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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주 Aug 17. 2023

독서는 내 작은 자살이에요

세상이 드럽게 못 견디겠을 때


"그래요. 독서는 제게 여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세상이 못 견디겠으면 책을 들고 쪼그려 눕죠.
그건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
-수전 손택-

책 관련 명언 중 가장 내 가슴을 울린 말이다. 아마 나에게는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을 금언.


내 꿈은 그저 한낱 꿈인데 너무 위대해서 영원히 이뤄지지 않을 그런 종류의 것이다.


죽을 때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다. 뱀파이어처럼 옷만 남긴 채 햇살에 증발하듯.

시신으로 남겨지기도, 남은 사람들이 내 시신을 처리하게 하기도 싫기 때문에 어느 날 죽을 때가 되면 그냥 평온히 증발하고 싶다.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들른 친구가 내 허물어진 옷가지와 펼쳐진 책과 반쯤 남은 커피잔을 보면 그다지 슬퍼하지 않고 묵묵히 내 옷을 태우고 책은 모두 도서관에 기증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건 시작부터 거짓인 전제이기 때문에 결론이 타당하지도 건전하지도 않다.

하지만 영원히 이뤄지지 않을  꿈을 품고 사는 것도 꽤 그럴 듯하여, 아마도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불가능한 소망에 자살적 독서라는 항구적 금언을 첨가한다. 죽어가는 나의 완벽한 결말이다.

뭐. 사람은 결국 모두 죽어가는 중이니까.

비록 현실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 안에서 끝날지라도.


최근 하는 일이 드럽게 안 풀리는데, 근데도 일을 계속 하긴 해야 되는 게 너무 짜증나는데, 건강검진 결과 헬리코박터균 양성 나오자 진짜 드럽게 열받았다. 자는 시간만 행복했다. 잠도 작은 죽음이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기어이 또 깨어나서 오늘을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에 절망했다. 아. 사라지고 싶다.


헬리코박터 제균은 2주간 두 종류의 항생제와 또 뭐뭐를 섞은 약을 먹는데, 도중에 설사가 나는 부작용이 오면 즉시 투약과 치료를 중단하고, 나는 영원히 위암 고위험군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무사히 2주간 약을 먹어도 검사해서 제균이 되지 않으면 더 강하고 괴로운 약을 먹어야 한다는데, 아, 나는 왜 어쩌다.

그리하여 지금 투약 6일이 지났다. 아직까진 멀쩡하다. 역시 각종 부작용이 작용하지 않는 무던한 몸뚱이는 예민한 정신을 엄청나게 상쇄하고 보완해준다. 그런데 술과 커피를 못 마시니 이 또한 죽은 목숨이라, 나는 지금 며칠 째 브레인포그 같은 상태이고, 정신이 반짝 깨어나지 못해서 각종 작업도 하기 싫고, 퇴근 후 맥주 한 캔을 마시고서 몽롱한 기운으로 창밖의 온갖 불빛들을 멍하게 쳐다보는 행복도 누릴 수가 없다. 어찌 죽은 목숨이 아니리.


드럽게 못 견디겠는 일들 투성이다.

나는 돈도 벌기 싫고 일도 하기 싫고 별로 열심히 살고 싶지도 않고 헬리코박터 약 따위는 절대 먹고 싶지 않은데.

그럼에도 왜 살아야 하는지 명분을 찾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손쉬운 죽음으로 도피했다.


광복절 휴일에 하루 종일 누워서 디카페인 커피와 젤리, 사탕을 퍼부으며 5백 페이지짜리 소설책을 다 읽었다. 디카페인의 장점은 하루에 몇 잔씩 먹어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커피와 함께 책 속의 문장을 게걸스럽게 들이켰다. 나의 죽음은 대략 12시간 동안 지속되다가 마지막 장을 덮고 다시 삶으로 끌려나왔다.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다음엔 천일야화를 읽어야겠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가 필요하다. 실제로도 그 책은 거의 2천 페이지가 다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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