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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무경 Apr 09. 2024

유명해지려는 심리 분석
[6]영광과 수치

제시의 결과는 영광으로 끝나거나 수치로 끝난다. 

[6영광과 수치

제시의 운반자


물리적 운반자인 [신체]와 관념적 운반자인 [이름]

제시의 신체적 운반자인 유전자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유전자의 운반자라고 지적했다. 필자가 이를 흉내 내어 말하자면 신체적 유전자는 자기 제시의 운반자이다. 

유전자가 신체를 통한 제시의 운반자라면 개인의 [이름]은 그 사람에 대한 제시의 관념적 운반자이다. 우리는 세상의 갖가지 사물에 관한 개념을 정립하고 그에 대해 설명한다. 


그때마다 그 개념이나 사물에 관한 이름을 짓는다. 그 사물에 관한 설명은 그 사물의 개념이 되며 그 이름은 개념의 이름이 되어 그 사물을 대신한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자아는 그 개인의 개념이고 이름은 그를 대신하여 그의 개념을 가리키는 표지(標識)로서 그를 대표하는 기능을 가진다. 


우리가 이름을 함부로 지을 수 없는 이유이다. 과거에는 아무나 이름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며 이름이 있다고 함부로 부르는 것도 아니었다. 이름은 그토록 중요시되었다. 그래서 [유명]하다는 것은 이름이 있다는 뜻으로 비로소 인격체로 인정을 받는 것을 의미했다. 


인권이 크게 늘어난 현대에는 이름이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반려동물 등 동식물에게도 이름이 붙는다. 그래서 “유명하다.”는 것은 사람에게 당연한 것이 되었으며 “유명하다.”는 개념은 이제 아마도 “저명(著名){이름이 뚜렷하다}”롤 격상되어야 알맞을 듯하다.  

    

영예의 운반자인 명예와 명예심  영광과 명예

이름은 [자아]의 우월 평가인 영예나 열등 평가인 수치(羞恥)를 나타내는 수레{운반자}이다. 자아를 전달하는 데에 이름보다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 사람들은 하나의 자아에 속하는 모든 내용을 그를 대표하는 이름 아래에 붙여놓는다. 


그의 이름 아래에 그의 정신과 신체, 그의 신분과 지위, 그의 재화, 그가 평생 이룩한 생애와 업적과 작업, 그가 남긴 영상 등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 모아 그것을 그 자신처럼 여기며 대우한다. 그가 죽은 뒤에 남는 것은 신체적 수레인 자식과 관념적 수레인 이름뿐이다. 이런 귀중한 이름이 널리 퍼진 것이 [유명하다]는 말이며 널리 떨쳐 얻은 유명한 긍정적인 평판이 [명성]이며 만인의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의 성공과 실패, 선행과 악행 등 일체가 [이름]을 통해 전달되기에 이름은 중시되며 특히 [명예] ┈명예란 그의 자랑거리라는 긍정성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낱말이어서 그의 부정성은 반영되지 않은 일컬음이지만┈ 와 명예심은 유전자보다도 더 귀중한 것일 수 있다. 

     

만약에 자기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면, 즉 신체적 생존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라면 모든 영예의 수여는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영광]과 [수치]

영예(榮譽) 영광스러운 명예, 곧 명예가 영광스러운 경우 

공공장소, 건물, 또는 생물의 학명에 관련자의 이름을 부여하여 그 인물의 업적을 기린다. 그렇게 얻어진 긍정적 이름 ┈부정적인 이름에는 명예가 따르지 않는다┈ 이 역사적으로 다중에게 수용될 때 이를 명예라고 부르며 명예를 얻으면 이를 얻은 빛나는 영예인 영광에 감격한다.      


“명예라는 건 참 이상한 가치입니다. 눈앞의 재물을 거절하게 만들고 폭군 앞에서도 바른말을 하게 합니다. 명백히 불리한 상황에서도 검을 뽑아 들게 만들고 죽음 앞에서조차 의연해지게 합니다*.”


