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드러내 보임을 받아딂
①우열에 대한 수용자의 평가와 평가권
수용자 집단: 수용이 제시의 전제임에 따라 수용은 제시의 필수적인 과정이고 이 과정의 열쇠를 쥐고 있는 수용자들은 일종의 권력으로 바뀐다. 수용자들이 집단화하면 수용권(受容權)이 형성된다. 흡사 상품에 대한 소비자들이 소비자 단체를 만들어 생산자와 맞서듯이 수용자 단체(?)도 제시자와 맞서 수용권을 주장하게 된다.
●자기 제시를 수용시키기 위해 벌이는 수의(遂意) 수용들의 사례
트로브리안드인(人)들은 야생 부족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온순한 사람들이어서 야만적이거나 충동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 제시의 본성만은 다른 모든 종족들과 다름이 없어, 이를 감출 수 없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자기들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해 그들은 그들이 소비할 수 있는 수량을 훨씬 초과하는 근채류의 일종으로 그들의 주식용 작물인 얌을 많이 생산하여 남의 눈에 뜨이기 쉬운 창고의 바깥쪽에 놓아둔다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 농사를 짓지만 자기가 생산한 양의 절반 정도는 자매의 가족이나 처가에게 주는데 그것도 가장 크고 좋은 것으로 골라 풍성하게 준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선심에서 나오는 행동은 아니다. 트로브리안드 인의 관습에 따른 우열 평가관에 의하면 가장 크고 좋은 얌을 남에게 많이 주면 많이 줄수록 그 사람은 우월한 인물로 여겨지고 그에 따라 위세가 크게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위세의 경쟁을 위해 증여대회까지 연다고 한다. 그들의 창고에 전시되는 양질의 얌은 생존을 위한 양식이기 전에 이처럼 위세와 권력의 지표이기 때문에 장례식 때에도 다량의 음식을 장만하여 손님에게 대접하면서 그들의 능력을 과시하고 식용으로 쓰고도 남는 상당량의 얌이 썩어버리기 일쑤이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얌을 넘쳐나게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위세가 높아진 귀한 신분의 인물은 평민의 존경을 받게 되며 평민들은 서열이 높은 지도자 앞에서 꿇어 엎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말리노프스키: 《서태평양의 선원들》·《미개 사회의 성과 억압》
우리는 운동 경기를 예로 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운동 경기가 건강 증진을 목표로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의도가 제시의 실현에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운동 경기가 선수들의 기량과 건강 그 자체의 우열을 비교하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실질적인 우열에 불구하고 다만 수용자에게 우월한 것으로 인지시키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일이 적지 않음을 지적함으로써 인간의 본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명백히 이해토록 하고자 한다.
만약에 우월 그 자체가 목표라면 선수들은 원래의 취지와 표어대로 스포츠맨십이라는 신사도의 정신에 따라 그들의 실력을 그대로 정정당당히 겨루면 그뿐일 것이다. 그 결과 실력이 우수하면 승자가 되고 열약하면 패자가 되는 것으로 종결지으면 된다.
만약에 우리가 제시 본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경기를 지켜본다면 선수나 관계자들이 실력의 부실에도 불구하고 관중들로 하여금 승자로 알려지도록 하려고 벌이는 파렴치한 행동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실제로는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심판의 매수ㆍ승부 조작ㆍ약물 복용ㆍ기타 수많은 부당한 방법으로 승패를 조작하고 있다.
이를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직업 선수들의 수입에 대한 영향 때문이라는 합리적인 방식으로만 설명하려고 한다면 그러한 행동의 근원에 깔려 있는 인간성의 참된 원인을 발견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선수들이 그들의 승패를 보여주려고 동원해 온 관중들은 선수들의 조작된 우열 ㆍ승패에 열광하고 환호할 까닭이 없을 것이 아닌가!
예수는 말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마태복음: 6:1~16].”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태: 23: 5~7].”
기도와 금식은 유대교에서의 중요한 종교적 규범이다. 그것은 당연히 신에 대한 행위이며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겉보이는 표시가 없더라도 소리 없는 가운데에서 인간의 염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마태: 6: 3]”하더라도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 곧 신이 파악하고 보답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사람들의 자기 제시적 외식 성향이 얼마나 집요했으면 예수가 이를 특별히 경계했겠는가? 그들은 신에 지향되어야 할 종교적 수행까지도 신에게보다는 인간들에게 드러내 보임에 더욱 열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2천여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당시의 유대에서와 조금도 다름없는, 아니 더욱 심한 제시 행태를 보게 된다.
더구나 일반인이 아닌 바로 예수의 성도임을 자처하는 수많은 기독교도들까지 맹렬한 겉보이기[외식(外飾)] 현상이 팽배해 있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많은 교회들이 신자들의 영적 구제를 기하려 하기보다는 건물의 거대함과 신도 수효의 많음을 과시하는데 몰두하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이것은 바로 인간의 제시 본성이 얼마나 집요하고 강인한가를 웅변으로 설명해 주는 사례들이다.
