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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무경 Apr 12. 2024

철인 열전 [10] 철학자들의 에피소드

❸칸트 소크라테스 스피노자 

칸트

 

♣ 시간 맞추기     

칸트는 그의 고향 밖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는 80평생을 고향에서만 살았다.      

그가 회색의 연미복을 걸치고 스페인식 등나무 지팡이를 짚은 채, 후세에 그를 기념하여 "철학자의 보리수 길"이라고 이름지은 동네 산책로를 걸어나갔다. 비가 올 염려가 있을 때에는 노복(老僕)인 람페가 큰 우산을 옆에 끼고 터벅터벅 주인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시간이 3시 반이라는 것을 알고 잘못 맞추어진 시계의 바늘을 바로 잡았다고 한다.

          

♣ 그리인과의 언쟁     

어느 날 오후 칸트가 공원 안을 산보하다가 낯선 사람 2 ~3인과 담화하는 자기 친지를 보고 그 담화에 참여하게 되었다.      

화제가 미국 독립전쟁에 이르렀는데 칸트는 미국인의 정당성을 동정적으로 변호하고 영국의 죠지 3세의 정책을 풍자적으로 비난하였다.      

그러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갑자기 

"나는 영국인이다. 지금 당신이 한 말은 나에게 뿐만 아니라 전 영국인에 대한 모욕이다. 결투를 해서라도 명예를 회복하지 않을 수 없다."

면서 칸트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칸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상의 사상과 의견부터 설명한 다음, 이러한 세계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세계 시민의 한 사람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애국심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도도하게 웅변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영국인(이름은 그리인(J. Green)으로 상인이었다)은 아주 탄복하여 칸트의 고매한 사상에 찬성을 표하며 자기의 흥분을 사과했고 그 뒤에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칸트는 그에게 순수이성비판의 문장들을 보여주고 그의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 혼자 차를 마시는 칸트     

칸트는 한 때 그의 천거로 대학 조교가 되기도 했던 봐지안스키(Wasianski)를 그의 가사 및 재산관리인으로 채용했는데 그는 노경에 달한 칸트의 위안이 되기도 했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하루는 봐지안스키가 새로 들어온 사환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해주려고 일찍 칸트를 방문했는데 마침 티타임이었으므로 칸트는 그를 반갑게 맞아 차를 대접했다. 


그런데 막상 봐지안스키가 차를 마시려고 마주 앉게 되자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50년 동안 아침에 혼자서만 차를 마셔왔네. 오늘 아침에는 둘이서 마시게 되니 어째 차가 마셔지지 않을 것 같으니 대단히 미안한 말이나 자네는 저쪽 방에 가서 마시기 바라네."     

하고는 봐지안스키가 그 방으로 가자 그때서야 차를 마시므로써 그날 아침에도 혼자 차를 마시는 전통(?)을 충실히 지켰다고.

 

소크라테스

♣물벼락을 맞은 소크라테스

하루는 집에서 제자들과 강론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잔소리를 하였다. 이때 그가 들은 척 만 척하자 아내는 큰소리로 욕을 하고 물을 퍼부었다. 그런데도 소크라테스는 태연히 "천둥이 친 다음에는 소나기가 오는 법이지 !" 라고 말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

그녀는 심지어 남편을 뒤쫓아가서 시장 한복판에서 옷을 마구 잡아당겨 찢기도 했다 소크라레스의 친구들은 크산티폐를 어떤 아내보다도 가장 견뎌내기 힘든 여편네라고 비난했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은 그러한 일을 잘도 참아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은 아내의 잔소리를 어떻게 견디어냅니까?'라고 묻자, 그는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괴로울 것이 없지요!"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크산티페를 잘 견뎌내면 다른 사람들과는 쉽게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하여 악처와의 생활이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고 여길 정도였다.


