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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무경 Apr 13. 2024

딸내미 서울대 입학 이야기

이름도 생소한 지방고교 졸업후 서울대에 지원해 합격했습니다

얼마 전에 발행했던 글인데 아이의 신상 문제에 힌트가 많은 글이 예상 밖으로 독자가 많아 아이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글을 내렸다가 대폭 수정하여 다시 올려봅니다.


 

♣경기도로 이사할 수밖에 없던 무능함

내 나이 20대 후반기였다. 당시 어린이 가정 학습지 시장이 호황이어서 [일일공부] [장학교실] [매일공부] 등의 학습지 발행사들이 성업 중이었다. 그때 이렁저렁하다가 학숩지를 발행하던 한 출판사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내 부서의 사업이 부실하여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학습지는 현재의 인쇄 시스템과는 많이 달랐다. 당시에는 활판보다 옵셋 인쇄가 선호되었으나 학습지 출판사들은 필생들이 아연판에 해먹이라는 먹으로 일일이 붓글씨를 써서 인쇄하던 시절이었다. 다만 일부에서는 일본에서 발명한 사진 식자기를 들여와 인화지에 글자를 찍어내는 매우 고급스러운 인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창의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학습지를 펴내려 했다. 우선 당시 유행하던 9절지 한 면에 시험 문제만 가득 싣던 편집 방식을 버리고 사진 식자기를 활용해 8절지 앞면에 시험 문제를 싣고 뒷면에는 여러 가지 학습 자료와 만화 등을 실어 잡지처럼 꾸미려 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금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제조업으로 성공적인 사업 경영을 하여 자금이 조금 있던 매제를 설득해  [진선미 동산]이라는 초등생 시험지를 출판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어서 이미 성업하던 학습지 3사가 합병을 한다느니 하면서 대혼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지나친 이상주의자였던 나는 직원들 출퇴근도 알아서 하라고 맡겼더니 직원들의 근무는 난장판이었고 지사나 지점도 아무 보증 없이 몇 달 동안 공짜로 인쇄물을 내려보내 주다보니 받아다 방구석에 쳐밖아 놓으면서도 독자를 확보지 봇하는 일이 많은 등 경영에 너무 무능하여 구멍 뚫린 항아리에 물 붓기로 자금만 들어가고 수입이 없어서 회사는 6개월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나는 느지감치 결혼했으나 서울에서의 생활에서 이런 식의 실패를 하다가 결국 치열한 생활 경쟁에서 밀려나 경기도로 이사했다.      


♣경기도로 이사해 아이들은 거기에서 중학교 졸업      

남매가 다시 새 학교로 전학하고 낯선 곳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환경이 열악한 속에서도 딸아이는 열심히 공부했던지 졸업 때에는 전교 1~2 등을 다투었다.      

우리 애의 대학 진학에 대해 당시 중학교에서는 법대 진학을 추천했고 아내는 약사나 교사를 바랬으며 나는 문학가가 되기를 바랬으나 우리 아이는 미술에 취미가 있고 또 소질도 있어서 그림 그리는 것만 고집하는 것이었다.      


내 생각은 자기가 발분 망식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어서 딸내미가 바라는 대로 미대를 지원하도록 지지했다. 


대학교는 둘째 치고 먼저 고교 진학을 해야 하는데 그 도시에서 갈 만한 마땅한 학교가 없어서 다른 시군으로 가야 할 처지였다. 그렇다고 일가족이 다 이사할 형편도 아니어서 하숙을 시켜야 하는데 타향에서 공부하게 한다는 것이 내키지도 않고 그럴 형편도 안 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미술에 특화된 고등학교 몇 군데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한 군데는 아이가 싫어했고 미술교육에서 우리나라 최고 수준으로 쳐주는 예술고에서는 아이가 이름도 없는 지방 학교생이라고 일언 지하에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곳에 한 고등학교가 신설되어 개교를 앞두고 있었다. 하루는 그 학교 교감이 만나보자고 해서 가보니 우리 애를 자기 학교에 보내달라는 청이었다.      

만약 입학하면 내신 일등급은 따놓은 당상이고 서울대에 합격하면 4년간 학비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대 입시가 우리에게 가당키나 하겠는가? 어쨌든 갈 만한 학교도 마땅히 없으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와 딸내미는 미술 실기 학원을 알아보기 위해 나섰다. 그런데 어느 대학에 지원하는 것이 좋을까를 알아보는데 학원에서 거의 가 다 중학교에서의 성적이 좋으니 홍대를 지원하면 합격할 수 있겠다고 하는 것이다.


“서울대는 어떨까요?” 

“어림도 없습니다. 홍대를 보내세요 홍대는 뽑는 학생 수도 500여 명인데 서울대는 100명 남짓 밖에 뽑지 않으니 시골 학교를 나와 서울대를 들어가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예요.” 

하는 것이었다.   

