이미 초들었다시피 드러내 보임은 먼저 이를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므로 들어내 보여줄 대상이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곧 드러냄에는 이를 받아드림{〘수용(受容)〙}이라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이 점이 제시의 필수적인 첫째 과정이다. 이는 자기 제시가 사회적인 활동이라는 점 때문이다.
자기 제시 개념에서 수용이란 제시자의 제시 내용을 남들이 그들의 머리[의식] 안에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제시 행동이 잠을 자는 것이나 명상처럼 단독적인 행위라면 수용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드러내 보인다]는 타동사적인 용어가 가리키듯이 이 개념에는 그 의미 안에 이미 드러내 보임을 받아들이는 목적적 존재, 곧 제시를 받아들이는 수용자가 전제되어 있다.
자기를 드러내 보이려면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인 남의 수용 행위를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받아주는 자[수용자]가 없는데 제시한다는 것은 속 빈 강정에 지나지 않는 무의미한 짓이기 때문이다. 수용은 드러내 보임을 받아들이는 수용자가 제시자의 제시 내용을 그의 골속{뇌리}에 아로새겨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다.
수용자는 통화에서 전화를 받는 사람이나 저작물의 독자 • 연예의 관객 • 방송의 시청자 • sns의 팔로워 같은 사람들이다. 수용시키려는 대상에 제한은 없다. 본래적으로 제시자는 자기의 드러냄을 누구든지 수용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수용해 주기를 바라는 좀 더 중요한 대상의 켜[층(層)]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가까운 주변인: 친족과 벗. 인식의 테를 점점 넓히면서 그 안에 들어올 동류, 나아가 모든 이들.
●자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 특히 이전에 자기를 열등하게 수용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에게만큼은 그때보다 용질이 향상된 우월한 자신의모습을 그들이 죽기 전에 꼭 보여주어 자기에 관한 인식이 바뀌기를 바란다.
●자기와 같은 분야의 권위자들이나 유명인들.
●그 밖의 모든 현세인과 후세인들.
수용의 필요성은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태양에게 던지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절규(?)”에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위대한 천체여! 만일 그대에게 그대가 비추고 있는 것을 갖지 못하였다면 그대의 행복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보라! 나는 너무나도 지나치게 꿀을 모아놓은 꿀벌처럼 나의 지혜에 지쳐버렸노라. 나는 그것을 얻으려고 내미는 손이 필요하도다.*”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최인제(崔仁濟) 역. [휘문출판사] 1962. 15쪽.
“그대의 박식도 남들이 몰라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쇼펜하우어: 《인생론》
그러므로 문제는 제시보다도 오히려 이를 수용시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으며 자기를 우월하게 수용시키는데 성공해야만 제시 본성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다.
남에게 자기의 제시를 수용시키려면 일단 남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 일상에서〘방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특별한 노력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기를 드러내고 세인의 관심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특별한 행동을 일부러 하는 일도 적지 않다.
부정적 평가를 꺼려 피하려는 제시 본성상 대개 부정적 행동보다는 [긍정적인 행동]을 하려하는 것이 인간이다. 곧 적은 일에서라도 업적을 쌓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이 뜻 같지 않으면 [부정적인 행동]을 마다하지 않는 일도 적지 않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남의 관심을 끌려고 꾀병을 부린다든지 기행[奇行]을 일삼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가 있다.
꽃의 전설이라는 낭만적인 사연들은 소녀들이 좋아할 이야기이겠지만 그 가운데의 하나인 ◉[물망초(勿忘草)의 전설]에는 인간의 심성이, 눈치채기 어려운 은유적인 모습으로 숨겨져 있다.
강 언덕에 앉아 연인인 펠타와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던 루돌프는 그녀에게 영원한 사랑을 표시해 주려고 강둑 벼랑 위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파란 꽃을 꺾어주려 한다. 그러나 그 꼭대기를 기어오르다가 그만 잘못하여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져 버린다.
그를 집어삼킬 듯한 낭떨어지 아래의 시퍼런 강물로 떨어지면서 루돌프의 간절한 소망이 한 마디의 외침으로 펠타의 귀를 울린다.
“펠타! 나를 잊지 말아 줘(forget me not)!”
루돌프의 외침은 그 한 사람의 소망일 뿐만이 아니라, 온 연인들의, 아니 모든 제시자들의 절절한 심정이기도 하다.