♣천하 장사

소크라테스는 건강한 신체와 더불어 대단한 인내력을 가지고 있었다. 건강을 위해서 그는 체조를 열심히 하였을 뿐 아니라 춤도 열성적으로 추었다고 한다. 뛰어난 신체를 가진 소크라테스는 참을성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했던 모양이다.      

그가 졸병으로 참가했던 전쟁터에서의 일이다. 혹독한 겨을 날씨에 다른 사람들이 옷을 두껍게 껴입고 나갈 때 그는 맨발로 얼음위를 걸어갔다. 한번은 그 주위의 모든 동료가 미친 듯이 도망칠 때에도 그는 유일하게 남은 졸병으로 장군과 더불어 우군과 적군을 둘러보며 태연하게 걸어 나갈 정도였다.


알키비아데스는 동료 참전 군인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일을 들었다고 전한다.     

 '한번은 이른 아침부터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겨서 한자리에 줄곧 서 있었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이 되지 않는지 그 자리를 뜨지 않고 깊은 사색을 하면서 서 있더군요. 정오가 되었지요. 이제는 여러 사람들의 눈에 띄었고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며 서로 수군거렸지요.  

    

마침내 저녁이 되자 몇몇 이오니아 출신 병사들이 식사를 마치고 ―그때는 여름이었으므로― 침구를 가지고 나와 밖에서 자기로 했습니다. 그 이유는 소크라레스가 밤새 거기 서 있을지 지켜보기 위해서였지요. 그는 선 채로 밤을 지새웠답니다. 여명이 밝아오고 해가 떠올랐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태양을 향해 기도를 드린 후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


스피노자

♣ 제자에게 일격을 가하다.     

스피노자는 1670년 <신학정치론(神學政治論)>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출판되자마자 금서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책을 의학논문, 혹은 사화(史話) 등으로 위장되어 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에 신학자, 종교 당국 등으로부터 무수한 반박서가 쓰여졌는데 어떤 사람은 스피노자를 가리켜 "지금까지 지구의 표면에 산 무신론자 가운데 가장 불경한 무신론자"라고까지 비난했다. 

전에 스피노자의 제자였던 아르베즈크 불그라는 사람은 스피노자를 개심시키려고 그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선생님은 마침내 참된 철학을 발견했다고 믿고 계시지만 선생님의 철학이 이 세상에서 일찌기 가르쳤고 현재 가르치는, 또한 금후 가르칠 모든 철학 중에 최상의 철학임을 어떻게 아십니까? 장차 올 철학은 고사하고 선생님은 당지에서, 인도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고금의 철학을 모두 검토해 보셨습니까?


가령 선생님이 그것을 충분히 검토해 보셨다 할지라도 어떻게 선생님이 최상의 철학을 선택한 줄 아십니까?  

..........어떻게 선생님 자신을 모든 교부(敎父); 예언자; 사도; 순교자; 교회 박사 및 고해 신부 위에 감히 놓을 수 있습니까? 벌레와 마찬가지로 불쌍한 지상의 인간일 뿐만 아니라 얼마 안 가서는 죽어 구더기의 먹이가 될 선생님이 어떻게 영원한 지혜에 대하여 말하기조차 무서운 불경스러운 언행으로 맞서려 하십니까? 


어떠한 근거를 이 무분별하고 엉뚱하며 한탄스럽게 저주받은 학설에 가지고 계십니까? 악마같은 어떤 자부(自負)가 카톨릭의 교도자(敎導者)들까지도 터득하기 어렵다고 언명하고 있는 신비에 판단을 내릴만큼 선생님을 득의케 하는 것일까요?..............."(휘문출판사 간 최혁순 역 윌  듀란트의 <영원한 사상의 발자취>에서)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러한 답장을 보냈다.     

"군은 마침내 최상의 종교를, 혹은 오히려 최상의 교사들을 얻은 줄 알고, 그들의 덕택으로 경신(輕信)의 성질이 굳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군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일찌기 가르쳤고 현재 가르치는, 또한 금후 가르칠 모든 교사들 중에 최상의 교사임을 어떻게 아느냐? 