*쌍둥이 성좌 프로젝트 스토리북 2권[나무 위키에서]     


많은 사람들은 명예를 얻으려고 노력하며 그 열망은 비슷한 양의 돈이나 권력을 얻으려는 욕구보다 강할 수 있다. 실제로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하거나, 혹은 직장인들이 열심히 일해 부자가 되려는 목적은 그를 통해 얻는 돈보다는 그를 통해 얻는 명예인 경우가 많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엄청난 재력을 가진 부자들이 굳이 정치에 뛰어드는 것도 명예욕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 외에도 정치판에 안 뛰어들었으면 돈깨나 만지고 어깨에 힘주고 살았을 수많은 정치인*들도 마찬가지.

*필자의 견해로는 정치가들보다 학자들의 명예욕이 더 큰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명예살인(名譽殺人 honor killing)]이라는 말까지 있다. 요르단 · 이집트 · 예멘 등 이슬람권에서 가족 가운데 순결이나 정조를 잃거나 간통한 것이 들통나 이로 인해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남편 등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가족 구성원인 해당 여성을 살해하는 관습이다. 


살해한 가족은 붙잡혀도 가벼운 처벌만 받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공공연하게 자행되어 왔다. 명예살인은 주로 이슬람 문화권에서 자행된다고 하지만 일상에서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말하면 가족 구성원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어서 사랑이 가장 강하게 지향되는 대상들이다. 그런 귀중한 대상들도 명예심 앞에서는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살인의 대상이 된다.      


장수들이 전쟁에서 얻으려고 하는 궁극적인 것은 승리인가 명예심인가?

총탄이 우박처럼 머리 위를 스쳐 가는 전장에서 장군들의 뇌리를 지배하는 상념도 역시 그의 존재를 이름에 의해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명예심이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모든 고귀한 감정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서 명예와 공명에 대한 갈망만큼 두드러지는 것은 없다.*”

“과연 위대한 사령관치고 공명심을 품어본 일이 없는 장군이 있으며 혹은 그러한 성격의 장군을 상상만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클라우제비쯔 ❰:전쟁론❱ 김홍철(金洪喆) 역 [삼성출판; 세계 대사상전집] 1977, 112쪽  

   

자기를 드러내 보이려는 본성이 어찌 장군들뿐이겠는가?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인심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은 남의 이야깃거리가 된다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파스칼 ❰:팡세❱ 77].”


에리히 프롬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건전한 사회❱에 다음과 같이 적어 넣었다.

“사람들은 유명해지려고 하는 불타는 야망으로 가득 차 있다.”**에리히 프롬: ❰:건전한 사회❱. 

   

프롬은 이 구절 앞에 “중세 사람들에게는 없지만………이라는 말을 적어 넣고 있는데 확실히 겸손을 강조하고 외식(外飾)을 경계(마태 6 : 1~ 16, 23 : 5 ~ 7)하는 기독교가 지배적 세력이었던 서양의 중세 시대에는 제시 본성적 사고방식은 억압으로 위축되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구절의 해석에 있어, 유명해지려는 야망이 중세 이후에 비로소, 그리고 더욱이나 후천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 심성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앞에서 인용한 플라톤의 기술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야망은 중세 이전에도, 그리고 세계의 도처에서 발현되고 있었던 것으로 문화적ㆍ사회적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다. 


이러한 여러 행태는 생존이 신체적인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남의 의식 속에 드러내 보임으로써 존재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형성되는 심성이다.      


T. 캠벌은 이를 정확하게 표현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뒤에 두고 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다.”     


비잔티움의 철학자 필론은 에페소스에 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가리켜  

“아르테미스 신전은 신들을 위한 오직 하나의 집이다. 사람 눈으로 보면, 이곳이 지상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불사(不死)의 신들의 천상 세계가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다.”