곧 상대방이 그의 의식 속에 자기를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가가 모든 제시자, 특히 연인들의 최대의 관심사이다. 소중하게 기억한다는 것은 우월하게 평가하여 수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념〙에 있어서나 시간에 있어서 더욱 강하고 길게 수용하는 것이며 제시자의 드러내 보임이 효과적으로 달성됨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제 막 서로를 알게 된 새 연인들뿐만 아니라 수년을 함께 살아 온 부부들이라도 상대방이 자기를 계속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 바꿔 말해 자기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그래서 자기의 제시가 전보다 조금도 변함 없거나 또는 전보다 더욱 강하게 수용하고 있음을 알지 않고는 안심하지 못한다.
이것은 또한 부부나 연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염원이다. 제시의 개념이 수용의 개념을 전제하고 있는 사실은 흡사 커뮤니케이션에서 발신이 수신을 전제하고 있는 것과 같다. 아니 커뮤니케이션의 발신과 수신은 사실은 제시와 수용의 한 하위 개념인 교류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자는 단순히 정보를 수집해서 발신하는 자가 아니라 그 자신이 정보인 동시에 발신자이다. 그리고 수용자는 단지 객관적 정보를 냉정히 수신하는 방관적ㆍ피상적인 관찰자의 의미를 뛰어넘어 현실의 마당에서 서로 긴밀하게 교류하는 수용자이면서 제시자로 서로 사귀는 사람으로서 통합적 일체가 되고 있다.
대부분의 인성론(人性論)은 사회생활에서의 성원 서로 사이의 교류를, 이론상 내적ㆍ심리적 의도에서의 필연성에 입각해서 해명하지 못하고 외적ㆍ생리적 의도에서의 우연성에 입각해서 설명하고 있다고 해서 지나친 말이 아니다. 수용자의 존재를 필연적인 전제 조건으로 해서만이 성립할 수 있는 제시 본성 이론에 의하면 사회 성원들 서로 간의 교류는 우연히 모여 사는 개별자들의 맹목적 집합체가 아니라 제시 본성상 서로서로 교류가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제시자와 수용자의 유기적 결합체임을 강력하게 증시(證示)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사회성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다량 전달 체계에서의 발신자와 수신자에 해당하는 제시자와 수용자의 교류이다. 이처럼 제시 본성은 개체로서의 인간 삶의 분명한 원리일 뿐만 아니라 개체와 개체 서로의 사귐에서 제시와 수용이라는 나누어 놓을 수 없는 개념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회 심리학적 원리이기도 하다.
①평가의 뜻
수용된 제시 내용에 대해 수용자는 그것의 우열, 그 의미를 헤아려 값을 매기게 되는데 이것이 제시에서의 평가이다. 평가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제시자로서는 그것이 그의 제시 의도에 맞는 긍정적일 것을 바라지만, 수용자는 제시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입장에서 평가하게 되는데 긍정적인 평가가 되는 내용은 우월하거나 바람직한 것들이고 열등하게 평가되는 내용은 열등하거나 무가치, 또는 무의미한 것들이다.
*궁극적인 가치 기준의 더 상세한 설명은 제6부 Ⅱ장. 객관적 우월의 각 절을 참조할 것
※자기 제시의 평가는 일반적으로 1차로 절충법의 2치법 ①[등차 매김]에 따름.
T. 캠벌은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뒤에 두고 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다.”
반응 실마리
➀무생물과 생명체의 차이
신라 시대의 금관이나 고대 이집트의 투탕카멘 상(像)의 전시실마다 관람객들은 그 찬란한 문화유산의 훌륭함에 찬탄을 금치 못한다. 이에 대해 그 유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물론 어떠한 정밀 계측기를 사용하더라도 유물들의 반응을 포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금관 장인(匠人)이나 소년 파라오 자신이 살아서 관람자들의 경탄을 의식한다면 그 유물들처럼 반응하지 않고 멀건 눈으로 우두커니 서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금관 장인(匠人)이나 소년 파라오 자신은 살아 숨 쉬는 생명체, 특히 의식이 명료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제시 본성이 삶의 원리인 생명체로서의 인간은 반드시 그의 제시에 관한 수용의 결과에 대응하는 특정한 내적 반응을 지니게 된다. 그들이 보이는 반응은 슬픔일까? 괴로움일까? 감격일까? 그들의 반응이 무엇이거나 간에 그들은 어째서 그러한 양상의 반응을 보이게 될 것인가?
