❶ 생애
독창적인 글도 아니고 알고 계신 분들도 많으시리라 믿지만 전에 네이버 철학 카페에 올렸더니 좋아하더군요 그래서 여기에도 한번 올려봅니다.
칸트의 인식론에서 출발하여 피히테, F.W.J. 셸링 등의 관념론적 철학자, 특히 헤겔을 격렬하게 공격했으나, 그 근본적 사상이나 체계의 구성은 같은 ‘독일 관념론’에 속하는 철학자.
의지의 형이상학을 주창한 생철학의 창시자인 쇼펜하우어는 흔히 '염세주의 철학자'로 불리며, 실존주의와 프로이트 심리학에 영향을 끼쳤다.
~~~~~~~~~~~~~~~~~~~~~~~~~~~~~~~~~~~
쇼펜하우어는 프로이센 단치히(지금의 폴란드 북중부 발트 해안의 항구도시 그단스크)에서 유전적으로 우울하고 성급하지만 자제력이 강하고 식견과 교양도 있는 부유한 상인 하인리히 플로리스 쇼펜하우어(Heinrich Floris Schopenhauer)와 시 의회 의원이기도 했으며 나중에 소설ㆍ수필ㆍ기행문 등을 써서 유명해진 요한나 트로지에너(Johanna Trosiener)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할아버지가 빌려 쓰던 슈투트호프 영지와 아버지의 저택이 있는 올리바 등의 시골에서 자연을 접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계몽주의 정신의 영향을 받아 공화정체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 하인리히는 폴란드 왕으로부터 받은 궁중고문관이라는 칭호도 사용하지 않았고 프로이센 왕이 제공하겠다는 자유 여권도 단호히 거절할 정도로 자유주의적이었다.
1793년 단치히가 프로이센에 병합되어 자치를 상실하게 되자 단치히의 몰락에 참을 수 없던 그의 아버지는 막대한 재산상의 손실을 무릅쓰고 5살이 된 쇼펜하우어, 여동생인 안델레(Andele) 등 4명의 가족을 이끌고 함부르크 자유도시로 이사했다.
아들에게 세계라는 책을 읽히겠다고 결심한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9살 때 프랑스 서북부, 대서양의 영국해협에 있는 르아브르[Le Havre: 센 강 하구 오른편]에 있는 그의 사업 동료에게 보냈다.
쇼펜하우어는 그 집 아들 안티메(Anthime)와 함께 한 가정교사 밑에서 배우면서 소년 시절의 황금기를 만끽하고 또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익힌 뒤 2년 만에 귀가,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
1800년 온 가족이 여행을 다녀온 뒤에 룽게(Runge) 박사가 운영하는 사립학교에 입학, 4년간의 교육을 받았다.
경건주의적 계몽주의 사상이 깃든 그 학교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그는 눈물의 계곡이라는 뜻도 들어있는 사악한 [이승[Jammertal]]은 없어져야 할 세상이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집안 대대로 전해져 온 상업에 혐오감을 느낀 쇼펜하우어는 룽게 학교를 졸업한 뒤에 학문을 배울 수 있는 인문학교로 가기를 희망했다.
학자는 배고픈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생각을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온갖 시도에도 효과가 없자 양친과 굉장한 여행을 하든가 남아서 라틴어를 배우든가 양자택일을 하도록 요구했다.
15세의 소년은 라틴어보다는 여행에 흥미가 더 끌렸으므로 이편을 선택하여 1803년 5월에 부모와 함께 벨기에ㆍ영국ㆍ프랑스ㆍ스위스ㆍ오스트리아 등을 여행했고 그 혼자 영국에 잔류했던 3 개월 동안에 그는 영어를 완전히 마스터한 뒤에 일가와 다시 합류하여 여행을 계속하다가 2년 뒤인 1805년 귀국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에게 생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했던 이 여행에서 아들은 오히려 염세주의적인 체험을 했다. 그는 직관적인 것 속에서 정신적인 것을, 개별적인 것 속에서 보편적인 것을 보는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적 방법을 연마했다.