라고 지적했을만큼 훌륭한 건물이었다.* *고대유적, 2007. 6. 4., 모리노 다쿠미 외 2인. 이만옥 역  도서출판 들녘,      


② [아르테미스 신전방화범

◉B.C. 356년 10월, [헤로스트라토스(Herostratos)]라는 그리스 사람이 [아르테미스 신전] 건물에 불을 질렀다. 방화범으로 체포된 그에게 불을 지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어떻게 하면 후세에까지 이름이 알려질 일을 할 수 있는가를 궁리한 끝에 그 같은 귀중한 건물에 방화를 하게 되면 목적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믿고 그랬노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방화 뒤, 헤로스트라스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다. 차후의 비슷한 범죄를 예방하려는 목적에서 에페수스의 관료들은 그를 사형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초드는 행위까지 처벌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고대의 역사가인 테오폼푸스가 ❰Hellenics❱라는 그의 저서에 이 사건을 남기면서, 결국 헤로스트라스의 목적은 달성되었다.

 

헤로스트라스의 이름은 고전문학을 통해 살아남아 현대의 언어까지 이어졌으며, 범죄 행위를 저지르고 그로 인한 자기 제시 ┈비록 악명이어서 부정적인 효과를 낳지만┈ 를 즐기는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다. 독일어로 Herostrat은 “유명해지고 싶어 죄를 짓는 범죄자”를 의미하며, 영어 단어 “Herostratic Fame”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얻고자 하는 명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위키백과 헤로스트라토스] ※필자가 몇 자 고침.     

수상(受賞신드롬

다소간의 학식을 지닌 성인(成人) ┈노벨상이 무엇인지 대강이라도 알만한┈ 이면서도 노벨상에 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의 노벨상]*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더라도 노벨 재단에서 수여하는 노벨상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공식 노벨상 이외의 노벨상이 수상되지 않는 분야에서 노벨상만큼 권위가 있다고 하여 '~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상들이 있다. 예컨대 이그 노벨상    

 

사람들은 왜 그토록 노벨상에 목을 맬까? 자신들이 최고의 학자이며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수많은 인재들, 심지어는 생명체가 오로지 적응과 번식(뿐)임을 그다지도 강조하는 일부 진화학자들도 노벨상을 타느냐 타지 못하느냐에 목을 맨다.* 역사적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노벨상의 권위는 아무도 감히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긴 하다. 심지어 숙명론자들마저도 노벨상 수상을 고대한다. 상금 때문이 아니라 명예 때문이다. 


어느 학설의 가치나 진위의 증명은 그 자체보다는 그 학설의 노벨상 수상 여부가 더욱 중요한 지표가 된다.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반인들은 그렇다 치고 과학자 ┈노벨상의 절반은 과학자들에게 수여된다.┈ 

●왓슨과 크릭은 왜 여성 과학자인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ilnd Franklin)의 DNA의 X선 사진을 도둑질했다는 위험한 비난을 무릅쓰는  수상한 행동을 하면서까지 자신들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견을 한 사람처럼 포장했는가? 


만약에 우월만이 중요하다면 왓슨과 크릭은 굳이 로잘린드의 공을 가로채려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공을 그대로 인정한 뒤에 자신들의 통찰력을 덧붙이는 것만으로도 우월함은 달성되었을 것이다. 

노벨상 상금이 매우 많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오직 노벨상의 막대한 상금이 자신의 가계에 보탬이 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때문일까? 하지만 그것은 노벨상 수여의 근거이며 이에 따르는 수상자의 공헌은 이미 노벨상을 타기 이전에 완료된 일이다. 노벨상 수상 당사자 본인이 인류에 대해 공헌하게 하려고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만약에 인간들이 신체적인 생존 ┈거기에 자녀들의 생존까지 포함해도 그렇다┈ 만이 유일한 동기라면 노벨상 수상과 같은, 그들이 죽어 의식이 사라진 뒤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허한 명성(?)을 그다지 부러워하고 집착할 근거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생명체의 본성 ┈여기에서는 생명체의 본성에 도덕적 본성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에는 신체적인 생존에 근거하는 동기 이외에 다른 심리적 동기가 있다. 


