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기토 엘고 썸)."
철인열전
[3] 데카르트 [ Rene Descartes ]
데카르트는 1596년 3월 31일 프랑스 중서부지방 라크레즈의 오른 편 강 언덕에 있는 투렌(Touraine: 현재는 앵드르에루아르 데파르트망(Department)의 라에(La haye)라는 소읍에서 부류타뉴 주 의회의 고문인 조아셍 데카르트(Joachim Descartes의)라는 부유한 귀족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고향 라에는 1996년 데카르트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도시 이름을 데카르트로 바꿨다.
그는 몸이 너무 허약하고 얼굴이 창백하여 사람들은 그가 얼마 살지 못하리라고 여길 정도였다. 그는 태어난 지 1년 남짓 만에 어머니를 여의어서 외할머니와 유모의 손에서 자랐고, 10세가 되던 1606년에 제수이트 교단이 설립한 콜레쥬 로얄 앙리르그랑에 입학하여 8년간 고전어ㆍ수사학ㆍ철학ㆍ역사ㆍ물리 등을 공부했다.
라 플레슈 학원에서는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몸이 허약했던 데카르트는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는 등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지 않게 되었고 데카르트는 침대에 누워 사색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는 그 학교 창설 이래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는 수학만이 명증(明證)적인 지식이라고 생각해 수학을 특히 좋아했고 틈틈이 무용ㆍ승마ㆍ펜싱도 배웠는데 펜싱의 실력은 상당했다고 한다.
라 플레쉬를 졸업한 후 1616년 뿌아띠에흐(Poitiers) 대학 법학과에 입학해 수학ㆍ자연 과학ㆍ법률학ㆍ스콜라 철학 등을 배우고, 1616년에 학사 학위[Licence: 리상스]를 취득했다.
“나는 글로 하는 공부를 완전히 그만두었다. 내 자신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지식이나, 세상이라는 큰 책에서 찾을 수 있는 지식 외에는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나의 청춘을 여러 곳을 여행하고, 궁정을 방문하고, 군대에 참가하며,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보냈다. 운명이 나에게 허락하는 모든 상황에서 나 자신을 시험했다.”
22세 되던 1618년에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으로부터 실질적인 지식을 얻고자 학교 밖으로 나갔으며 여행이 일반화되어 있지 못하던 당시로써는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이러한 탐구여행을 하기 위해, 오랑쥬의 왕자이며 사관학교 교장인 모리스드 낫소의 명령으로 지원병이 되어 네덜란드에 가게 되었으며 다시는 제도권 교육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네덜란드에서 그는 의학자이자 수학자인 이삭 베크만(I. Beeckman)을 만나 교류하면서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또 네덜란드를 여행하면서 첫 작품 짧은 《음악 개론(Compendium Musicae)》을 써서 베크만에게 헌정하였다.
1618년에 30년 전쟁[1618∼1648년 독일을 무대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이 일어나자 독일에 출정하였다. 이어 독일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군대에 들어갔고 그해 11월 프랑크푸르트에서 거행된 페르디난드 2세의 대관식을 관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독일 남부를 여행하던 중 11월 10일 울름 근교의 한 여관 난로 가에 앉아서 명상에 빠졌다가 3번이나 연달아 꿈을 꾸게 된다.
그 꿈은 자신의 삶의 길을 확고하게 밝혀 주는 황홀한 것이었다. 그것은 자연법칙과 수학법칙의 근본적 일치를 알리는 직관이었다. 그는 학문 중에서 수학만이 확실한 것으로 철학도 수학과 같이 분명하고 명확히 드러나는 진리를 출발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로 인해 그는 기존의 모든 지식을 의심하였는데, 그리하여 도달한 최후의 의심할 수 없는 결론적인 명제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기토 엘고 썸)." 이다. 전능한 악마가 인간을 속이려 한다고 해도, 악마가 속이려면 생각하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제일철학을 위한 성찰'에 나와 있다.)
그는 이것이 철학의 근본 기초라고 설명하였다. 이때 고안된 방법은 1628년에 저술하다 중단된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과 《방법서설》 제2부의 내용을 이룬다.
이 명제는 근대 철학을 대표하는 명제이며,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은 이 명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특히 데카르트가 사용한 관념이라는 개념은 칸트와 같은 철학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방법은 저서 《방법서설》에 잘 나타나 있다.