그는 석가가 사문출유(四門出遊)에서 느꼈던 것처럼 곳곳에 사는 사람들의 수많은 고통을 보고 생의 비탄에 잠겨 눈물이 흐르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는 이 세계가 자비스러운 신의 작품이 아니라 피조물의 고통을 즐기려는 악마의 작품이라고 느꼈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온 뒤인 1805년 초에, 여행 전에 아버지와 맺은 약속을 지키려고 거상(巨商) 에니쉬 댁의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진로에 대한 갈등으로 우울한 시간을 보낼 뿐이었으며 갖가지 핑계를 대어 카운터에서의 시간을 줄이고 몰래 책을 읽었다.
그러던 중에 그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그가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판에서 억누를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절절하게 증정했을 만큼 그에게 심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제왕이라도 그처럼 충분히 주지 못했을 여유를 마련해 준, 사랑하는 그의 아버지가 1805년 4월 갑자기 우울증에 의한 자살로 보이는 사고사로 사망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1806년 9살이 된 딸 안델레를 데리고 바이마르로 이사했다. 그녀가 여는 저녁 다과회에는 갓 결혼한 신부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것에 감사하는 시인 괴테를 비롯해 괴테의 지인들인 명사들이 모여들었다.
쇼펜하우어는 학업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면서 생전의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1년 남짓 함부르크에 더 남아 있으면서 불만스러운 상업견습생 생활을 계속했다.
다만 위안이라면 그곳에 독일어 학습과 상인 교육을 위해 와 있던 르아브르의 옛 친구인 안티메를 만나 진심어린 교분을 더 깊게 이어갈 수 있었던 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슐쩌(Sulzer)의 예술론에 공감하고 바켄로더(Wackenroder)의 사상에 심취하면서 범속한 생활과 미적 체험을 구분, 미적 체험이 지속되기를 갈망했다.
어머니 요한나와의 갈등은 계속되었으나 그는 어머니에게 그의 절망적인 심정을 적어 보내었다. 그러자 요한나의 다과회에 자주 참석하여 그녀의 지인이 된 페르노프(Fernow)가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인생을 바꾸는데 아직 늦지 않았으니 도약을 감행하라고 충고하는 편지를 보내주었다.
쇼펜하우어는 이에 감분(感憤)하여 예나(Jena) 대학에의 입학을 시도했다. 그러나 김나지움의 과정을 이수해야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1807년 18세의 소년은 고타(Gotha)로 가서 김나지움에 입학하고 교장 되링(F. W. doering)에게 라틴어 개인교습을 받으면서 또 독일어 학급 강의를 들었는데 진도가 빨라 스승들을 놀라게 했다.
이러한 재능의 발휘는 그 자신의 기분을 한껏 부풀게 했으나 동시에 자만심을 키워 고타의 교사인 슐츠를 풍자시로 조롱하는 등 방자한 태도를 보여 교장은 라틴어 수업을 중단했고 주의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그로서는 생전 처음 겪는 시련이었다.
어머니는 그의 탐구심은 바람직하게 생각했지만 세상에 대한 지나친 염세적인 태도와 타인의 결점을 찾아내어 공격하는 비타협적인 성격 등을 우려해서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1807년 연말 경 그는 어머니의 제의를 받아들여 되링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타를 떠나 바이마르로 갔다.
그러나 그는 고대 언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에 어머니의 집이 아닌, 블레슬라우 대학 교수 프란츠 파쏘브의 집에 기거하면서 그리스어의 개인 교습을 받고 바이마르의 김나지움 교장 렌츠에게 라틴어를 배웠다.
그는 밤늦게까지 신들린 듯한 정열로 촌음을 아껴 수학ㆍ역사 특히 고전문학을 독학하는 등 놀랄만한 속도로 지식들을 습득해 그 동안의 공백을 충분히 만회, 2년 만에 대학입학이 가능한 수준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때 만난 괴테와 페르노브[C.L. Fernow: 쇼펜하우어에게 이탈리아 시를 가르쳐주었음]는 그 시기의 쇼펜하우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809년 말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의 유산 3분의 1을 받고 괴팅겐대학교 의학부에서 입학허가를 받아 주로 생물학ㆍ동물학ㆍ비교 해부학 등 자연과학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철학자 슐쩨(G.E. Schulze)의 영향으로 겨우 2학기 만에 인문학부로 옮겨 우선 플라톤과 칸트를 열심히 공부했다.