그것이 자기 제시이다. 노벨이 의도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를 제정한 노벨의 명예는 ┈다이너마이트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벨상에 의해서 가장 높이받들어졌다. 노벨상뿐인가? 사람들에게 영예를 부여하는 상은 적지 않다. 아카데미상 •  콩쿠르상 •  베링 학술상 •  퓰리처상 •  필즈상 •  올림픽…………등 세계적인 상을 비롯해 부문별 •  국가별 •  기관별로 수많은 상들이 시상된다. 수상의 기쁨이 상금의 유용성에 있을까? 영예에 있을까?      


“명예심은 유전자보다도 더 귀중한 것일 수 있다.” 유전자는 생명을 있게 하고 명예는 생명체의 정점에 있는 인간 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명해진다는 것은 이름을 통해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 보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자(孔子)가 설파한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효(孝)의 목표는 다만 [한자 문화권]만의 경향이 아니라 동서고금 인간들의 소망이다. 출세하여 자기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이름을 세상에 드날린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를 우월하게 드러내 보임을 의미한다. 


이름은 바로 그것이 표시하고 있는 대상을 상징하는 의미 있는 지표(指標)이기 때문이다. 실로 이름은 주체의 생사를 초월해서 그를 표현한다. 이름이, 유한한 신체적 생존을 초월하여 신체적 생존이 소멸된 뒤에도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의 장수 왕언장이 즐겨 썼다는 속담에 공감을 표시한다. 


따라서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의 유서 끝에

“내 이름을 다음 세대에, 그리고 외국의 제 인민에게 알려 달라*”

*❰영원한 사상의 발자취❱ 윌 듀란트 저 최혁순 역 휘문출판사 1962. 8. 15. 4판 140쪽 

    

하고 부탁한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베이컨뿐만 아니라 그를 포함한 다른 많은 위인들이 그들의 재예와 노력으로 이룩한 빛나는 업적에 대해 혹시 명성을 원한다면 이에 기꺼이 부응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위인들의 은덕을 입고 있는 후대인들은 위인들에게 가장 높은 명예를 부여(附與)해 주기 위해 애쓴다. 


명예가 쉽게 훼손되지 않게 하려고 매우 단단한 사물들에게 위인들의 이름을 달아준다. 땅이나 길, 견고한 건물, 바위 등에 위인들의 이름을 붙여주고 건물이나 함정, 돈에 그들의 이미지를 그려 넣기도 하며 새로 발견한 생물에 발견자들의 이름을 붙여준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물질적ㆍ신체적인 보상을 능가하는 최고의 보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세력이 강한 자들이 스스로 불멸하는 사물에 자기의 이름을 지어 붙이기도 한다. 로마 황재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캘린더의 한 자리를 자기들의 이름으로 채워 넣었다. 


“우리의 동료 인간들에게 대한 가장 나쁜 죄악은 그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무관심한 것이다. 그것이 잔인(殘忍)의 진수이다.” G. B. 쇼 ❰악마의 제자❱. 양주동 세계 명언 사전 150P     


명예와〘긍효〙이 두 가지는 인간의 심리적 욕망이 염원하는 최종의 목표라고 해서 과언이 아니다. 긍효란 주로 신체적 생존을 쾌락하게 영위함을 의미하고 명예란 정신적 생존의 욕망이 추구하는 대상이다. 대체로 범인(凡人)은 이(利)를 취하려 하지만 위인들은 이보다는 이름(명: 名)을 얻으려 하는 경향이 크다.

      

“명예에의 열망, 그것은 모든 위대한 인물의 본능적인 열망이다(E. 버크).”     


명예심에 관한 스피노자의 지적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다.

“명예심이란 모든 감정의 온상이며 그것을 강화해 주는 욕망이다. 따라서 이런 감정을 극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실제 사람이 어떤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반드시 이 감정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떤 훌륭한 사람의 행동도 명예욕에 근거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명성(명예)을 경멸해야 한다고 써 놓은 그들의 책 안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넣었다’ 

*스피노자 《에티카》 3부 감정의 규정.      


