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적 방식의 매체와 개념적 방식의 매체
➀교호의 신호
교류 쌍방 간을 일치시켜 의사를 소통케 하는 데에는 교류의 방법인 신호 체계가 필요하게 되는데 교류의 실질적 내용보다도 신호 체계에 따라서 교류의 성격이 더 크게 좌우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인식의 두 요소, 즉 직관과 개념 및 이를 형성시키는 정신의 두 기관인 감성과 오성의 활동은 교호를 위한 과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흔히 지적되어 오고 있는 대로 인간의 세계 인식은 현상의 인식인 직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이성적 원인(즉 이유)인 사물의 의미 파악에까지 미치고 있다. 제시와 수용의 교호에서도 상대방의 직관적 대상인 현상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개념적 대상인 본질적 의지(의도)도 파악한다.
인간의 인식 기능에 따라서 당연히 신호 체계도 [직관]과 [개념]의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제시와 수용; 바꿔 말하면 발신자와 수신자 간의 교호를 위해 사용되는 모든 매체와 매재(媒材)도 우리의 수용의 형식에 따라서 직관적 호소에 더욱 유효한 〘직관적 매체〙와 개념의 전달에 더욱 유리한 〘개념적 매체〙로 구분할 수가 있다.
♣새로운 매체 형식 등장
문자는 새로운 매체 형식의 등장이다. 사진술도 새로운 매체 형식이다. 문자는 개념성 매체이고 사진술은 직관성 매체이다.
♣매체의 새로운 활용 방식
인쇄문화의 발전은 매체의 새로운 활용 방식의 출현이다. 현대의 디지털은 이미 형성되어 있던 개념적 매체와 직관적 매체의 활용 방식이다.
[직관적 신호 체계] 직관은 상대방의 감각적 용재를 수용자가 감관에 의해 받아드려 지각하는 신호 포착의 방법이다. 직관적 신호 체계는 내용의 현상적 측면을 수용자의 감관에 직접 수용시키는 방식이다. 직관적 방식은 모든 생명체가 태어나면서 선천적ㆍ본능적으로 부여받은 것이어서 감각 기관이나 전달 매개에 이상이 없는 한 신호 포착에 거의 어려움이 없다.
[개념적 신호 체계] 개념적 매체가 사용하는 신호는 제시자의 용재를 의미로써 전달, 그 용재에 내포된 의미를 논리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포착된 내용을 전달시키는 개념적 방식으로 이 방식은 신호 포착의 많은 부분을 언어에 기댄다.
물론 발신자의 신호를 포착할 때 수용자가 이처럼 신호 방식을 구분하고 두 방식의 어느 일방만을 선택하여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수용자는 직관적 방식과 개념적 방식을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섞어 구사함으로써 발신자의 정확한 용질과 의도를 파악하고자 한다.
수용자는 자신의 수용 의도와 교호의 조건에 일치하는 한 제시자의 용재를 굳이 꺼려 피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오히려 열렬히 환영하고자 하는 일도 얼마든지 있다.
인간은 직관적 신호 포착을 위해서나 개념적 신호 포착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또한 신호 포착을 위한 많은 보조 수단을 사용한다. 안경ㆍ보청기ㆍ망원경ㆍ현미경 등등은 직관적 신호 포착을 위한 감관의 기능 저하를 교정하거나 기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보조 수단이다. 서책이나 인쇄술ㆍ전신 전화 등은 개념적 신호 포착과 전달의 효과적인 수단들이라고 할 수 있다.
수용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과 만날 것이고 TV나 핸드폰의 스위치를 켤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드러나 있는 직관적 현상이나 관념적 개념들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그 내용은 수용자의 감관을 자극하여 지각을 형성할 것이다. 모든 자극은 분명히 감관을 통해 수용된다. 그러나 감관에 의해 수용되는 내용들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형식으로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수용자는 제시자의 제시 용재를 어떠한 경로와 방법을 통해 인식하는가? 여기서 필자는 인식에 관한 정치(精緻)한 이론을 개진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는다.
다만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서는 앞에서 초들었던 바와 같이 대상의 용재를 감각적으로 포착하여 받아드리는 [직관적(直觀的) 방식]과 포착된 대상의 내용을 의미화하여 받아드리는 [개념적(槪念的) 방식]의 두 가지 신호 포착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용 방식의 이해는 우리의 주제를 파악하는 데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제시자와 수용자의 전달 과정에 매개물이 없을 때, 즉 직접 교호의 경우에는 수용자는 제시자의 매개소에 의해서 제시를 직접적으로 파악하고 평가하며 이를 바탕으로 한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 보인다. 그런데 교호의 장이 크게 넓혀져 있는 곳(사회)에서의 제시는 직접적인 경우보다는 간접적인 경우가 더 많다.
