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자와 제시자는 수용의 결과에 대해 반응한다.
➀수용자들의 수용 정도와 그에 대한 반응도
제시자가 드러내 보여주는 용재에 대해 수용자들은 그 가치를ㄹ 평가하고 그 평가에 따른 반응을 보인다.
이에 반응도 포함한 수용의 단계와 정도를 한번 생각해 보자.
신성시함: 우월이 신이나 성자처럼 가장 높은 단계일 것이다.
영웅시함: 기성적인 힘과 용감성 등에서 거의 가장 높이 인정되는 정도의 단계이다.
열광함: 제시자의 용질의 우월함이 감정을 세게 부딪치게 할 정도로 커서 감정이 북받쳐 박수와 함성을 보낼 만큼 크다는 뜻이다.
찬양함: 아름답고 훌륭하다, 곧 나무랄데 없이 우월하여 높이 추켜세우는 정도로 높여주는 단계이다.
칭송함: 우월함을 기리어 글로 써서 보존하고 불러줄 정도로 높여주는 단계
선호함: 여럿 가운데에서 좋아해 골라 가질 정도로 우월하다는 뜻의 단계.
뚜렷한 관심: 관심을 기울여 뚜렷하게 기억함ㆍ
미지근한 관심: 관심이 약해져 희미하게 기억해 둠ㆍ
모욕함ㆍ 비난함. 저주함. 욕설을 퍼부음. 폭행함. 손가락질함
열평(劣評)함. : 열등하게 평가함. 용질이 나쁘다고 여김.
악평함: 못났다는 평보다 한 단계 더 나쁘다고 보는 것.
무관심함. 도외시함. 본체만체함. 따돌림ㆍ왕따시킴.
무시함: 용재에 아무런 매력이 없다고 여겨 눈여겨 보지 않고 제시된 용재의 가치를 뭉개버림.
잊어버림[망각함: 잊음(기억하지 못함)] 아예 머리에 담아두지않고 기억에서지워버림. 무시하는 것보다도 더 심하게 열등하다는 의미일 수있다.
위에 적어놓은 것처럼 남의 드러남을 받아드린 수용자에게는 그에 따른 자극으로서의 반응이 발생한다. 더구나 그 자극이 자기의 용재와 우열이 비교되는 동위자, 특히 맞잡이의 용재일 때에는 자기의 용재와 비교하기 때문에 상황이나 당사자에 따라 다르지만, 매우 미묘한 반응이 나타난다.
우열은 즉시 평가되고 그 결과에 따른 반응이 수용자의 표정이나 태도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를 간파한 제시자에게서도 수용의 결과를 판정함에 따른 반응이 나타난다. 이처럼 수용자와 제시자에게 나타나는 반응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감정]이다.
[상대적인 우열 경쟁에 따르는 반응으로서의 감정]
놀이터에서 재미있게 놀고 있던 [강이]와 [낭이]는 저녁때가 되어 배가 고파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던 차에 [당]이라는 아저씨가 빵 10개를 주고 갔다.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큼지막한 빵이었다. 그런데 강이에게는 9개를 주고 낭이에게는 1개밖에 주지 않았다. 낭이에게는 1개밖에 주지 않은 빵을 9개나 얻어서 의기양양해진 강이는 득의한 마음으로 그 빵을 맛있게 다 먹었다.
그러나 낭이는 배가 고프던 차에 공짜로 얻은 그 먹음직한 빵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배가 고파도 재미있게 놀던 낭이가 빵을 얻은 뒤에 생리적으로는 반갑게 생각되었어야 할 그 빵으로 인해 오히려 기분이 나빠진 것이다. 낭이는 빵을 주고 간 당이를 몹시 미워하면서 동시에 강이에게는 어떤 시샘을 느낀다. 빵을 준 당이의 태도에서 자신과 강이의 우열을 확인하는 상황이 되었고 자신의 열등함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빵을 먹은 강이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신음하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알고 보니 그 빵은 겉으로는 맛있게 보였으나 속은 썩어 있었고 그 때문에 강이가 식중독에 걸린 것이다. 낭이는 속으로 크게 고소하게 여기고 쾌재를 부른다.
〘샘{시기(猜忌)}〙•〘강샘{질투(嫉妬)}〙• 조소(嘲笑) • 경멸(輕蔑) 등은 상대적인 우열의 결과에 따라 발생되는 반응으로서의 역리적 감정인 흐린 정[탁정]*이다. 인간의 정신에 상대적 우열을 비교 평가하는 성질이 내재하는 한 경쟁과 갈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온건한 스피노자까지도 인간성의 이 측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업적을 고취하고 자기의 신체뿐 아니라 마음의 힘을 과시하는데 열중한다.………. 인간은 본성상 질투심이 많으며 자기의 동류가 허약하면 기뻐하고 반대로 자기의 동류가 재능이 있으면 자기는 슬퍼하게 된다.” *스피노자: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기원과 그 본성에 관하여. 정리 55 주해.