사람에 따라서는 생리적인 쾌ㆍ고보다 심리적인 쾌ㆍ고가 더욱 근본적인 것이다. 불명예는 불구보다 견디기 어렵다. 

“상해는 모욕보다 쉽게 잊힌다.(체스터 필드 경(卿)).”

“나는 명예를 훼손당하기보다는 백만 번 죽는 편이 낫다(애디슨).”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명예를 잃은 자는 그 밖에 아무 것도 잃을 수 없다(푸브릴리우스 시루스).”     


거창한 것만이 제시가 아니다. 커다란 우월과 커다란 열등, 사소한 우월과 사소한 열등 등 우리의 일상은 아주 사소한 제시 행동의 무수한 반복이다. 벽에 낙서를 한다. 사진을 찍어 보존한다. 자신의 글씨나 그림 등을 남기려 한다. 무엇을 쌓거나 파거나 새기거나 그리거나 등등으로 어디에든지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 한다. 


이웃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 한다. 비난받을 짓을 하지 않으려 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라도 창피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한다.      


◉영국군의 오글소프 소장은 새로이 개척이 시작되고 있는 신대륙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싶어서 당시의 영국 왕인 죠지 2세에게 이를 건의했지만, 왕은 식민지 개척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글소프가 왕에게 인간적 도리, 식민지 개척의 가치와 영광 등을 들어 설득해도 왕의 반응은 마이동풍이었다. 


오글소프 소장은 마지막으로 각국의 많은 왕들이 모두 그들의 [이름]을 딴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죠지 왕의 이름을 딴 식민지가 없다는 점을 의식시키자 왕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식민지의 건설을 인가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건설에 필요한 모든 비용까지 부담해 주었다. 


미국의 [조지아 주]는 바로 이러한 유래를 지니고 개척되었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이 모든 사례는 그러나 인간의 제시 형태의 두드러진 일면일 뿐이다. 앞으로 차례로 해명해 나가게 되겠지만 인간의 심성이 자기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면 모든 행동이 이 심성에 의해 유발될 것이므로 동서고금의 예를 아무리 많이 열거한다고 해도 이것으로 제시 본성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칼 포퍼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오히려 역으로 제시 본성에 반한 행위가 인간에게서 발현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만약에 제시 본성에 반한 것으로 보이는 행동 현상이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제시 본성에 의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를 해명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일일 것이다. 


그러나 소위 반증(反證) 가능성에 관한 포퍼의 견해가 경험적 사실을 증명함에 있어서 매우 유효한 것이라고 해도 논의하고자 하는 주제를 적극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 적당한 사례를 다소간 열거한다는 것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도 불가피한 조치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어디에든지 자신의 영향력을 남기려 한다. 어디에든지 영향을 끼쳐 그 반응이 일어남을 보고 즐기려 한다. 

♣남을 놀래키려 한다. 

♣남을 건드려 본다. 

♣묘기나 마술을 보여서 놀라게 한다. 

♣우스운 말이나 행동을 해서 반응을 나타내게 하려 한다.       

             

[우월 평가] 노벨상을 받고 싶어 한다.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한다ㆍ 세계 평화 실현에 기여하고 싶어한다.      

[열등 평가] 세기의 살인마ㆍ 패륜아ㆍ 


♣사소한 우월과 사소한 열등     

자기를 우월하게 드러내 보이려는 본성을 타고난 사람들은 자기의 명예를 치켜세워 자기의 존엄성 ⎯자존심, 곧 명예⎯을 높이면 가장 큰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 사소한 우월함이라도 얻으려 자기를 드러내 보이려 한다.     

남을 웃기고 도와주고 혹은 폭력을 사용하거나 모욕을 주어 자신의 우월한 인상을 남겨 [잘했어요. 대단한데! “기특하다.” 등 우월한 평판에 따르는 남의 인정을 받으려고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 남의 우월한 평판을 의식한다. 