1811~13년 베를린대학교로 옮기고 여기서 J. G. 피히테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강의를 들었으나 존경하던 피히테를 경멸하게 되는 등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다.
1813년 나폴레옹에 대한 [제 국민 해방전쟁]의 발발로 인해 드레스텐을 거쳐 바이마르의 어머니 집으로 가서 잠시 머물렀으나 분위기가 싫어 숲이 울창한 루돌슈타트[독일 중부 튀링겐 주의 소도시]로 가서 은둔했다.
그곳에서 여름 동안에 박사학위논문인〈충족이유율[Ü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 충분 근거율이라고도 함]의 4근론〉을 완성, 베르린으로의 귀로가 폐쇄되었으므로 대신 예나대학에 제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겨울(1813~14) 바이마르의 어머니 집에서 지내면서 학위논문에 호감을 보인, 존경하는 괴테와 함께 여러 가지 철학적 주제를 놓고 토론했으며 그 당시 괴테는 자신이 공들여 연구하던 [색채론]을 공동으로 연구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이 제의는 색채를 물리화학적인 현상으로 보는 괴테와 그것을 넘어서 생리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쇼펜하우어의 견해 차이로 인해 곧 철회되었다.
한편 1813년 겨울에 헤르더의 제자인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Friedric Majer)를 만난 것은 그의 학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쇼펜하우어는 그에게서 고대 인도의 경전들(베단타 철학과 베다의 신비주의)에 관해 듣게 되어 그 경전들의 라틴어 번역서를 열심히 읽고 폭풍이 덮친 것 같은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뒷날 쇼펜하우어는 〈우파니샤드 Upanisad: 인도 바라문교 베다 경전의 일부]〉가 플라톤 및 칸트와 더불어 자신의 철학체계를 수립하기 위한 기초를 이룬다고 주장했다.
1814년 5월, 그는 평소부터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어머니의 경박한 생활방식과 사망한 아버지를 무시하는 태도를 비난했고 어머니 요한나는 아들의 교만함과 부정적 사고방식을 비난하면서 다투었다.
특히 쇼펜하우어가 어머니의 애인인 뮐러와 싸움이 벌어지자 어머니는 애인을 택하고 아들을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의 간청으로 하숙생처럼 머물러 있던 쇼펜하우어는 사랑하던 바이마르를 떠났으며 이후 어머니가 사망할 때까지의 24년 동안 두 모자는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그 후 1818년까지 드레스덴에서 살면서, 때때로 〈드레스데너 아벤트차이퉁 Dresdener Abendzeitung〉의 필진들과 교류했다.
1815년에 쇼펜하우어는 한동안 괴테와의 견해차이로 인해 철회된 색채학을 독자적으로 집필한 논문〈시각과 색에 관하여 Uber das Sehn und die Farben〉를 완성해 괴테에게 보내 그의 인정을 받으려 했으나 실패, 괴테의 도움 없이 1816에 출판했다.
그 후 4년 내내 주저가 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를 저술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31세의 나이가 된 1818년 3월 말, 그는 탈고한 원고를 브록하우스(Brockhaus) 출판사에 넘기고 주저의 출판을 보지도 않은 채 비인을 거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으며 베니스를 거쳐 로마에 갔다가 이듬해인 1819년 나폴리에 들렀다.
쇼펜하우어는 이 여행 중 베네치아에서 테레에제라는 여성과 교제했으나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는 그 이외에도 베를린 대학에서 강좌를 개설한 1820년에 카롤리네 메돈, 그리고 특히 1827년에 17살의 플로라 봐이스와 진심어린 구혼을 생각한 일이 있었으나 모두 결혼에 이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누이동생으로부터 그녀와 어머니가 전 재산을 출자하고 쇼펜하우어 자신도 그의 재산 3분의 1을 출자한 단치히의 상점이 파산했다는 불길한 소식을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여정을 역으로 거슬러 귀국했다.
다른 사람들이 70%의 원금을 받는데 동의한 이 청산소송에서 그는 채무자에게 흠잡을 수 없는 의견을 제시하여 홀로 100%를 받기로 하는 수완을 보였다.