군은 당지에서, 인도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고금의 종교를 모두 검토해 보았느냐? 가령 군이 그것을 충분히 검토해 보았다 할지라도 어떻게 군이 최상의 종교를 선택한 줄 아느냐?" (휘문출판사 간 최혁순 역 윌  듀란트의 <영원한 사상의 발자취>에서. 단 과장을 위해 약간의 문장을 수정함)



디오게네스  

견유학파(犬儒學派: 개 같이 살고있는 선비의 학파: Kynikos)의 가장 유명한 철인   

  

♣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드로스     

견유학파는 가급적이면 이 세상에서 아무런 외물(外物)의 속박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최상의 행복으로 여겼다. 그래서 집도 필요없다고 여겨 간신히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정도의 조그마한 통 하나에 의지하고 이 통을 이리 저리 필요한 곳으로 굴리고 다니면서 대단히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마케도니아의 왕인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 전역의 장군이 되어 페르시아를 공격하려 출병하기에 앞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서 축하의 말을 했는데 알렉산드로스의 장군 취임이고 뭐고 그러한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것디오게네스는 그를 찾아와 인사의 말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대철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그 자신도 철학에 대해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디오게네스가 인사하러 오지 않은 것을 노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찾아가 보려 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몇 명의 부하를 대동하고 디오게네스가 살고 있는 테베시 교외의 크라네이움을 찾아갔을 때 디오게네스는 마침 통 안에 누워 했볕을 쪼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자 디오게네스가 일어나 알렉산드로스를 쳐다보았다. 

     

알렉산드로스가 자기 소개를 하고는 소원을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했더니 디오게네스는      

" 소원이요? 있습니다. 한 편으로 좀 비켜 주셨으면 햇볕이 가려지지 않아서 좋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다른 아무 것도 원하는 것이 없고 오직 지금은 햇볕을 쪼이는 것만이 소원이라는 의미였다.      

거의 예외없이 자신의 말이라면 머리를 조아리며 감읍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었으므로 알렉산드로스로서는 참으로 뜻밖의 대답이었다. 그리고는 자기를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데오게네스의 큰 도량에 탄복하고 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신하들이 들어준다는 소원도 거절해버린 디오게네스를 조소하는 말을 하자 알렉산드로스는 

"여러분들은 다르게 생각하지만 내가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소."     

하고 말했다. 즉 자신이 지금 전 그리스 군의 장군인 알렉산드로스로 살고 있지만 만약에 다른 운명이 주어진다면 디오게네스처럼 살았을 것이라는 뜻이었다(풀루타크 영웅전).


♣ 그림 속의 무화과 나무     

어떤 사람이 디오게네스에게      

" 어떤 책을 썼는가?"     

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는 진짜 무화과보다 그림 속의 무화과가 더 좋은가?" 

    

♣ 그가 한 번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 사람이 없느냐?" 고 외치며 다녔다고 한다. 

     

♣ 플라톤이 사람이란 두 발로 걷는 몸에 털이 없는 존재이다라고 정의하자 사람들이 그 정의에 감탄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닭을 잡아 그 털을 다 뜯은 다음에 내던지면서 플라톤이 말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고 했다.


탈레스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 하늘을 관찰하다가 개울에 빠진 철학자.

탈레스가 길을 걸어가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천문을 연구하던 중에 잘못하여 개울에 빠지고 말았다. 개울 가에서 빨래를 하던 처녀가 그것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자기 발 아래도 보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하늘을 보겠다는지 모르겠군."   

       

♣ 올리브의 풍년

탈레스가 어느 해에 천기를 살펴보니 그 해에는 올리브가 풍작을 이룰 것으로 관측되었다. 그런데 그 전해에 올리브의 흉작으로 큰 손해를 본 방앗간 주인들은 방앗간을 헐값에 팔려고 안달이었으므로 탈레스는 그것들을 헐값에 사들였다.    