우월 긍정이면 더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월부정의 인상이라도 열등 긍정이나 열등 부정의 인상을 남기려 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당연히 인격적으로나 용질에 관한 평가를 낮추는 비속한 말로 모욕하는 말 ⎯싸가지가 없다ㆍ병신ㆍ 머저리ㆍ 등신ㆍ 숙맥ㆍ 멍청이ㆍ 멍텅구리 등 흉을 본다ㆍ 비웃는다. “그것도 못하냐?” ㆍ “사람이 칠칠하다.”ㆍ “너는 항상 왜 그러냐?”ㆍ “그럴 줄 알았어(본래부터 기대하지 않았다.)”라고 폄훼하여 왕따를 시키거나 손가락질 하는 을 사용하여 자기의 자존심, 곧 명예⎯에 상처를 입혀 존엄성이 깍이는 짓에 가장 큰 분노를 느낀다.      


인간이 추구하려는 것은 명예심인가단순 생존인가?]

마빈 해리스식의 경제적 이유?

유물론적인 사유를 지닌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 보이려는 명예심 대신에⎯ 신체적인 가치를 중시하기 때문에 세계와 인성을 이에 기반한 긍효의 달성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에 관한 견해를 살펴보려 한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

위신 추구는 생태계의 적응일 뿐인가? 자신을 스스로 [문화 유물론자(唯物論者: Cultural materialism)]라고 명명한 마빈 헤리스*는 ┈그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학자들, 특히 대다수 유물론적인 학자들의 공통된 경향이 그러하지만┈ 문화를 생태계에 대한 적응, 즉 신체적 생존 양식으로 해석하려 한다. 그에 의하면*

**마빈 해리스: ❰문화의 수수께끼❱ 박 종열 역[한길사] 1985(5판). 본고에서의 야노마모 족과 카오카 족의 사례는 위의 그의 저서에서 뽑은 것이다. 그의 저서에는 여기에 인용한 것보다 훨씬 방대한 분량의 사례들이 실려 있으므로 관심 있는 독자는 직접 읽어봄이 좋을 것임. 이하에 인용된 〚쪽〛수는 모두 이 책의 쪽 수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하는 대인들의 열망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하게 되고 더 많은 식량과 귀중품을 생산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자급 자족적 생산수단을 지니고 있는 자연조건하에서 경쟁적으로 축제를 개최하는 것은 전쟁이나 흉년 등의 위기 시에 노동 생산성이 최하 수준 이하로 하락하는 것을 막는 실질적 역할을 하고 있다. 경쟁적인 축제의 개최로 말미암아 경제적인 기대치를 광범위하게 확대해가는 조직망이 형성된다.………. 


결국 대인들의 경쟁적인 축제 개최는 각각 상이한 미시 환경 지대(microenviroments) ┈해안 지대ㆍ늪지대ㆍ고산지대 등에 정착하고 있는 일군(一群)의 부락들 간의 생산력에 있어, 해마다 크나큰 변동을 가져오는 것을 바로잡는 자동 평형 장치 구실을 하고 있다.〚103〛     


“가장 성황을 이룬 축제는 자동적으로 그해의 생산에 가장 적당한 강우량과 기온ㆍ습도 등의 기후 조건을 갖춘 부락에서 열리게 될 것이다.” 

대인 축제나 포틀래취는 대인 및 추장들의 만족할 줄 모르는 위신 추구의 열망을 표현시켜 주는 하나의 행사이다. 그러나 해리스의 일관된 관점에서 보면 만족할 줄 모르는 위신 추구의 열망이라는 것은 경쟁적 축제를 통해 나타난 하나의 표현 방식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회가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을 이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회가 경쟁적 축제에서의 성공을 항상 명성과 연결시켜 주지는 않는다. 명성을 얻어내는 원천으로서의 경쟁적 축제는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적절한 평가가 되어야 한다. 