그 와중에도 그는 교수 자격 취득을 위해 노력한 결과 1820년 3월 베를린대학교에서 입회자인 헤겔의 반대 없이 사강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는 일주일에 5회인 강의 시간을 대철학자(?)인 헤겔의 강의와 같은 시간으로 정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명성이 충천하고 있는 헤겔을 버리고 무명의 쇼펜하우어를 찾아와 줄 리는 만무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전문가인 철학자들까지도 이 세기의 저작과 저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주저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철학자는 거의 없었다.
8명의 수강 신청자 밖에 없는 빈 강의실에 4학기 동안 홀로 서 있던 그는 사표를 내고 1822년, 2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으며, 1년을 체류하는 동안 병이 들어 뮌헨으로 돌아와 1년 동안 누워있었으며 드레스덴에서도 8개월을 보냈다.
1825년 5월 베를린으로 돌아와 6년을 머물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강의를 시도하려고 여러 대학을 알아보았으나 여의치 못하자 주로 칸트 저서의 영역을 하며 소일했다. 하지만 몰지각한 영국인들이 그를 알아주지 않았으므로 결국 그의 이 작업도 허송세월만 하고 만 셈이 되었다. 그의 일생에 있어서 이때처럼 암울한 때는 없었다.
그러던 참에 1831년에 베를린에서 콜레라가 유행했으며 철학자 헤겔은 이로 인해 사망했다. 그는 콜레라 파동을 피해 만하임으로 갔다.
그는 1832년 7월부터 1년간 만하임에서 살다가 프랑크푸르트에 하숙집을 얻어 아트만이라고 이름 지은 삽살개를 반려로 삼아 거의 그곳을 떠나지 않고 28년 동안 살았다.
결국 그는 대학교수직을 포기하고, 연구(특히 자연과학)와 집필에 몰두한 채 똑같이 정해진 하루하루의 일과, 칸트를 모범으로 삼은 금욕주의적인 생활양식, 유행에 뒤떨어진 코트 차림, 혼자 떠들며 하는 산책 등으로 이루어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그보다 그의 어머니가 더 잘 알려져 있을 정도였으며 1833년 가을, 그의 주저(主著) 판매 상황을 점검해 본 결과 그때까지 견본으로 나간 50부 이외에는 주문이 전혀 없어 모두 폐기처분된 상태였다.
그는 주저(主著) 전체의 보충본을 쓰려던 계획을 바꿔 제2부를 확충하기로 했다. 19년에 걸친 '말없는 분노' 끝에 1836년에 나온〈자연에 있어서의 의지에 관해(Über den Willen in der Natur〉라는 소책자가 그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식물생리학과 천문학에 관한 대단히 상세한 설명을 하면서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자연과학의 의문점과 발견들을 능숙하게 사용하여 자신의 의지 이론의 지지 근거로 삼았다. 이 책의 서문에는 '협잡꾼' 헤겔과 그 도당에 대한 신랄한 독설이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다.
1837년 노르웨이 학술원이 인간의 의지의 자유 여부에 관한 현상 논문을 모집하자 그는 경험적인 의지는 필연적이고 예지적 의지는 자유이며 현상계는 자연의 지배를 받으나 본체계는 자유롭다는 취지의 논문〈인간의 의지의 자유에 관해(Über die freiheit des menschlichen Willen)〉를 써서 응모, 1839년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
또 덴마크 학술회의가 도덕의 기초에 관한 현상논문을 모집하자 이에 응모했다.
도덕의 기초가 직접적 의식이나 양심, 또는 그 밖의 어떤 인식 근거 위에 놓이느냐는 것을 물은 이 질문에서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도덕이론에 반대하여 “성격으로부터 나오는 도덕적 충동이 그 근거”라는 요지의 논문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 논문은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두 논문을 합쳐 〈윤리학의 두 근본 문제〉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1840년, 그는 오래 전부터 계획해 온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증보에 착수하여 4년의 작업 끝에 완성시켰다.