    

아이의 진로에 관해 거의 생각해 본 일도 없던 내가 아마 그때 영화 [스카이 캐슬]이 있어 보았다면 서울대 지원할 생각은 엄두도 못 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 물정 모르는 나는 자존심만 높아 서울대가 무엇이기에 그리 대단하게 말하나 하는 반발심이 생겨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아이와 상의하여 서울대에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홍대 근처에 있는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울대 첫 입시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고등학교에서는 다시 수업료 절반을 부담해 줄테니 서울대를 한 번 더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실패의 가장 큰 요인을 곰곰히 생각한 끝에 미대 입시 시험의 [구성] 과목이 홍대와 서울대가 다른데 홍대식으로 공부했기 때문으로 추측하고 학원을 명륜동의 한 학원으로 옮기고 다시 일년 동안 준비하여 서울대에 지원했다.      


♣입시 날. 남들은 자가용을 이용해 시험장에 가는데 넉넉지 못한 우리는 좌석버스를 타고 시험장인 서울대로 향했다. 상경하는 도로가 지하철 공사로 파 해쳐져 있어 교통이 혼잡하여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가까스로 여의도에 이르렀으나 입시장에 가기 위한 자가용차들로 거리가 꽉 메워져 차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딸내미의 표정은 거의 체념한 듯이 창백(?)한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아이를 이끌고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잡아탔다. 그러나 택시도 막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친절한 기사 분이 신림동 쪽으로도 가보고 지금의 봉천동 서울대역 쪽으로도 가보는 등 고생했으나 길이 뚫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사 분의 분투로 간신히 길을 뚫고 겨우 서울대 정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우리는 경비원들의 안내를 받아 교문 안으로 들어가 시험장 윗길에 정차한 뒤 재빨리 언덕 아래를 달려 시험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20분이나 늦은 뒤였다. 그런데 다행히 그때는 예비 시간이었으므로 정시에서 10분이 남은 상태였고 이내 종이 울려 시험 정시를 알림,

     

다른 시험장으로 옮기는 도중에 응원하러 모여선 서울 예고생 등이 헹가래를 치면서 시끄럽게 굴어서 다른 시험생들이 위축되어 있었다. 내가 나서서 소리 질러 비난하자 소란이 멎었다. 뒤에 딸내미는 아빠 때문에 창피하더라고 불만스러워 했는데 뒤에 휴게실에 앉아 있을 때 거기 있던 학부모 가운데 나를 가리키며 시원하더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121명을 뽑는 미술과에서 합격생은 3분의 1 이상이 서울 예고생이고 선화예고생이 10명 이내, 전국 도(道)와 대도시 학생은 각 곳 당 1명 정도였다. 미대에서도 가장 치열한 학과는 서양화과와 우리 애가 지원한 디자인과였다.    

  

입시생들 여러 명이 미대 교수 자제들이었고 뒤에 면접시험에서 어느 교수가 했다는 말처럼 고교 이름도 생소한 고등학생 합격생은 전혀 없었다. 이렇게 가진 것 없는 나는 시험보는 딸내미에게 아무 것도 도와줄 힘이 없어 시무룩하던 차에 마침 서울대 박물관을 알리는 팜플렛을 주기에 받아보니 그 표지가 내가 그린 도안 백과의 한국 무늬로 되어 있어 그거나마 아이에게 보여 주면서 사기를 북돋아 주려 했을 뿐이다. 우리 애는 그 딴거에 위로받을 성격도 아닌데 말이다.  

    

진작에 알고 있어야 할 대학입시에 대해 깜깜하게 몰랐던 나는 그 뒤에야 어렵고 복잡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소 잃고(?) 대장간 고치기로 부지런히 시험 결과들을 탐색해 보았다. 흔히들 서울대 예술계 학과는 다른 과에 비해 실력이 크게 뒤진다고들 생각하는데 내가 알아보니 그렇지 않았다. 


당시 서울대 법대생의 수능 합격 점수가 175점 정도였는데 우리 애의 수능 점수가 거의 170점에 가까운 성적이어서 큰 차이가 없었다. 더구나 예술 계통 학생들은 시간의 절반을 실기 공부에 쏟아부으니 이런 사안을 감안하면 격차는 더 좁혀진다.      


♣두 번째 지원 결과는 합격이었다. 나는 처음에 입시 실패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엉뚱하게 과연 서울대에서 시험이 공정하게 치러지는지? 혹시 권력이나 금력의 영향을 받는 일은 없는지 걱정되었었는데 그런 걱정이 기우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합격을 확인한 뒤에 내가 축하한 일이 겨우 일행을 데리고 중식당에 가서 잡탕밥 한 그릇씩을 대접한 것 뿐이었다.     


넉넉지 못하게 살다 보니 합격한 뒤에서야 컴퓨터를 사주었다. 그런데 같이 합격한 학생들은 디자인 소프트 사용의 달인들이라서 이미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수준이었고 외주를 받아 작업을 해주고 용돈을 벌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딸은 입학한 뒤에야 컴퓨터를 시작하고 일러스트나 포토샵 등의 디자인 소프트웨어를 배웠다. 그런데 약 7개월 뒤에는 거의 동급생들의 실력을 따라잡았다고 한다.      

우리 자랑스러운 딸내미는 우여곡절 끝에 미술학원 원장들이 갈 생각도 말라던 서울대에 합격하고 무사히 4년 동안 공부해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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