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무경 Apr 12. 2024

철인 열전
[1] 칸트❷

 ❷칸트의 사상

• 

[1] 칸트 

❷칸트의 사상

   

[인식론]   ❰순수 이성 비판❱  

칸트는 철학사상 철학의 여러 부문 전반에 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 단초는 인식론에 있다. 인식론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물을 아는 일, 즉 지식을 형성하는 근본 원리와 그 가능성을 검토하는 일이다. 참된 지식을 우리는 보통 《진리》라고 부르는데 이 진리라는 것이 과연 사실로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과연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지를 합리적으로 해명하고 파악하려는 것이 인식론이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경험)  자체가 이 세상의 사실 그 자체인 줄로 아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예로부터 "신(神)"이 있다고 생각했고 신이 인간의 운명에 깊숙히 관여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동서남북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지식(?)에 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에 관한 주장이  달라 서로 상반되고 모순되는 경우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말하는 신의 개념이 타당할까? 뿐만 아니라 신은 과연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에 불과한가요?        

   

[인식론의 계보]     

18세기에 들어서서 경험론과 합리론은 각각의 주장을 펴며 자신들의 견해에 의해서만이 진리를 알 수 있다고 다투게 된다. 

로크. 흄 등의 영국 경험론자들은 인식론에서 지식의 근거는 경험에 있으므로 우리의 지식은 개연적이며,상대적이라고주장하고, 데카르트, 라이프니쯔, 볼프 등의 대륙 합리론자들은 시공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사물의 현상(現象)을 경험하는 것은 참된 지식이 아니며, 이성에 의해서만 참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인식론]     

이러한 와중에서 칸트는 인간의 인식이라는 것이 단순히 경험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합리적 사유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편다. 칸트에 의하면 진리의 인식은 인간의 이성 능력(이러한 측면의 이성을 칸트는 오성이라고 부릅니다)에서 형성되는 사물에 대한 개념과, 이 개념을 채울 수 있는 직관이라는 감성적(경험적) 인식 내용이 더해져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여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을 융합시켰다. 이를 표현하는 유명한 칸트의 명제가 있다. 곧


"개념 없는 직관(直觀)은 맹목이요,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공간은 대상을 받아들이는 '선천적인 직관'이며, 시간은 주어진 대상을 마음속에 지속시키는 인식 조건이다. 그러나 감성에는 오직 현상(Erscheinung)만이 주어진다. 우리는 현상 배후에 있는 물자체 또는 본체계(noumena)를 알 수 없다. 공간과 시간에는 물자체의 세계가 표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외감의 형식'(外感의 形式)으로서 공간과 '내감의 형식'(內感의 形式)으로서 시간은 오직 현상의 수용작용(受容作用)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공간과 시간이라는 순수직관을 통해 받아들여진 대상은 오성에 의해 개념화된다. 그리하여 그것을 오성이 사유하고 판단한다.  그래서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며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예를 들어보자. 

어기 꽃이 피어있다. 우리는 이 꽃의 여러가지 현상, 곧 꽃의 모양과 색깔 • 냄새 등을 감성을 통해 공간과 시간 속에서 직관을 통해 느낀다. 그러나 이런 직관으로는 꽃이 무엇인지? 말하자면 개념을 알아내지믐 못한다.


  개념을 알아네는 일은 직관이 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이 하기 때문이다. 지성은 꽃을 여러 범주[칸트는 이 범주가 12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에 비춰어보면서 이꽃이 무엇인가를 알아낸다. 이 꽃을 안다, 곧 인식한다는 것은 꽃에 대한 감각, 곧 직관만으로 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지성만으로 알아낼 수도 없다. 


곧 감성적 직관과 지성에 의한 재념 파악이 같이 협력해야만 꽃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는지 꽃에 관해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는 말이다. 꽃에 관한 개념은 알고 있는데 꽃의 현상을 전혀 모른다면 그 개념은  공허하다,


 곧 실질이 없는 허깨비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꽃에 관한 현상은 아는데 꽃이 무엇인지 그 개념을 모른다면 이 또한 맹목적인 인식, 반쪽자리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 


인식은 언제나 감성과 오성의 종합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자발적(自發的)으로 활동하는 오성의 주된 작용은 판단과 추론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오성의 범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칸트 [Kant, Immanuel] (철학사전) 


또한 감각을 통하여 대상을 경험할 수만 있다면 지식이 된다고 믿었던 종래의 상식적인 인식론을 깨뜨리고 오히려 대상이 인식의 주체인 이성의 주체적 능력에 따라서 파악된다고 주장, 소위 코페르니쿠스의 전회를 이룩했다.       


