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 120일』, 추잡한 책이 사라진 세상?

첫 서평이 이 책이어야만 하는 이유

by 사나별

생각해보면 제 책장엔 책이 백 권도 넘게 꽂혀 있는데 제대로 읽은 기억은 손에 꼽습니다. 아마 저 같은 분들 많을 거예요. 누워서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는 풍요 속 빈곤을 타파하는 겸, 혹시라도 책에 권연벌레라도 꼈을까 싶어 털어내려 책을 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첫 서평은『소돔 120일』이 될 것 같네요. 네. 왜냐고요?




어느 날 데이트를 할 때였습니다. 까르보 불닭볶음면을 먹던 제가 문득 말했죠.


"나 혀가 얇아졌나 봐……."


한때는 매운 걸 입에 쑤셔 넣는 사람이었는데 까르보나라 불닭도 버거웠던 겁니다. 그 때 나눈 대화의 결론은 이랬어요.


매운 건 애들이 더 잘 먹는다.


하지만 지금은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릴수록 매운 걸 많이 먹는다.


아이의 특징이라면 뭐가 있을까요? 육아 중인 분들은 "잘 땐 천사 같은데……." 라며 말을 잇지 못하죠. 제가 보기에 아동은 고집과 충동을 반씩 뚝 떼어 빚은 인형 같습니다. 우리 애는/자기 어릴 때는 순했다고요? 글쎄요. 유치원 교사 경력, 또한 육아 경력 두 번의 우리 여사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순한 애들은 한 방이 있다."


여튼간에 아이는 호승심이 강하고 전두엽이 말랑말랑해 자제력이 약하죠. 그렇기에 불닭볶음면을 사 먹고 씁씁후후 혀를 내두르면서도 딸기 우유를 들이키는 겁니다. 그러다 변기와 위장을 박살 낸 경험이 쌓여 결국 편백찜 샤브샤브나 능이 버섯 백숙을 먹는 어른으로 자라겠죠.


그래요. 저는 매운 소설을 자주 봐버릇 했습니다. 어쩌다 문학 소녀로 태어나버린 저는 열세 살 때 학교 도서실에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를 탐독했고 그 길로 도파민 중독에 걸렸죠. 중학생이 된 뒤에도 김별아의 『미실』,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김훈의 『칼의 노래』 등을 탐독하며 계속 주변을 기웃거렸습니다. 뭐 없나? 더 매운 거 없냐?


이런 애가 어른들 눈엔 '얌전하게 책 읽는 애'로 비춰진 게 웃기네요.


때마침 신문에서 고도출판사 『소돔 120일』 광고를 발견했습니다! 충격, 금서, 어쩌구저쩌구 기타 수식어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광고가 제게 말을 거는 것 같았습니다.


"가능?"


이후 『소돔의 120일』을 힘겹게 구해 보게 되었답니다.


※ 착한 미성년자는 절대로 따라 하면 안 돼요! ※




다 읽은 뒤 눈을 파버리고 싶었습니다.


『소돔 120일』은 악명답게 대부분 판매중지 또는 절판 처리되어 있죠.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심의 내릴 때 꽤나 고생했겠네요. 고도출판사 판본은 이례적으로 빠르게 판매중지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몇 년 후 동서문화사 번역본 역시 즉시 배포를 중지하고 수거 및 폐기하라는 공문을 받았고요.


참고로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유해간행물 판정은 이렇습니다. '내용이 사회 통념에 비추어 반국가성·음란성 또는 반사회성 등의 정도가 극히 심해 사회 전반에 해악을 미칠 우려가 있을 때'라고 합니다. 이는 성인에게 판매가 허용되는 '청소년유해간행물'보다 제재 강도가 높죠.


활자 매체가 유해간행물 판정을 받는 건 매우 드문 일인데요. 제가 체감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성애 장면 기준>

제한 없음 : 성애 묘사가 짧고 무미건조하며 줄거리에 필수불가결한 경우
청소년유해간행물 : 음란한 묘사가 길고 빈번함
유해간행물 : 인류 보편적인 성적 흥분마저도 사그라지게 하는 가학적이며 잔인한 묘사


네. 『소돔 120일』은 바로 그 유해간행물입니다. 최대한 검열한 본문을 써볼게요. 눈 감고 아무 페이지나 펼쳤답니다. 남자가 여자의 X에서 XX을 XXX XXX. 그것을 XX서 그녀에게 자신과 함께 XX것을 XX했고, 다음 문단에선 소년의 XXX XX고 XX한 다음 잘 XX서……. 더 해야 할까요?

느끼셨겠지만 비속어, 신체 부위뿐 아니라 접속사, 일반 명사 등등 다 잘랐답니다.


저는 꽤 터프하게 살아온 편이지만, 멕시코에서 갱이 희생자를 XX한다던가 하는 장면은 본 적 없이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장면이 어린 뇌에 때려 박혔어요. 멘탈 말랑한 중학생이 아니라 어른이 된 지금 이 책을 펼쳐봤는데도 너무 힘듭니다.


정신이 아파졌지만 계속해볼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문화사 측에서 "고전에 대한 무지에서 빚어진 시대착오적 결정"이라며 "인간 내면의 악덕과 성적 일탈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은 것이 작품의 본질인데, 얼마나 정독해서 판정했는지 의심스럽다"라고 강하게 주장했듯이 호불호와 별개로 이 소설은 역사적 가치가 높습니다.


