❶생애와 업적
[1] 칸트 Immanuel Kant 계몽주의 시대 독일의 대 철학자. [1724. 4. 22. -1804].
❶생애와 업적
❷이론
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대륙 합리론과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시작된 영국 경험론을 종합하면서 철학적 사유의 새로운 한 시대를 열었으며 인식론ㆍ윤리학ㆍ미학에 걸친 종합적ㆍ체계적인 작업은 이후의 거의 모든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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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東)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발트 해(海)에 면해 있는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의 주도. 칼리닌그라드의 옛 이름]에서 마구공(馬具工)의 4째 아들로 태어나, 전 생애를 거기에서 보냈다.
자신이 스코틀랜드 이민의 자손이라고 믿는 그의 아버지는 32세 때에 18세의 어머니와 결혼한 뒤에 20년 동안 9남매를 낳았는데 4째가 칸트였으며 막내 남동생과 여동생 셋을 제외한 4명의 형제자매들은 요절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독일인으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타고난 인품과 지성으로 유명했다. 부모 모두 루터교 경건파의 독실한 신자였으며 칸트는 부모로부터 어떠한 야비한 언행을 듣거나 본 일이 없었다. 칸트는 항상 평정하고 쾌활하며 관용과 사랑, 근면과 정직한 부모님의 슬하에서 자랐다.
8세 때 담임목사이던 슐츠[Schultz]가 운영하는 경건주의 학교에 들어갔다. 라틴어를 가르치던 이 학교에서 8년 6개월 동안 배웠는데, 일생에 걸쳐 라틴어 고전을 좋아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 받은 교육 때문이었다.
칸트를 이따금씩 교외로 데리고 나가 자연을 접하도록 하고 천체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신의 진리를 일러주어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도록 한 어머니는, 그러나 불행히도 칸트가 13세 때에 40세의 한창 나이에 사망했다.
김나지움 재학 시절에 학급의 수석을 거의 놓치지 않은 칸트는 16세 때인 1740년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경건주의 학교 교장이었던 슐츠의 신학강의를 비롯해 고전문학 ㆍ철학ㆍ수학ㆍ생물학 등의 강의를 듣고 합리론 철학을 체계화시킨 크리스티안 볼프를 연구했다.
특히 크누첸(M. Knutzen) 교수는 칸트의 우수한 소질을 인정하여 그를 정성껏 지도했으며 훌륭한 장서가 많았던 자신의 서제의 책 가운데 칸트가 원하는 책을 모두 빌려주었으므로 칸트는 그의 평생의 사색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뉴턴의 책들을 순차로 읽을 수 있었다.
칸트가 대학을 미처 졸업하지도 못한 22세 때 아버지마저 사망했으므로 칸트는 학비 조달조차 여의치 못한 형편이었다.
원하는 학우들을 가르쳐 주고 약간의 보수를 받거나 유족했던 학우들의 도움도 받는 가운데 뒤에 재무부 참사관이 된 블레머(Wloemer), 학우인 칼렌버그(Kallenberg)의 숙소 제공과, 큰아버지인 구두 공장주 리치터(Richter) 등이 후원해 준 덕분에 다행히 졸업할 수 있었다.
칸트의 나이 23세인 1746년에 제출된 그의 졸업논문에는 청년 칸트의 기개가 보이는 이러한 구절이 적혀있다고 한다.
“뉴턴이나 라이프니츠의 권위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의 발견에 장애가 되는 것이라면 존중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걸어갈 길을 이미 정했다. 나는 그 길을 걸어가겠다. 아무도 나의 갈 길을 방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학교 졸업 후 그에게 바로 평탄한 길이 열렸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부속학교에서의 조교 직을 얻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1755년 그의 나이 31세 때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불에 관해” 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모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그 해 가을에 구직논문인 “형이상학적 인식의 제1원리의 제 해석”이 통과되어 시간 강사가 되었으며 첫 강의로 수학과 물리학에 관한 것을 택했을 만큼 과학 발전에 대한 관심을 결코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기까지의 9년 동안 인근 지방을 이곳저곳 다니며 가정교사로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간 강사는 무급(無給)이었기 때문에 그 후에도 그의 생활은 넉넉하지 못해 쾨니히스베르크의 국립도서관의 부 서기관직에 취업하여 생활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교수직을 얻는 데 2번이나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1758년, 에를랑겐(Erlangen) 대학에서,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예나(Jena) 대학에서 그를 교수로 초빙했고 베를린대학교는 다른 곳에 비해 많은 특권을 부여하면서까지 시학 교수로 초빙했으나 그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그는 곤궁에 쫓겨, 망설이거나 좀 더 고상한 일에 대한 애착을 가질 여가도 없이 시간강사의 자격으로 수학ㆍ물리학ㆍ지문학(地文學)ㆍ논리학ㆍ인류학 등에 대해, 무거운 마치를 반복적으로 휘둘러 대는 듯한 중노동의 강의를 15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그의 지리학 강의는 유럽 대학 최초의 것이었으며 그는 평생 동안 지리학에 애착을 갖고 있었다.