그는 더욱 더 큰 자부심으로 자신의 저작을 자화자찬하면서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으나 전번의 출판에서 적자를 본 브록하우스는 난색을 표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치를 알아 줄 시대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라는 오기로 그 시대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출판사가 마음을 바꿔 그의 수정판을 찍어주었다. 그러나 25년 전 그가 처음으로 그 책을 발표했을 때나 지금이나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의 어리석음(?)은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법률가인 프리드리히 도르구트가 팸플릿과 편지로 그를 소개하고 있었고 요한 아구스트 베커, 법률가인 아담 폰 돌쯔 등이 그를 신봉하는 것이 위안이었다. 또 율리우스 프라벤슈테트(Fravenstädt)라는 사람은 1840년부터 그의 철학에 심취하여 1846년 겨울 이후 그와 가까워졌다.
이에 쇼펜하우어는 그에게 자신의 유고와 그 판권을 모두 맡기기 까지 하게 되었다. 1849년의 그의 생일날에도, 그를 축하해 준 사람은 프라벤슈테트뿐이었다.
1851년, 쇼펜하우어는 6년에 걸친 작업 끝에 에세이와 주석들을 모아 〈부록과 추가(Parerga und Paralipomena)〉2권의 책을 탈고했는데 이를 발행해 주려는 출판사가 전혀 나서지 않았다. 프라벤슈테트는 10권의 증정본 이외의 저작권료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베를린의 한 출판사를 간신히 설득해 이 책을 출판했다.
그런데 드디어 기적이 일어났다. 쇼펜하우어의 저작은 역시 무시될 것이라는 출판사들의 예상을 깨고 〈부록과 추가> 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던 것이다.
1853년 죤 옥슨포드(John Oxenford)라는 영국 학자는 ❬웨스트민스터 리뷰❭에, 쇼펜하우어를 당대 사상가 중에 최고의 천재로, 그의 저작이 아주 훌륭하다고 평해 영국에서 쇼펜하우어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영국에서의 명성에 일조한 독일의 언론인인 오토 린드너의 활약 등으로 독일에서도 이윽고 쇼펜하우어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신문과 잡지는 물론 여러 서적과 백과사전에도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베를린 학술원이 재빠르게 그를 회원으로 추대하여 35년간이나 지속했던 이 철학자에 대한 무시를 보상해 주려 했으나 쇼펜하우어는 그 제의를 단연코 거절해 버리고 당시 학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알렉산더 폰 훔볼트에게 그의 신작을 증정토록 종용하는 프라벤슈테트의 권고도 거절했다.
1854년에는 리하르트 바그너가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니벨룽겐의 반지>를 보내왔고 1857년 여름에는 크노트(Knoodt) 교수에 의해 본 대학에 그에 관한 강좌가 개설되었다.
그의 저서가 프랑스어로 번역되었고 세계 각처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면회를 청했으며 1858년 그의 70회 생일에는 세계 각지에서 축사(祝辭)들이 날아와 수북이 쌓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기사가 나오거든 눈에 띠는 대로 우편료 수신자 부담으로 보내달라고 친구들에게 부탁했으며 식후엔 플루트를 불며 여생을 즐겼다. 그러나 이것은 겨우 2년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다.
그는 1860년 9월 21일. 폐렴 증세로 인한 폐 경련으로 소파의 구석에 등을 기댄 채 평온한 표정으로 운명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유지에 따라 이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가 자기들과 닮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독일학자들을 불쾌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
생애 말년에는 그의 저작 대부분에 마무리 손질을 했다. 1859년에는〈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판이 자신 있는 서문을 달고 나왔고, 1860년에는 〈윤리학 Ethics〉 재판이 나왔다.
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라벤슈테트가 많은 수고(手稿)를 담고 있는 〈소품과 단편집〉의 증보신판(1862)을 비롯해 〈4가지 근원에 관하여〉(1864)ㆍ〈자연 속의 의지에 관하여〉(1867)ㆍ색깔에 관한 논문(1870)ㆍ〈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제4판, 1873)를 냈다.
1873년 말 프라우엔슈테트는 6권으로 이루어진 쇼펜하우어의 첫 번째 전집을 출간했다.
※《쇼펜하우어의 생애와 사상》[朴範洙 저: 형설출판사 간 [1984년 11월 15일 간]에서 발췌하여 백과사전 등 참조 보충 작성.
윤두서의 시조 한수 첨부
옥이 흙에 뭇쳐 길 가에 발피니
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구나
두어라 알 이 있을지니 흙인듯이 (있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