우선 고도출판사 판본은 작가 소개 후 다음과 같은 서설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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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가 의미심장하죠?


우리가 『소돔 120일』을 야설로 알고 있을 뿐 직접 본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더욱 낯설게 느껴질 겁니다. 또한 책 날개와 초반 페이지에 작가 약력 및 생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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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드가 프랑스 혁명 시기에 살았다는 겁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배경은 생략하겠지만, 당시 왕정과 귀족들은 향락을 누리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드는 서설에서 "찰거머리 같은 인간들"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드는 비판의 대상을 정확히 '징세 청부인들을 긁어먹은 귀족'이라 정했는데, 징세 청부인이 걷은 세금은 당연히 민중으로부터 나온 것이겠죠?


그 돈으로 『소돔 120일』의 귀족 4명은 시골에 거대한 성을 건축합니다. 음란하고 역겨운 잔치를 벌이기 위해서요. 소설의 배경은 루이 14세 정권 말입니다. 주요 인물 넷은 공작, 판사, 주교, 징세 청부업자에요. 모두 당시 사회의 비판 대상이었던 계급들이죠. 또한 넷은 서로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가문 간의 결합, 하다못해 연애 감정에서 비롯된 결혼이 아니라 오직 음란한 행위를 하기 위한 계약이었습니다. 전부 이미 딸과 근친상간을 하고 있었죠.


그들의 방탕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 각자의 방탕 행각을 하나씩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음란한 행실의 정리에 관한 한, 세세한 상황까지도 빠짐없이 묘사될 것이다.

『소돔 120일』, 23p


한 문장 안에서 조사가 반복되죠? 감옥에서 마구잡이로 쓴 탓에 문장이 거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선언처럼 서문 이후로도 그들이 검은 돈을 축적한 과정, 잔치를 벌이기 위해 모은 곗돈, 뚜쟁이의 모집과 그 뚜쟁이들이 소년과 소녀를 구한 여정까지 낱낱이 적혀 있습니다. 뚜쟁이들은 수많은 소년 소녀를 넷에게 공급했는데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납치당한 사람이 대다수였어요.


넷은 자신이 모집한 노예들과 함께 성으로 향해 음탕한 행각을 벌입니다. 또한 주목해야 할 점은 분위기를 돋우려 고용한 매춘부/포주/음유시인이 푸는 경험담입니다. 대부분이 어린 시절 성직자나 가족에게 성폭력을 당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후 파티는 날을 거듭하며 광란에 휩싸이죠. 넷은 노예들을 폐기처분하듯 고문 후 살해한 뒤 성을 유유히 떠납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충격을 주는 건 아무도 후회하지 않고 처벌을 받지 않는 결말이었습니다. 희생자 중에 넷의 딸들도 있었는데 말이죠. 고용되었든, 납치당했든 고문과 살해를 당할 때 그들은 진심으로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즐거웠던 건 넷 뿐이었어요.




『소돔 120일』은 매우 두껍고 문장 또한 숨넘어갈 만큼 길게 이어집니다. 이것은 사드가 이들의 악행을 낱낱이 묘사하기 위해 자신의 체력과 정신력을 할애한 결과입니다.


『소돔 120일』 이후 제 독서 취향은 비교적 얌전해졌습니다. 문학청소년들에게 은근한 유명세가 있던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였죠? 소설에 성묘사가 길고 빈번하게 나오니까요. 하지만 저는 더 이상 그런 걸 보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까지도 독서광이라 자처하는 것 치고 하루키를 아직 안 읽어봤습니다.『소돔 120일』을 완독한 기억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런' 기준으로 책을 고르고 싶지 않았어요.


이런 소설이 왜 쓰이게 된 걸까요? 그리고 우리가 읽어야 할 이유가 뭡니까? 그건 우리가 끔찍한 전쟁영화, 식민지 역사를 보는 것과 동일한 이유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기 위해 보는 거죠.


예컨대 강간이 성욕 때문에 일어난다고 단정짓는 건 낡은 생각이죠. 그렇다면 군대, 여학교, 기타등등 동성만 모인 곳에서도 강간이 일어나죠? 가해자들이 동성애자가 아니란 것도 널리 알려졌구요. 강간은 상대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게 목적인 폭력입니다. 어떤 상해보다 깊은 피해를 입힐 수 있단 걸 가해자들이 알고 있기에 저지르는 거에요. 쉽게 말해 가성비가 좋단 겁니다. 홀로코스트 지역에서 집단 강간이 일어나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식상한 일이에요.


악행이 뻔하다는 건 이런 겁니다.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소돔 120일』을 굳이 정독하지 않는다면 '또 그놈의 진부한 폭력'에 신물이 난 사람이겠죠.


사드는 13년간 감옥에 있었습니다. 1776년 미성년자 시종들을 상대로 한 음란 행위가 폭로되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소돔 120일』은 당시 특권층을 비판하는 동시에 방탕하게 살았던 본인에 대한 폭로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소돔 120일』을 음란한 사람이 쓴 포르노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려면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장편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 그 짓거리를 실제로 하러 가는 게 편하겠죠?


어떤 창작자는 사랑, 평화, 아름다움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말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사랑이 없고 평화롭지 않으며 추한 세계를 그려내는 일이 있습니다.


정말 끔찍한 건 이 소설 자체가 아니라 이 소설같은 악행의 고발을 막는 사회가 아닐까요?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에 대해 평화를 빌며 이번 서평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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