데카르트는 본유관념과 인위관념, 외래관념을 구분하였다. 여기서 외래관념은 밖에서 오는 관념을 말하고 인위관념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하며, 본유관념은 태어나면서 부터 존재하는 관념을 말한다. 본유관념은 '삼각형의 꼭지 점은 세 개이다.'ㆍ'정육면체의 면은 여섯 개이다.'ㆍ'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두 평행선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와 같은 것으로, 언제나 확실하게 참인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말한다.
덧붙여 데카르트는 신의 관념도 확실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존재론적 증명을 통하여 신이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론적 증명은 나중에 칸트의 비판을 받았다.
데카르트는 주체와 대상을 일치시키려 실체를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바로 [연장]과 [사유]이다. 연장은 구체적인 부피와 같은 공간을 차지하는 실체를 말하고, 사유는 연장과 달리 부피와 같은 것이 없는 실체를 말한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연장과 사유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사유는 몸을 제어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몸과 사유를 이어주는 부분을 뇌의 송과선(松科腺)으로 보았는데, 데카르트 이후 철학자들은 이 송과선을 몸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데카르트는 여기서 삶의 목표를 학문에 두기로 결심하였다.
데카르트는 울름에서 진리의 인식을 위해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기 위한 규칙과 완전한 도덕학을 수립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지도할 잠정적인 도덕규칙을 마련한 후, 다시 9년 동안 세상에 대한 견문을 넓히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동안 그는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로 여행하다가 1628년에 여러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고 한적한 사색의 시간을 갖기 위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여 이후 20년 동안 거주하게 된다.
1620년 제대하고 북부 독일 네덜란드 등지로 여행을 하다가 1622년 고향으로 되돌아와 가족들과 재회하고 자기의 계획을 정리한 뒤 독립된 생활을 영위할 충분한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리고 1625년까지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이어 고국으로 돌아와 1626년부터 파리에서 수학·자연 과학, 특히 광학을 연구하였다.
1627년 샹두의 강연회에서 그는 확실한 지식에로 가는 확실한 인식 방법은 새로운 철학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강연회에 참석했던 베줄르 추기경은 그에게 새로운 개혁에 필요한 천재성이 있음을 격려했다. 이에 힘을 얻은 그는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철학의 개조와 물리학과 형이상학의 새로운 정립을 시도하게 되었다.
1627년에 다시 종군한 후, 1628년 단편 <정신 지도의 법칙>을 집필, 자신의 방법론 체계를 세우려 하였다. 1628년 겨울에 데카르트는 철학적 사유보다 속물적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불어 일으키는,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 밑에 있는 프랑스를 떠나, 자기 일에만 몰두하며 질서와 부유함 건강한 사상과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가 지배적인 네덜란드로 이주해 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를 찾으려 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진리가 아닌 것들을 소거하는 것인데, 데카르트는 확실한 진리를 찾으려 불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감각도 배제했는데, 이는 감각도 반드시 맞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 암스테르담ㆍ하아렘ㆍ에그몬드 등의 도시로 여러 차례 거주지를 옮기면서 더러는 개인 교사로 혹은 은둔 학자로 생활을 했다.
1635년 그는 아마도 그의 하녀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엘레느와의 사이에서 프랑신느라는 딸이 태어났다. 그러나 딸은 5살 때 죽어 데카르트에게 말할 수 없는 상심을 주었다.
이 시기(1630년 - 1633년)에 자연과학에 관한 책 《세계와 빛에 관한 논고》를 집필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 책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주장한 지동설을 바탕으로 세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진술했다. 그가 이 책의 간행을 위해 여러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을 때 갈릴레오가 지동설의 주장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소식을 들었으므로 일단 출판을 뒤로 미루었다.
1637년에 그는 《방법서설》을 출판했다. 그리고 존재론과 인식론 문제에 몰두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 관한 연구 결과는 1641년 《제1 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후에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판하게 된다. 그 외에 《성찰》 《철학의 원리》 《정념론》 등도 네덜란드에 약 20년간 머물러 있는 동안에 저술한 것이다.
그의 기계적 우주관은 18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수학에 있어서는 해석 기하학을 창시하여 근대 수학의 길을 열어놓았다.
1642년경부터 데카르트는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일련의 저작에서 데카르트가 보여준 철학적 성찰은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신학의 기반을 뒤흔들만한 혁신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고, 네덜란드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공공연하게 데카르트를 비난했다.