이처럼 해리스는 사실을 무가내하로 그의 인식 구조에 맞추어 생태계에의 적응이라는 합리적 견해로써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이러한 해석 자체가 해리스의 문화적 관점에 따른 편견이다. 그것은 또한 마빈 해리스 개인의 독특한 견해이기 이전에 서구인들의 일반적인 문화적 시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자 문화권에 사는 우리에게는 그가 피력하는 우회적인 설명이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견해에 따라서 대인들의 심성을 명료하게 표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의 목표는 신체적 생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실익이 아니라 대인 칭호가 주는 사회적 위신, 바꾸어 말하면 상대적인 우월 제시이기 때문이다.     


마빈 해리스는 제시 본성적 행태를 저주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들이 위대한 인물이라고 자랑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마법에 걸린 자들이라고 저주받고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평등주의적인 생활양식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106〛

     

사실 마빈 해리스는 이 설명을 평등주의적 생활양식이라고 불러 자신의 의견이 아닌 것처럼 지적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강제적 보상심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등주의라고 부르는 생활양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누구나 관대하다는 말을 듣기는 좋아하지만 속기를 잘하는 호인이라는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109〛.”는 설명을 덧붙임으로써 결과적으로 필자가 주장하려는 견해, 즉 자기 제시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진화심리학적인 견해 생존과 번식[성 선택]유전자는 운반자인 개체의 분신인 자녀의 몸을 통해 자신을 후대에 전달한다. [자기 제시 개념]은 이름을 통해 자신을 후대에 전달한다는 것이다. 자녀의 몸이 유전자의 전달자라면 이름은 [자아]의 얼과 몸 모두를 드러내 보이는 제시의 전달자이다.

        

명예와 치욕체면과 위신 

체면치레 

한자 문화권에 딸린 겨레들은 남 앞에서의 [체면]을 중시한다. 체면이란 자기를 잘나 보여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면목을 가리키며 이들은 남 앞에 서는 체면이 서도록 자신을 꾸미는 [체면(體面)치레]를 중시하여 체면이 깎이는 일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이렇게 체면만 차리다가 결국 할 일도 못하고 먹을 것도 못 먹고 손해만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기에 속담에[체면이 사람 죽인다]라는 말이 있고 체면을 차리느라고 하잘 것 없는 사람에게 졸림을 당하는 것을 “체면에 몰린다.” 고 하며 체면이 서지 않아 부끄럽고도 분하면 “체면(이) 사납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우월성(優越性)의 의미를 좁히면 체면치레를 하려는 마음씨이기도 하다.


명예심과 체면치레의 관계                              

[덮어 가리기[은폐(隱蔽)] 

●열등함이 드러난다는 것은 자기 제시의 본성에서 벗어나는 일이 된다. 그렇기에 열등함이 드러남은 수치가 되며 꺼려지는 일이어서 이를 감추어 덮으려고 하는 것이 제시자의 심리다. 은폐라는 것은, 이처럼 열등한 내용을 감추는 행동이다. 


●생물의 욕망 중에는 일반적인 평가에서 부정적으로, 곧 열등함으로 인정되는 일이 매우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내용의 욕망은 남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욕망은 쉽게 참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떻게든 충족시키고 싶은 욕망을 열등하게 드러남을 피하는 방법은 남이 보지 않는 ┈곧 남이 의식하지 못하는┈ 때와 곳에서 분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의 이목이 빈번한 곳에서는 애써 참지만 남의 이목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열등한 짓을 비롯한 극악한 일 등 무슨 일이든지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사디즘으로 악명 높은 “[사드]의 유언장”에 관해 이야기 해 보자. 

1772년 여름에 사드는 마르세유의 홍등가 매춘부 가운데 한 명에게 먹인 최음제가 부작용을 일으키면서, 졸지에 독살 미수 혐의로 수배를 받게 된다. 깜짝 놀란 그는 부랴부랴 외국으로 도피에 나서면서, 아내 대신 평소 자신의 불륜 상대였던 한 여성을 동반한다. 