➀인정(認定)과 평판(評判): 수용되고 싶은 인간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 ┈아니 제시 본성적 인간┈ 은 단순히 사회적 집단에 속해 대인 관계를 맺거나 유지하기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우월하게 수용되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또 단순히 수용되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수용되는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다. 우월성, 더구나 상대적인 우월성이라는 심리적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수용되더라도 우월하게 수용되어야 하며 구설수 • 가십 • 비난 등 수치스러운 열등 수용은 차라리 수용되지 않음만도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본인이 남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에 대해 민감하다.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할 수는 있으나 항상 주변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수용자들은 수용한 용재의 용질이 긍정적[곧 우월]인가 부정적[곧 열등]인가에 따라 반응을 보여주고 제시자 역시 수용의 결과에 따른 자기의 반응을 나타낸다.
긍정적 수용에는 “죽어도 잊지 않는다 • 고마워하다 • 칭송하다 • 손뼉을 치다 • 자기 편에 넣어주다 • 인정하다” 등
부정적 수용에는 “잊혀지다 • 멸시되다 • 무시되다 • 도외시 되다 • 따돌림받다 • 거절되다” 등
➁수용의 결과로서의 가치 평가. 인정{우월에 관한 긍정}
우리는 보통 인정을 받았다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여러 사람에 의해 평가된 대상자의 용재가 남에게 우월하게 수용되었다는 의미이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용재의 비평이 긍정적으로 판정되어 인정을 받아 그 소문이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져 얻는 사회적인 결과를 평판(評判)이라고 한다. 평판은 자기 제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표되는 수용자들의 가치판단의 총체적 결과이다.
이 결과는 대상에 관한 평판에 참여한 자들 개개인의 우열에 관한 평가의 의견이 귀납된 양적 결과이다. 수용자가 제시의 내용을 평가하여 제시 내용의 가치를 인식하여 수용을 결정하는 과정의 하나가 인정(認定)이다. 평가는 당연하게, 우월하거나 열등한 결과로 나타난다. 우월하게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남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인정이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져 사람들에게 회자되면 이를 평판(評判)이라고 부른다. 평판이 좋다는 것은 수용자들에게 우월하게 수용되었다는 뜻이며 이는 다수인의 권위라는 일종의 권위주의적 힘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평판을 얻으려 하며 좋은 평판이란 제시 의욕이 원활하게 성취되었다는 의미가 되기에 그에 기뻐한다. 그래서 제시 본성의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듣는 것은 제시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는 하나의 지표일 수 있다.
평판의 대상에 관한 우열의 표상[表象: 이미지]은 지속적이며 보편적일 뿐만이 아니라 그에 관한 선입견으로 작용하여 그를 따라다니면서, 그의 용질의 우열뿐만 아니라 인격이나 신뢰성 등을 나타낸다.
한 마디로 사람들은 남의 인정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남으로부터 무시되거나 도외시되는 등 부정적 평가를 받지 않았음을 의미하고
ⓑ용재가 대중들로부터 우월 수용되고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이다. 이를 행동 주체에의 입장에서 바꿔 말하면 그가 대중들에게 우월하게 제시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인정받는다는 의미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용재의 우월성을 확인하거나
ⓒ남들 ┈그들이 소수의 대중에 지나지 않더라도┈ 에게 자기 용재가 우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공적을 인정받으려 한다. 자기의 영향력을 확인하려 한다. 사람들이 수용자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는지 우리는 숱한 경험을 통해 잘 안다.
“잘했어요.”“고마워.”“수고했어요.”라는 한마디 말 등 모든 긍정의 표시가 제시자를 기쁘게 한다. 그것으로써 제시자는 자신이 우월한 자라는, 또는 적어도 열등하게 수용되지는 않았다는 것 등 자기의 제시 본성이 달성되었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의식하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
♣[파우스트 박사]처럼 자기가 세계 통제에서 일정한 능력을 발휘했다는 업적을 인정받았다.
♣왕따{된 따돌림}시키기: 자기의 통제력을 행사해서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일 경우가 많다.
◉자기를 인정해 주는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예양.
중국 전국(戰國)시대 진(晉)나라 사람인 예양(豫讓)은 일찍이 육경(六卿)인 범씨(范氏)와 중항(中行)씨를 섬긴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를 정당히 평가해 주지 않으므로 역시 육경의 한 사람인 지백(智伯)을 섬기기로 했는데 지백은 그를 알아보고 매우 존중하고 총애했다.
◉그러나 지백이 조양자(趙襄子)를 치려다가 오히려 잡혀 죽자 예양은 산속으로 도망가서 탄식하여 말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고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얼굴을 단장한다.'고 한다. 지백이 나를 알아주었으니 내 반드시 그의 원수를 갚고 죽음으로써 그 은덕에 보답하겠다.”