그 이유는 제시의 직접적인 매재인 신체는 매우 한정적인 사물이어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시의 장이 광역화된 사회에서의 제시 방법으로는 신체에 의한 직접 제시보다는 개념에 의한 간접 제시가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교호에서의 3가지 조건 가운데에서도 내용에 해당하는 관심의 일치가 중요하다는 점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교호가 만약 [거래]라면 내용은 [상품(商品)]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상품의 거래에 방법이 중요한 것처럼 교호에도 그 방법에 있어서 선천적으로 예리하게 구사할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 직관적 방식에, 경험의 축적과 함께 정치해지는 개념적 방식의 조화를 이룰 때 수용 능력은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한다. 고도의 통찰력은 오랜 경륜과 사물의 본질적 의지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날카로운 〘파지력(把持力: 대상의 표상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의 결합이다.
그래서 오랜 사냥꾼은 맹수들의 거동에서 그 의지를 읽으며 노련한 상인은 고객의 태도에서 그의 주머니 사정을 알아내고 유능한 도박사는 상대방의 미세한 표정에서 그의 패를 읽어낼 수 있는 바이다.
꽃의 개념은 특정한 꽃에 대한 모든 우유적 속성에 속하는 현상을 사상(捨象)하고 남는 것으로서 꽃의 본질을 가리킨다. 의미의 인식은 현상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현상의 인과 계열에 관한 해석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며 따라서 감관에 직접 인식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개념은 그 내용상 사물의 의미라는 점뿐만 아니라 간접적 인식이라는 점에서도 직관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에 비해 직관은 감관에 직접 촉발하는 사물의 현상에 관한 인식이므로 본능에 의한 수용이 쉽고 자연스럽다. 직관은 상대방의 감각적 용재의 자극을 수용자가 그의 감관에 의해 받아드려 지각하는 신호 포착의 방법이다. 개념은 상대방의 용재에 내포된 의미를 논리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내용을 포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주로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신호의 인식 방식에 관한 이해는 교호의 파악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들은 거의 모두가 대상 수용의 방식을, 인식의 특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상 인식의 기관인 감관에 따라서 분류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들은 예컨대 미디어를 [시각적 미디어]ㆍ[청각적 미디어], 또는 [시청각적 미디어] 등으로 나누어 왔다.
신문ㆍ잡지ㆍ무성 영화는 시각적 미디어이고 라디오ㆍ레코드는 청각적 미디어이며 발성 영화ㆍTV는 시청각적 미디어라는 식으로. TV와 잡지ㆍ서적ㆍ신문 등이 시각적 대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때문에 그들이 주는 효과가 직관적이라고 믿는다면 이것은 큰 잘못이다.
서적은 분명 시각에 의해 수용되는 매체이지만 그것이 주는 정보는 결코 직관적인 것이 아니라 개념적이다. 우리는 다만 개념 자체에 감각적 현상이 없기 때문에 이를 해득 가능한 시각적 또는 청각적 신호인 언어로써 표현하고 있는 것일 뿐이며 직관이 주는 것과 같은 사물의 현상을 수용하기 위해 감각적 신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호의 차이는 이처럼 단순히 수용기인 감관에 의해서 달라지는 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대상이 수용자에게 주는 본질적인 효과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시각적 매체] ∙ [청각적 매체] ∙ [시청각적 매체]라는 갈말 대신〘직관적 매체〙∙〘개념적 매체〙라는 갈말을 쓴다.
위에서도 이미 초든 바 있는 것처럼 직관적 방식은 모든 생명체가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적ㆍ본능적으로 부여받은 것이어서 감각 기관에 결함이 없다면 신호 포착에 거의 어려움이 없다. 개념적 수용 방식은 신호 포착의 많은 부분을 언어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의 신체에 대해서 생의 기반으로서의 신체와 제시의 용재로서의 신체라는 2중의 의미를 분별해 낸 일이 있는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의미를 분별해 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신체가 제시자와 수용자를 연결하는 교호의 조건의 하나인 [방식의 일치 ┈또 이해와 해석의 일치](421쪽)에 의한 직관적 방법의 중요한 한 종류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체뿐만이 아니라 직관적 수용 방식의 모든 대상, 곧 물적(物的)인 교호에 해당되는 원칙이며 신체는 이러한 물적 대상의 하나이기 때문에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누누이 지적한 바와 같이 신체는 제시의 강력한 방법인 직관적 대상이요, 직접적인 교호의 수단이기는 하나 한 개체의 신체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은 전 우주에 비하면 한 올의 터럭에도 미치지 못하는 매우 제한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모든 생물이 시공의 이 제약을 극복하여 제시를 확장시키기에는 극히 불리하다는 단점이 있다.