그런데 문제의 여성이란 다름 아닌 그의 처제였기 때문에 더욱 큰 스캔들이 벌어졌고, 이에 분격한 장모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위를 손봐주려고 벼르게 된다. 사위를 미워하던 장모가 국왕에게 호소하여 사면 없는 무기한 구금 명령을 받아냄으로써, 사드는 이때부터 무려 13년 동안이나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14년 12월 2일, 사드는 결국 샤랑통의 정신병원에서 눈을 감는다. 유언장에서 그는 자기 무덤 위에 여러 가지 과실수를 심어서 무덤의 흔적조차 없애 달라고 당부했다. 

“사람들의 뇌리로부터 나에 대한 기억이 깨끗이 사라지는 게 더없이 기쁠 따름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점점 더한 악명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7390  ✻필자가 문장을 줄이는 등 다소 고침.     


증자(曾子)의 말대로 열 사람이 눈으로 보며 열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니 이 얼마나 엄한 일인가?[十目所視하며 十手所指니 그 嚴乎인저!]* *예기(禮記) 42편 대학의 원문 傳文 제 1장. 399p  

   

◉콰키우틀의 사회에서는 철저한 장자 상속제에 의해 재산과 신분이 양도되기 때문에 장자 이외의 자녀들은 지위와 재화를 획득할 기회가 거의 없어서 경멸적인 하층민으로 취급된다. 한 수장의 막내아들이 노예의 딸과 함께 먼 샛강으로 달아난 채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들의 사회에서 막내아들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으므로 이것은 그 가족들에게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달아난 막내아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대단한 미녀었다. 그녀가 자라 혼기에 도달했을 때 수장의 장자{그녀의 아버지의 맏형인 큰아버지}가 그녀의 미모에 끌려 서로 간의 신분을 알지 못한 채 친조카인 그녀와 결혼을 했다. 


얼마 후 그들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수장의 장자는 자기의 사회적 신분의 하나인 고귀한 이름을 그 아들에게 상속시켜 주면서 그의 가족과 장인ㆍ장모{사실은 그의 막내 동생 부부}를 데리고 그의 아버지인 연로한 수장을 찾아갔는데 그때에야 비로소 그는 자기가 막내 동생의 딸인 친조카와 결혼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수치심을 느낀 연로한 수장은 자살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적 관념에 의해서라면 늙은 수장의 자살은 근친상간에 따르는 수치심 때문이었으리라고 바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콰키우틀의 관습에 의하면 근친결혼은 매우 일반적인 형태여서 그 때문에 수치심을 느낄 아무런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늙은 수장이 자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비천한 평민에 지나지 않는 자기 막내아들의 소생에게 자기의 고귀한 수장의 이름을 상속시켜 준 데 대한 수치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이름이 더럽혀진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죽음과는 반대로 막내아들은 의기양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기의 고귀한 맏형을 속여 자기의 딸과 결혼시킨 다음 자기 외손자를 위해 직함이 있는 이름을 얻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210p)” 늙은 수장의 자살과 막내아들의 의기양양함이 신체적 생존에 관한 일 때문일까? 아니면 자기 제시에 관한 심성 때문이었을까?     


한국의 과시 문화

그런데 이러한 과시 문화는 콰키우틀족에게만 있는 것일까? 술집에서 얼마간의 팁을 아끼려다가 망신을 당하는 것보다는 듬뿍 집어주어 자신의 위신을 뽐내려고 하는 것이 얼마 전까지의 우리 한국인이 아니었던가? 


콰키우틀족과 같은 과시 문화를 갖고 있어서 그들 문화가 사라진 현대에 과시 문화가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들의 행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제시자는 수용자에게서 긍정 평가를 받고 싶어 한다. 부정 평가를 받으면 기분 나빠한다. 그러나 부정 평가가 무시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무시란 평가를 하기는 하지만 무가치하여 우월 수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부정 평가라도 평가를 했다는 것은 그 내용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일단 관심을 보였다는 증거임에 견주어 무관심은 제시의 목표인 수용 자체가 막혀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부정 평가보다도 더 낮은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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