인간의 본성이 오직 심성뿐이고 상대적인 제시 본성이 인간 심성의 전부라면 갈등은 인간 세계에서 결코 제거할 수 없는 정신의 필연적인 현상일 것이다. 실제로 인류의 역사는 갈등으로 인해 야기된 숱한 사건들로 점철된 경쟁의 역사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더구나 현대 사회학에서 사회 현상의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주장되는 몇 가지 이론들, 기능론 • 상호교섭론 • 교환론 등이 사회 설명의 긍정적 이론들임에 대해 같은 비중의 이론인 갈등의 〘갈등 개념〙은 일반적으로 이를 해소시켜야 할 부정적 현상으로 여기면서도 인간사에서 갈등을 없애지 못하는 이유는 ┈없애기는커녕 갈등은 오늘날 더욱 깊어지고 있다고 해서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인 상대적 우월 제시의 제거할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경전에서는 카인이 그의 동생인 아벨을 죽임으로써 인류 최초(?)의 살인자의 오명을 얻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제시에서의 상대적 심성에서 야기된 갈등 때문이었던 것으로 그리고 있다. 이제는 전 세계의 수 많은 사람들이 신봉하는 절대적인 권위서인 성경에 의하면 카인의 살인 동기는 그들의 신인 여호와가 아벨의 공물은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물은 수납하지 않은 데에서 오는 질투심 때문이었다.
이 질투심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그것은 생활상의 불이익이나 불편, 신체적인 이해관계 등과는 전혀 무관하고 오직 그와 그의 동생에 대한 여호와 신의 평가를 비교해 볼때에 그에게 열등하게 내려진 것으로 이해된 신의 뜻 때문에 야기된 불상사였던 것이다. 이 감정에서 유전자 근연도는 무기력하기만 하다. 제시는 우월하게 성취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제시 내용이 상호 비교되는 상대방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하게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다.
강이가 낭이를 위해 자기의 온 힘을 다해 일하여 기진맥진한 상태인데도 낭이가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기대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강이는 더 일할 마음이 없어진다. 자기 제시에 대한 소득이 없는 일에 기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다. 그런데 낭이가 ”고마워요.”라고 진심어린 말 한마디만 해주면 그것이 아무런 물질적 보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그동안의 고생이 오히려 기쁨이 된다. 왜 그러한가? 물질적 보상보다 제시 자체가 더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자신도 무언가를 해서 성취했다는 의식, 그것은 자기가 미미한 것이라도 통제하여 성공했다는 의식을 갖게 해 준다. 만약에 감정 추구의 적극적인 측면이 되는 쾌락의 추구가 불가능하면 그 소극적 측면인 고통의 회피만이라도 가능하기를 바라는 것이 생명체들의 바람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고통을 더 두려워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으며 만약에 곤경에 빠진 경우에라도 고통이 따르지만 않는다면 죽음은 기꺼이 감수할 의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흔하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심한 고통으로 신음하는 경우에는 사람들은 그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락사시킬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해 주는 일이 있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 편에서는 고통과 불쾌가 존재하지 않을 것을 욕구하고………, 다른 편에서는 강력한 쾌감정의 경험을 욕구하는 것이다.*” *프로이트: 《문화의 불안》 김종호 역. [박영사] 1970. 38p.
인간에 따라서는 죽음이 닥쳐왔을 때 죽음 그 자체보다는 죽음에 따르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더 고통스러워하는 일이 비일비재이다. 의욕이 줄어들어 제시 활동이 어려워진 사람들은 우월했던 제시의 결과를 되씹으면서 자기 스스로 위안을 얻으면서 제시를 대신하려 한다.
인간의 본성은 세계 통제욕이며 심리기의 인간의 본성은 자기 과시이지만 이러한 적극적인 욕망의 달성이 불가능한 경우에, 또 그러한 의지 달성보다는 그 결과로서의 쾌락 추구를 더 선호하는 사람들은 제시라는 적극적인 행위보다는 쾌락 추구라는 소극적인 측면을 중시하지만. 그것 역시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에 쾌락 추구라는 적극적인 측면의 추구마저 어렵게 느끼는 사람들은 이제 쾌락이나 행복 추구의 소극적 측면으로 향한다. 곧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인들이 그러했듯이 고통이 적고 불행이 덜한 쪽으로의 삶을 추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