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무경 Apr 12. 2024

철인 열전
[5] 베이컨

영구 경험론의이 창시자

[5] 베이컨(Francis Bacon)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가[1561.1.22 ~ 1626.4.9].


영국 경험론의 창시자

대륙합리론자인 데카르트와 함께 근세 철학을 개척한 학자로 일컬어진다.      

영국 황실 옥새실장(玉璽室長)으로 있던 니콜라스 베이컨 경(Sir Nicolaus Bacon)의 다섯째 아들로, 1561년 1월 22일 런던 요크하우스에서 태어났다.    

  

12살이 되던 1573년부터 1575년까지 3년 동안 그의 형인 안토니 베이컨(Anthony Bacon)과 함께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그리고 1576년에는 그레이 법학원(Gray's Inn)에서 법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해에 그는 영국 대사의 수행원 자격으로 파리로 갔으며, 거기서 대륙의 지식인들과 어울리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그는 그 무렵 파리에서 새롭고 다양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던 실용적 학문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1579년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귀국, 다시 그레이 법학원에서 공부했다. 1582년에 법정 변호사 자격을 획득하고 1584년부터는 하원의원으로 활동했으며, 그 시절부터 과학과 문학 분야의 저작활동을 시작했다.      

1588년에는 그레이 법학원의 강사로 취임했으며 1594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개인 법률고문에 임명되었다. 1596년 《법의 원칙들(Maxims of the Law)》을 집필하고 1603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1605년 《학문의 진보(The Advancement of Learning, 영어본)》를 출간하고 1609년에는 《고대인들의 지혜(De sapientia veterum)》를 출간했으며 1623년에는 《학문의 진보》를 다듬고 발전시켜, 라틴어로 된 《학문의 존엄과 진보에 관하여(De augumentis scientiarum)》를 새롭게 출간했다.

      

이러한 출세 길은 제임스 1세가 등극한 1603년부터 시작되었다. 그 해 베이컨은 기사 작위를 받았고 이듬해 국왕의 법률고문이 되었던 것.      

정치적으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으나, 1616년에 버킹험 공작(Duke of Buckingham)이 되고 1617년에 그의 부친이 역임했던 옥새상서에 오르면서, 일 년 후인 1618년에는 옥새상서가 대법관을 겸직하게 되었으므로 그가 젊어서부터 열망해 마지않던 대법관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1620년에는 뇌물 수수와 관련된 형사 사건과 연관되면서 의회의 탄핵을 받아 관직과 지위를 박탈당하고 정계에서 실각된 후 더 이상 정치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워지자 실의 속에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그 해에 철학자로서 베이컨의 주저로 평가 받는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 신 기관》이 출간되었는데 이 저서는 《대혁신』(Great Instauration 또는 Renewal:  Instauratio Magna (라틴어))》이라고 하는 미완의 거작 제 2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노붐 오르가눔은 연역법을 토대로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 논리학》에 대한 새로운 논리적 방식의 전개였다.       

그는 기존 스콜라 철학의 결함을 비판하여 그 편견인 네 가지의 '우상(이도라: idora) 즉 종족·동굴·시장·극장의 우상을 배격했다. 근대 과학 기술의 발전에 적합한 새로운 사고 방법으로 실험과 관찰에 기초를 둔 귀납적 연구 방법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는 세계 최대의 해양 국가이며 식민국가로 부상하여 물질적 풍요를 얻게 된 자본주의의 여명기인 영국적인 사유방식이었다. 그것은 지식과 학문이라는 것은 철저히 인간에게 도움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관점을 의미하고 있다.     


그에게 학문은 단순히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이었다. 이러한 사유로 인해 그 자신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베이컨은 무엇보다도 처음으로 경험론적 이념을 제시한 철학자가 되었다.       

경험론 철학이 거의 다 그러하듯이 그는 지적 생활의 즐거움을 찬양하기보다는 인간의 현실적 삶을 위한 학문의 실용적 성격에 주목했다.     


베이컨은 1621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이러한 자신의 학문적 신념에 따르는 주제를 공들여 연구했다. 그 연구의 하나로 음식물의 냉동 보존에 관한 실험을 했는데 심지어 그가 죽은 것도 추운 날씨에 벌였던 음식물과 그 냉동 보존과 관련된 자연사 연구 때문이었다.    

  

그는 이 연구 과정에서 추위로 인해 폐렴에 걸렸고, 결국은 그 병이 악화되어 1626년 4월 9일 런던 근교에서 사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천동설을 신봉하고 아리스토텔레스 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등 중세적 사고방식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으며, 자연과학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부족했다. '대혁신'이라는 거창한 제목이 보여주는 것과 달리, 그는 이를 위해 당연히 필요했을 그 당시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예견과 자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배하려고 했던 노력으로 인해 유럽 근대 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게 했다.      

그는 문필가로서도 명성을 얻어 1597년에 초판을 찍은 처세술적인 저작인《수상록(Essays, or Counsels Civil and Moral)》은 재판을 할 때마다 증보되면서 문학상의 명작으로 평가되었다. 

    

저서로 《학문의 진보(The Advancement of Learning, 1605. 영어본)》. 《고대인들의 지혜(De sapientia veterum. 1609)》 《신기관(Novum organum. 1622)》 《자연사 및 실험의 역사를 위한 준비 1622》  《학문의 진보》 라틴어 번역본인 《학문의 존엄과 진보에 관하여(De augumentis scientiarum. 1623)》  《밀집과 희박의 역사》가 있으며  1627년에는 《숲속의 숲』(Sylva Sylvarum)》과 그가 추구했던 과학의 이념이 실현된 이상향을 그린 《새로운 아틀란티스』(Neu-Atrantis)》가 유고로 출판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