이리하여 우리는 절대적으로 보편타당한 지식을 얻으나 주관적; 객관적; 그리고 이의 총합적인 최고의 이념, 즉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인 영혼; 세계; 신의 개념은 사유할 수는 있으나 인식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이로써 그의 비판철학 시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우리의 이성에 의해 분명한 개념을 정립할 수는 있으나 그 직관적 내용을 전혀 채울 수 없는 근본적인 개념(칸트는 이를 이념이라고 한다)이 3가지 있다. 절대적 객체로서의 자연과 절대적 주체로서의 영혼 및 이 양자를 결합한 개념으로서의 최고의 종합적 존재인 이 그러한 이념들이다. 그는 이들 3가지의 이념을 특히 《물자체(物自體)》라고 부른다.     

     

[칸트의 윤리학] ❰실천 이성 비판❱ 

칸트는 윤리학에서도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성과를 거뒀다. 종전의 윤리는 무엇이 옳다 그르다(정사: 正邪)는 것에 관해 치밀하고 엄정한 이론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막연한 관습이나 종교에서 지시하거나 금기하는 것에 따라서 정사선악을 판정했다. 


그런데 칸트는 이를 확고한 이론 체계 위에 정초시키려고 기도했으며 거의 완벽한 결론(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약 80% 정도의)을 내렸다. 그는 이 결론을 3개의 격률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해 놓았다(아래의 격률 번역 문장은 최재희씨의 글임. 단 재희씨는 격률을 표식(表式)이라고 부름).  

    

1).[보편성에 착안한 격률] 준칙(準則: 개인들이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어떤 규칙)이 보편적 법칙(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따라야 할 규칙)이 되는 것을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준칙에 의해서 행위하라.     

※ 이 준칙을 풀어서 설명한 것을 전형(典型:  Typus)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네가 하고자 하는 행위가 너 자신도 그 일부인 자연 법칙에 따라서 생긴다면 그런 행위를 너의 의지에 의해서 가능한 것으로 네가 과연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자문해 보라.     


위의 명제는 절대론적 윤리설 전체의 견해가 아니라 그 대표적 견해인 칸트의 도덕률이다.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위의 명제의 대략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네 의지의 준칙: 이것은 행동하려는 개개인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스스로 정하는 도덕적 행위의 원칙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내가 행위하기 위한 하나의 원칙을 이렇게 정한다고 생각해 보자.      

" 나는 내 마음만 내키면 남을 때려도 좋다는 원칙을 정하겠다."     

이제 〈 내 의지(즉 내 의지)의 준칙 〉을 하나 정했다. 

     

②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 자기가 세운 위의 원칙이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모두 통용되는( 곧 보편적으로 법칙으로 통용되는) 원리가 된다고 생각해 보자. 


이 원칙(즉 마음만 내키면 남을 때린다)이 언제 어디에서나, 또 누구에게나 모두 통용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마음이 내키면 나를 때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곧 내가 남을 때릴 수 있다는 법칙이 보편적으로 시행되면 나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그들의 마음이 내키는데  따라서  맞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곧 사회 전체가 누구든지 제 마음대로 남을 때릴 수 있는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내 자신이 그러한 행동의 피해자가 되어도 좋다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만약에 그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칸트에 의하면) 그러한 원칙을 세워서 행위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나는 내 마음이 내키는대로 남을 때려도 좋지만, 다른 사람이 제 마음이 내킨다고 나를 때리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원칙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으며 이러한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도덕설이다.  

    

다만 칸트는 또 다른 원리로, 

2).[주체성에 착안한 격률] 네 인격과 모든 남의 인격 중의 인간성을 네가 한갓 수단으로서만 대우하지 말고 동시에 목적 자체로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    

  

3).[종합에 착안한 격률]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언제나 입법적(제 법 세우기)이라고 보아야 한다.  

인간은 목적적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인간을 자기의 수단적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편다.


 곧 이 두 번째 원리에 의하면 남을 때리는 것은 남을 자기의 화풀이의 대상으로 삼는다든가 심심풀이 상대로 삼는다든가 등등, 자기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 되므로,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불가능하다(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선의지의 선성]

칸트는 이 세계에서 오직 선한 것은 선성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에게 아무리 좋아보이는 품성들― 용감성 결단력 영리함 등―이 있다고 해도 착한 마음이 없다면 그런 품성들이 오히려 악용될 수 잇다고 지적했다. 용감한 사람에게 착한 마음씨 대신 악한 마음씨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용감하게 악하여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용감하지 않은 악한보다 더 끔찍할 것이다.


[기타]     

칸트는 이처럼 ❰순수 이성 비판❱에서 인식론을, 그리고 ❰실천 이성 비판❱에서 윤리학을 전개한 뒤에 ❰판단력 비판❱이라는 책에서는 인간의 목적의식과 예술론(미학)을 피력하는데 이 역시 고도의 성공을 거둔다(물론 현대에 칸트를 비판하는 학자들이 칸트의 이론보다 훨씬 질 낮은 다른 이론들을 양산하면서 칸트를 비판하고는 있으나).          


[칸트에 대한 느낌]

나로서는 치밀하고 체계적인 이론과 그 취급하는 내용의 방대함과 다양함, 결론의 정확도, 후세에 끼친 영향력 등에서 역사상 칸트를 능가할 철학자는 전혀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