시간강사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그의 학문에 대한 열의는 식을 줄을 몰랐다. 그는 몇 년 동안이나 인종ㆍ 바람의 본질ㆍ지진의 원인ㆍ천체에 대한 일반이론 등을 다룬 과학저작들을 다수 발간했으며 강사와 저술가로서 점점 큰 명성을 얻어나갔다.
수학과 물리학에서 시작된 강의는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었고 논리학ㆍ형이상학ㆍ도덕철학 등 철학의 주요 분야 및 자연지리학에 이르기까지 강의 주제가 넓어졌다.
글을 쓰는 스타일과 달리 강의는 유머와 박진감이 넘쳤으며, 영국ㆍ프랑스의 문학은 물론, 여행기와 지리학ㆍ과학과 철학 등 광범위한 독서에서 얻은 풍부한 실례를 들어 실감 있고 생기 있게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칸트는 뉴턴 물리학의 과학적 내용과 철학적 함축을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했다. 칸트는 뉴턴의 사유방법과 당시 볼프와 알렉산더 코틀리프ㆍ바움가르텐에 의해 체계화되고 대중화되어 독일대학에 널리 퍼져 있던 코틀리프ㆍ빌헬름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보았다.
뉴턴을 지지하고 라이프니츠를 비판했지만, 1750년대에는 라이프니츠 형이상학의 전제들에 관해 노골적으로 도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760년대에 들어서는 라이프니츠주의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점점 높여갔다. 어떤 제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칸트는 라이프니츠ㆍ볼프ㆍ바움가르텐을 공격하면서, 자신을 뉴턴의 추종자로 선언했고, 장 자크 루소의 도덕철학에 큰 찬사를 표했다고 한다.
라이프니츠 철학에 대한 칸트의 비판은 크게 두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우선 철학은 수학을 모델로 하여 자명한 전제들에 근거해서 증명된 진리의 체계를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라이프니츠주의 철학의 방법적 주장을 공격했다.
그리고 라이프니츠주의자의 핵심적인 이론들을 비판했다. 모순과 인과에 대한 논리주의적 입장ㆍ존재론적 신의 증명ㆍ공간개념 등이 주요한 비판의 쟁점이었다.
마침내 1770년 칸트는 이미 비판철학의 중요한 요소들을 많이 포함한 교수 취임논문이 통과됨으로써 15년간의 무급 대학 강사 생활을 마감하고 모교의 논리학ㆍ형이상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11년 동안 아무 글도 발표하지 않고 연구에 전념한 끝에 1781년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Kritik der reinen Vernunft》을 출간했다. 이로써 그의 비판철학 시기가 시작된다.
18세기에 들어서서 경험론과 합리론은 각각의 주장을 펴며 자신들의 견해에 의해서만이 진리를 알 수 있다고 다투게 된다. 로크ㆍ흄 등의 영국 경험론자들은 인식론에 있어서 지식의 근거는 경험에 있으므로 우리의 지식은 개연적이며 상대적이라고 주장하고, 데카르트ㆍ라이프니쯔,ㆍ볼프 등의 대륙 합리론자들은 시공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사물의 현상(現象)을 경험하는 것은 참된 지식이 아니며, 이성에 의해서만 참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간의 진리 인식이라는 것이 단순히 경험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합리적 사유에서 조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칸트에 의하면 진리의 인식은 인간의 이성 능력(이러한 측면의 이성을 칸트는 오성이라고 부름)에서 형성되는 사물에 대한 개념과, 이 개념을 채울 수 있는 직관이라는 감성적(경험적) 인식 능력인 직관의 내용이 더해져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을 융합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이를 표현하는 유명한 칸트의 명제가
"개념 없는 직관(直觀)은 맹목이요,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는 것이다.