지백에게 은덕을 갚고자 하는 예양의 힘은 어디에서 얻는가? 지백이 그를 알아준 데 그 힘의 근거가 있다. 그를 알아주었다는 것은 그의 제시를 잘 수용해 주었다는 뜻이다.
평판의 추구는 비단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일부 동물들도 평판에 목을 매는 행동을 보인다고 한다. 곧 인간은 물론 다른 동물들도 자기를 제시하려 한다는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➀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으로서의 평판.
ⅰ사실 판단으로서의 평판: 귀납적 사실로서의 평판 ┈여러 사람[대중]이 같은 평가를 한다는 것은 같은 사실로서 정세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다수인의 경험의 일치를 통한, 귀납적 [사실]로 귀결된다. 곧 평가 대상자가 사실을 제대로 보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ⅱ가치판단으로서의 평판: 우열의 평가. 평가 대상자의 자질, 자원에 관한 우열에 관한 평가를 가리킨다.
긍정적인 평판과 부정적인 평판
ⓐ우수함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이는 생존에 유리하다는 점에 기인한다.
ⓑ선함. 올바름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이는 도덕성에 합당하다는 점에 기인한다.
미 해군 참모총장 제러미 마이큰 부어다는 거짓 무공훈장으로 인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부어다는 베트남 전쟁에서 적과 전투를 한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상급자들의 허락으로 베트남 전쟁 중에서도 적과 직접 전투를 한 미군만 패용할 수 있는 V 기장을 차고 다니다가 적대적인 제독들이 이 문제를 꼬투리 삼아 집중 비판하자 ”잘못된 기장을 패용해서 죄송합니다.“ 라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 자살하였다*.
✤데이비드 버스: [진화 심리학] 12장: 지위 명성 사회적 지배성 [557P]
이런 사례가 부어다 뿐이었을까? 왜 사람들은 위신을 망치고 사기꾼으로 내몰릴 위험까지 감수했을까? 자신의 지위와 평판을 높이려 하다가 일어난 일이다.
평가의 결과 가운데 가장 부정적인 형태는 무시와 망각이다. 무시란 제시대상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또 대상이 존재함은 의식하지만, 평가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평가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도외시라는 것도 있다. 도외시란 대상을 의식의 목록에서 아예 젖혀버림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열등하게 수용되는 것을 피하려고 은폐를 시도하지만, 열등 수용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아예 대상으로서의 자기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이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전에는 제시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또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지금은 그럴 가치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여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부정적 평가 형태이다. 따라서 자기를 드러내 보이려는 제시 본성적 존재에게 무시되거나 잊어버린다는 것은 가장 혹독한 결과이다.
자기의 제시 내용의 우수함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는 좋은 수용자[지음자[知音者]가 사망하거나 자기를 버리거나 무시하거나 잊어버림은 크나큰 손실이며 슬픔이다. 자기의 유전자를 다량 공유한 사람인 친족을 상실한 슬픔보다 더한 타격일 수 있다.
[위선적 행위]
제시가 수용을 전제로 하는 한에서 제시자는 내부를 충실히 하기보다는 외부에 표현해야 한다. 내부의 충실은 그 결과가 언젠가는 외부로 넘쳐흘러 나타날 가능성이 잠재해 있으므로 미래를 향한 제시 본성의 축적이 될 것이지만 제시의 대상[즉 수용자]들에게 당장 쉽게 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내적 충실에 관한 내용 가운데에는 제시와 전혀 배치되는 것들도 있다. 그래서 제시 욕망이 넘쳐나는 사람들은 내적 충실에는 거의 관심이 없이 다만 외부에의 치장[외식(外飾)]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열등 평가는 아직 수용자의 기억 가운데의 한구석이나마 지워지지 않은 채 자리 잡고 있기는 하다는 뜻이다.
그에 견주어 수용 거부란 수용자가 제시자의 제시, 더 나아가 제시자 자체를 자기의 마음속에 의식하지 않고 지워 없애 버린다는 뜻이다. 이는 제시 본성적 인간에게는 그의 발현성이 서 있을 수 있는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뜻으로 모든 긍효로움을 거절하고 소통하지 않는 것.
등 제시 본성에서 가장 나쁜 상태임을 말한다.
제시자에게 수용자로부터의 밀려남. 인정되지 않음. 버림받음. 쫓겨남.
도외시, 또는 무시되거나 잊혀 짐은 열등 평가보다도 더 비참하다.
잊혀 짐[망각]. 수용자가 자기의 기억에서 제시자의 표상을 지워버림.
세인들로부터의 잊혀짐. 팔로워 제자들, 지인들 친족들로부터의 잊혀짐. 연인 가족들로부터의 잊혀짐.
그 결과 제시자는
외로움. 생존의 패배감. 등의 부정적 감정에 빠진다. 스스로 긍효로워 남의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면 거부당해도 아무런 불안이나 불만이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