  

과연 탈레스가 예측한 대로 그 해에 올리브가 풍작을 이루어 방앗간이 미어 터질 지경이 되고 탈레스는 거액의 돈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엠페도클레스     

4원소설을 주장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 에트나(Etna) 화산에 몸을 던져 죽다.     

엠페도클레스는 항상 자신이 부정(不淨) 때문에 천계에서 쫒겨난 신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이 세상이 흙; 물; 불; 바람의 4원소로 되어 있다고 믿었는데 이 원소들은 사랑(philia)과 미움(neikos)에 의해 결합되거나 분리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는 가장 숭고하고 장렬한 모습으로 신과의 합일을 기하기 위해 에트나 화산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확인할 수 없는 일화를 지니고 있다.          


♣ 왕위 제의를 거절하다     

그는 시실리 태생인데 시; 변론; 정치; 의술 등 다방면에 재능이 뛰어난데다가 예언자로서도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고향에서 데모크라시를 위해 싸운 공적으로 민중들이 그를 왕위에 나가도록 제의했으나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학원사 간 《철학대사전》; 이마미찌 도모노부의 《愛論》 白琪洙 역 참조 작성.



존 스트워드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하고 자유론을 쓴 영국의 철학자


 ♣ 아버지에게 조기 교육을 받다     

밀의 아버지인 제임스 밀은 아들을 일류 학자로 키우려고 어려서 부터 엄격한 조기 교육을 실시했다. 밀이 3살 때 그리스어를, 8살 때에 라틴어를 가르치고 13세 때 리카르도의 " 경제학과 과세의 원리를 가르쳤을 정도였다.      

부자(父子)는 자주 아침 산책을 하곤 했는데 이때 아들은 아버지에게 전날 읽은 내용을 보고하고 아버지가 내는 여러 가지 문제를 풀어야 했다.  만일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 때에는 아버지가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으므로 아들은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한다. 

          

♣유부녀 하리엣 테일러와의 교제     

밀의 나이 25세 되던 1830년의 어느 날 그는 실업가인 존 테일러의 초대로 그의 집에 갔다가 그 부인인 23세의 하리엣 테일러를 소개받게 되었다. 학문과 예술 방면에도 나무랄 데 없는 우수한 재예를 지니고 있던 하리엣은 밀에게 더할 나위없는 이상적인 여성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열렬히 사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부와의 연애 관계는 많은 물의를 일으킬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밀은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도 정작 당사자들은 대단히 침착하게 서로의 감정을 억제해 심한 추문이 되지 않았다. 그 후 1836년 밀이 건강을 해쳐 파리로 요양을 떠나게 되었을 때에 하리엣은 남편의 허락을 받고 그의 두 자녀와 함께 파리로 따라가서 밀을 간호해 주었다.   

   

1849년 하리엣의 남편인 존 테일러가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하리엣과 밀의 교제는 계속되었는데 두 사람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그 2년후, 그들이 알게 된지 20여년이 지난 1851년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을 하기에 이르렀고 밀에 대한 그녀의 비길 데 없는 덕성에 의한 내조로 밀의 저술 활동과 생애는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밀의 여러 저작은 그녀와의 공동 저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는 것이다.  


헤겔

♣ 10 여권 중 자신이 직접 원고를 쓴(?) 책은 2권 밖에 없는 철학자     

헤겔은 10 여권의 책을 썼으나 그가 그 저술들을 위해 원고를 직접 쓴 것은 <논리학>과 <정신현상학>  2권 밖에 없었다. 

그는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듣고 베낀 노트를 얻어다가 출판업자에게 넘겨 책을 만들었다. 

그가 쓴 책이 학계의 화제가 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읽히고 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다. 그러나 그 한 사람까지도 정말로 나를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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