유트레히트 대학교의 총장인 보에시우스 신부는 데카르트를 무신론자라고 맹렬히 비난했으며 레이드 대학에서는 그에 대한 공식 규탄대회가 열리는가 하면 사법 기관에 고소까지 당하자 소심하고 겁이 많았던 데카르트는 자신과 자기의 저작물에 위해가 있을까 두려워 그의 의기는 크게 위축되었다.
1643년부터 보헤미아 팔라티나 선제후의 딸로 지성적이면서도 미녀인 엘리자베스와 서신을 교환하기 시작핷다. 그녀의 아버지가 패전하여 몰락한 왕가의 유배된 공주인 엘리자베스는 우울한 생애를 보내면서 서로 신뢰를 쌓ㅇ라가고 있던 데카르트를 자신의 정신적 물질적인 후원자로 여기고 진심으로 좋아했으므로 그들은 많은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이에 자극을 받은 데카르트는 윤리학과 심리학적인 문제에 몰두하게 되고 엘리자베스의 요청으로 《정념론》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1649년에 출간한다.
1649년에 데카르트의 철학을 무척이나 좋아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이 해군 제독과 배를 보내어 그를 측근에 모시고 싶다면서 초대하자, 데카르트는 여러 차례의 사양 끝에 그해 가을에 스톡홀름으로 가서 여왕의 철학교사가 된다.
여왕에게 철학을 강의하고, 아카데미 창립에도 관여하였으나, 원래 몸이 약했던 데카르트는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고된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고 폐렴에 걸려, 스웨덴에 간 다음 해인 1650년 2월 11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그가 모든 학문의 궁극적 목적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던 윤리학적 저술은 실현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연보]
1596년 [0세] 3월 31일 뚜렌의 라에이(La haye)에서 출생
1606년 [10세] 라 플레슈의 제수이트(예수회) 고등학교에서 수학
1614년 [15세] 라 플레슈 고교 졸업, 프와티에 대학에 진학. 법학과 의학을 배움
1616년 [20세] 법학사 학위 받음
1618년 [22세] 입영을 위해 네덜란드로 가서 입대
1619년 [23세] 네덜란드를 떠나 덴마크와 독일 북부에서 군 생활을 함. 그해 4월 페르디낭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
1620년 [24세] 북부 독일, 네덜란드로 여행을 하기 위해 제대.
1622년 [26세] 프랑스에 돌아옴
1623년 [26세] 이탈리아 여행
1619년 [23세] 울름의 난로 있는 병영에서의 사색
1620년 [24세] 1628까지 의심스러운 견해를 떨쳐버리기 위해 세상견문여행에 떠남
1628년 [32세] 한적한 장소를 찾아 네덜란드로 이주 (1649년까지 20년 간 거주),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 들〉 집필
1629년 [] 네덜란드 이주 직후 기존 견해를 허물고 재구축하는 작업 수행 (《방법서설》 4부 및 《성찰》에 해당 하는 사색 수행)
1633년 [] 〈빛과 세계에 대한 논고〉 저술
1634년 [38세] 전 해[1633년]에 갈릴레이가 지동설로 유죄판결을 받았음에 자극을 받아 〈빛과 세계에 대한 논고〉 출판을 포기
1635년 [39세] 하녀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딸 프랑신느의 영세. 《방법서설》저술. 방법 (1, 2부), 《성찰》 내 용 (4부), 자연학 탐구 (5부) 포함.
1636년 [40세] 《방법서설》출간
1640년 [44세] 《성찰》 집필 9월에 딸 프랑신느 죽음. 12월 아버지 죽음.
1641년 [45세] 《성찰》출판
1642년 [46세] 유트레이트 대학에서의 데카르트 철학 강의가 중단됨
1643년 [47세] 엘리자베스 공주와의 친교가 시작됨.
1644년 [48세] 《철학의 원리》집필 간행
1645년 [49세] 겨울부터 《정념론》을 집필하기 시작
1647년 [51세] 레이드 대학으로부터 이교도라는 비난을 받음. 파스칼과 회담. 프링스 국왕의 연금을 받음.
1648년 [52세] 프랑스 여행. 《인간론》을 완성
1649년 [53세] 2월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대로 스웨덴에 가 그녀의 개인교사가 됨 11월 《정념론》 출간
1650년 [54세] 스웨덴에서 폐렴으로 사망
1669년 그의 유해가 프랑스로 이장되어 생 즈느에브 드 몽에 안장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