또한 감각을 통하여 대상을 느끼기만 하면 지식이 된다고 믿었던 종래의 상식적인 인식론을 깨뜨리고 오히려 대상이 인식의 주체인 이성의 주체적 능력에 따라서 파악된다고 주장, 소위 코페르니쿠스의 전회를 이룩했다.
이리하여 우리는 절대적으로 보편타당한 지식을 얻으나 주관적ㆍ객관적, 그리고 이의 총합적인 최고의 이념, 즉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인 영혼ㆍ세계ㆍ신의 개념은 사유할 수 있을 뿐, 인식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칸트는 1788년에 발표한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批判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에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인식이 불가능한 대상으로 지목했던 신이나 자유의 개념이 우리의 실천적 필요에 의해서 요청(要請: Postulat)되어 무상명령(無上命令: Kategorischer Imperativ)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하면서 보편절대적인 도덕률을 정립한다.
종전의 윤리 도덕설들은 관습이나 종교에서 지시하거나 금기하는 것에 따라서 정사선악을 판정했던 막연한 것이었으나 칸트는 정사선악(正邪善惡)에 관해 치밀하고 엄정한 이론의 체계 위에 정초시키려고 기도했다.
그는 인간의 이성적 의지가 자유임을 밝히고 도덕의 3가지 준칙(準則: die Willensfreieiheit)을 도출해 내면서 순수이성에 대해 실천이성의 우위와 무조건적인 선은 선의지뿐임을 주장했다.
이처럼 《순수이성비판》에서 인식론을, 그리고 《실천이성비판》에서의 도덕학[윤리학] 전개로 명백하게 된 인식과 실천이라는 두 요소를 매개하고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장(場)의 구조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새로운 인간학적 철학을 종결짓고자 칸트가 구상된 것이 1790년에 발표한 제3의 비판서인 《판단력비판[判斷力批判 Kritik der Urteilskraft]》이다.
여기서 칸트는 미(美)와 유기체(有機體)의 인식이라는 측면 분석을 통해 목적론적 인식의 구조를 명백히 하고, 또한 목적론과 기계론의 관계라는, 일생의 과제이며 동시에 세기적 과제에 비판적 해결을 부여하여 스스로의 철학적 노력을 결말지은 것이다.
칸트의 철학은 3권의 비판서 간행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예나를 비롯한 몇 곳을 거점으로 하여 순식간에 전 독일의 대학ㆍ논단을 석권하였고, J. G. 피히테에서 G.W.F.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 철학의 선두 주자로서, 또 그 모태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 영향은 다시 영국ㆍ프랑스의 이상주의철학까지 미쳤으며, 특히 후일의 독일 신(新)칸트학파의 철학은 칸트의 비판주의의 직접계승을 지향한 것이었다. 또한 신칸트학파 퇴조 후에 나타난 수많은 철학 조류도 모두 직접ㆍ간접으로 칸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로와 명성 등에 의해 그는 1785년과 1788년 2회나 총장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1793년에 《단순한 이성의 범위 내에 있어서의 종교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ssen Vernunft》를 발표하여 미신적 요소가 많은 계시 종교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이성이 종교관을 피력함으로써 일시적인 함구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의 만년의 논문인 《영구 평화론[永久 平和論 Zum Ewigen Frleden: 1795]》은 국제연맹 사상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두 여성으로부터의 청혼이 있었으나 그녀들은 칸트가 냉정하게 심사숙고하면서 망설이는 동안을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떠나버렸다. 그는 하인을 두고 평생을 독신인 채 살았다.
칸트는 커피를 좋아하고 하루에 한 끼 식사만으로 견디면서도 요리의 감식에는 남다르게 예민하여 친구들에게 〈요리법 비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농담을 들을 만큼 예민했다고 한다,
탁월한 기억력과 상상력을 지녔던 이 거인도 나이를 피해 갈 수는 없었던지 노쇠로 인해 72세가 된 1796년 논리학을 최종 강의로 폐강할 수밖에 없었다.
칸트는 6피트도 채 안 되는 왜소하고 허약한 체질이었으나 그나마도 엄격한 규칙생활과 섭생 등으로 건강을 유지해 오다가 1804년 2월 12일 "좋다(Es ist gut)."는 말을 남기고 80세를 일기로 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