제시된 [자기]가 수용자에게 상대적으로 우월하게 받아들여졌을 때 제시자는 기쁨을 느끼게 되고 열등하게 수용되었을 때 슬픔이 촉발된다. 기쁨은 제시의 달성이 긍정적일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내적 반응이며 슬픔은 부정적인 결과에 따라 나타나는 대표적인 내적 반응이다.
감정 실마리
①〘정념〙
제시와 수용에 따라서 촉발되는 이러한 반응은 수용자의 감정으로 표현된다. 반응이란 바꿔 말하면 수용자의 감정이다. 필자는 이 감정을〘정념(情念 emotion〙감정의 한 종류임{정서}]이라고 부른다. 원칙적으로 수용자의 반응은 제시 내용이 긍정적일 때 긍정적인 반응으로 나타나고 제시 내용이 부정적일 때 부정적인 반응으로 나타날 것이다. 긍정적인 감정으로는 감탄이나 상찬이 대표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으로는 비난이나 모욕이 대표적일 것이다.
②반응으로서의 감정의 가치
“자기가 남의 호감을 사고 있다는 확신만큼 삶에 대한 활기를 북돋아 주는 것은 없다.”
◉[파우스트]는 대제국의 재상으로서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혁혁한 공훈을 세운다. 그는 이제 그의 소망을 달성했기 때문에 크게 만족하여 노래한다.*
이 세상에서 내가 남긴 발자국은
억만년이 지나가도 사라지지 않으리.
이러한 커다란 행복을 예감하면서
나는 최고의 찰나를 누린다.
*괴테: 《파우스트》 2부 5막.
파우스트의 희열은 최고조에 달해 시간의 흐름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 희열이, 시간을 따라 흘러가 버릴 [순간]에 지나지 못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그는 외쳤다.
“시간이여. 멈춰라!”
그런데 이 말은, 노학자였던 그에게 젊음을 되살려주고 그가 염원하는 바를 성사시켜주는 대가로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에게 그의 영혼을 넘겨주기로 합의하면서, 넘겨주는 순간에 그 의사를 나타내는 표시로 정한 무시무시한 신호였다.
그런데도 거의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드러내 보일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업적을 상기하는 그 순간, 그는 참을 수 없는 환희에 휩싸여 그 위험한 말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③생명체의 감정인 쾌락
모든 제시자는 그의 존재, 또는 업적이 오랫동안 세상에 남겨져 수용자에게 기억되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이를 예상하거나 확인할 때, 그에 대한 긍정적 반응으로서의 쾌락 감이 촉발되는 것이다. 반응은 제시자에게만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에게서도 촉발된다.
다른 이유 ―예컨대 제시의 우수한 내용― 를 다 젖혀놓는다고 하더라도 서로 간에 내용이 비교되지 않을 수 없는 제시자의 제시에 대해 비교된 우열의 반응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개체는 종(種)이 그에게 부여한 목적으로서의 자기 제시보다는 이 본성의 긍정적 달성 결과로 주어지는 종속적 현상으로서의 반응인 긍정적 정념, 곧 쾌락의 추구에 집착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염불에는 뜻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는 우리의 속담은 이와 같은 심성을 적절하게 비유하고 있다. 부처의 상호 공덕을 억념(憶念)ㆍ사유하여 해탈함이 목적인 불제자들이 이 본래의 목적을 도외시하고 공양물인 잿밥만을 탐하는 것이 본말전도이듯이, 종(種)의 목적보다는 그 결과에만 집착하는 것은 종의 입장에서 볼 때 분명 본말전도다.
이처럼 쾌락은 원래 제시 본성의 달성에 따르는 결과로서의 반응이지만 개체는 목적과 결과 사이에 있는 [체제화(體制化)]된 연결 기제(機制)를 본능적으로 간파ㆍ활용하여 종의 요구인 제시의 달성이라는 힘든 과정을 생략하고 개체적 반응인 직접적 결과로서의 쾌락만을 추구하려고 하는 일이 흔하다.
[쾌락]은 제시에 관한 정적(情的) 반응에서의 긍정적 측면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방향인 부정적 측면에는 물론 [불쾌]가 있다. 개체는 대체로 이처럼 우월 제시 그 자체보다는 그 결과로서의 정적 반응, 곧 쾌의 감정[긍정적 반응]만을 얻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