자연에서의 생명의 확장 의지는 이와 같은 생물의 유한성을 뛰어넘으려 안간힘을 쓰며 신체의 제약을 벗어나서 자기를 공간상으로나 시간상으로 영원히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바 이러한 의지의 현실적 표현이 바로 출산이며 출산을 위한 활동의 감정이 바로 연정(戀情)이다.
이에 관해 언급한 플라톤의 예지 깊은 견해에 관해서 필자는 앞*에서 소개한 바가 있다.
신체가 직관적 형식의 중심적 용재라면 개념적 형식의 중심적 용재는 정신이다. 정신 역시 용재의 의미로서도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정신의 내용에 관한 것이었고 개념적 교호의 수단으로서의 정신은 정신의 내용이 아니라 개념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의 기능을 의미한다.
정신의 소산물로써 수용자에게 전달될 수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문화와 문명이다. 출산이 신체의 공간적 확장인 동시에 공간보다 더욱 중요한, 시간에서의 미래에의 확장, 즉 후대의 제시인 것과 같이 문화의 전수는 정신적 소산의 공간적 확장인 동시에 공간보다 더욱 중요한, 시간에 있어서의 미래에의 제시 확장이다.
재능의 발휘:
인지적 재능의 발휘:
감성적 재능의 발휘
그림과 노래, 이야기 등의 창작. 새로운 사실이나 가치의 발견, 물품의 발명,
자기의 행동과 사유와 심지어는 자기의 말 한마디까지 중요시된다. 물론 그것이 우월한 경우에 한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훼손될 때 슬픔과 괴로움을 느낀다.
문화, 문명, 관습 등은 집단의 정신적 용재이다. 모든 사람이 외부인이나 내부인에 의해 그것이 훼손될 때 분노를 느낀다. 그래서 모든 사회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선대로부터 전수받은 유산을 귀중하게 보존하여 후대에 상속시키는 일에 진력한다.
사회는 문화 속에 자기들의 특성이 반영된 정신을 녹여 풀어 버리므로써 다른 이들의 문화와 구별할 수 있도록 크게 배려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할 과학적 사실이나 진리까지도 자기류를 고집하고 남의 것은 타당한 것일지라도 단지 “다른 자의 것”이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일도 흔히 있다.
사회 성원은 무조건적 자존심에 의해서나 관습의 권위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심성에 의해서 그들의 선조의 문화를 가급적이면 긍정 수용하려하며 특히 외부에서 다른 문화적 침투가 없어서 다른 대안을 알지 못하는 한 타자들의 문화를 받아드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직 자기 문화의 형틀에 완전히 주조되어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취적이고 이상적(理想的)인 젊은이들에게는 이러한 주관적ㆍ자존적ㆍ배타적인 태도가 납득되지 않는다.
문화의 수용자로서의 젊은이들은 선조의 문화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에게 유가치한(곧 수용의 의도에 합치하는) 것 이외의 유산은 거부하는 일도 적지 않다. 문화를 전수 받고, 여기에 그들 자신의 노력을 첨가하여 명실공히 자기의 문화로서 형성시킨 구세대는 이제 수용자가 아니라 제시자의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를 젊은이들에게 주입시키려 하며 젊은 세대가 이를 거부하는데 대해 충격을 받는다.
그들의 문화 유산의 계승이 단절되는 것은, 그들의 자손의 절손(絶孫)이 신체적 생명의 단절인 죽음에 이르는 것처럼, 정신적 생명의 단절을 의미하는, 전율할 일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녀의 출산을 원하는 사람이 치료 불가능한 불치병에 걸린 것과 같은 절망을 가져온다.
그러나 젊은 세대가 자라서 장년이 되고 그들 고유(?)의 정신이 담긴 문화를 형성하면, 이것이 실은 선대의 문화에 극히 적은 그들의 창의성이 덧붙여진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그들이 선배들이 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시금 이를 젊은 후대들에게 계승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그것이 비록 그들이 선배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후배들에게 배척되고 거부될지라도. 젊은 세대들은 변화되어 가는 문화적 물살, 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여 동화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우월한 생활양식으로 여겨져, 후대에게 제시·확장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문화를 통한 제시 본성 구현의 의도인 동시에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