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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주 Oct 14. 2023

죽을병은아니지만썩을놈의균,살릴약이지만죽일놈의약

건강이란 무엇인가

positive. +. 긍정적인

되게 좋은 말 아닌가?

근데 이게 병원 문턱만 넘으면 영 아니올시다. 무조건 네거티브여야만 좋은 거라니, 병원은 요지경일세.

작년 위내시경 할 때부터 헬리코박터 소견 보인다고 내년에 할 때는 검사 한번 해보라고 권하셔서, 약간의 건강염려증이 있는 나는 "에? 지금 당장 검사하고 치료해야 하는 거 아니구요?" 라고 물었다. 쌤은 "아니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내년 내시경 때 함 해보세요." 라고 하셨지. 그래서 1년 동안 잘 살았답니다. 실제로도 아무 증상이나 이상 없고요. 소화 너무 안 되는 건 늙어서 그런가부다 했죠.(실제로 상당부분 맞음) 그래서 올해 검사해봤는데 긍정적인(positive) 말을 들었다. 양성이라고요ㅎㅎㅎ


1차 복약기는 전 글에도 썼으니 패스. 결과적으로 약 잘 먹고 어떤 부작용도 없었어요. 하지만 그 후 검사에서 균이 안 없어졌다는 얘길 들었지. 아니 다 없는데 너만 있네. 다 있고 너만 없는 게 날 뻔했다 야.

그 자리에서 2차약을 줍니다. 저승사자 멘트와 함께. 내용인즉슨,


'약이 더 셈. 입맛이 없을 수 있음. 2차약 먹고도 안 없어지면 대학병원 가서 뭐뭐뭐를 하고 뭐뭐를 해야 하는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음. 그러니 그건 그때 가서 재고할 문제. 근데 2차약 먹으면 대부분 없어짐. 아닌 사람 본인 경력에 1명 있었음. 굿럭.'


다시 약을 받고 터덜터덜 오는데 집에 와서 까보니 무슨 죽을 병 걸린 사람인 줄. 약이 한바가지다. 하루 4번 4-5시간 간격으로 한번에 대여스알씩. 빈속에 먹으면 많이 힘드므로 꼭 밥을 먹고 먹을 것.

검색해보니 항암제 다음으로 독한 약이라고 한다. 복약 중 일상생활 불가한 사람도 있고, 흔한 증상이 멀미 설사 구토. 다행히 난 설사는 없었지만 멀미 혹은 입덧 증상이 왔다. 더불어 전신무기력증에 우울감. 아무것도 하기 싫고 의욕 없고, 그렇다고 누워만 있자니 그것대로 절망이고, 원래 1일 1식하면 족한 사람인데 밥 세 끼 챙겨먹으려니 죽을 맛이고 소화는 평소보다 더욱 안 돼서 내내 더부룩한데 다음 밥을 또 먹어야 되고, 난 도무지 콩알 하나도 더 먹기 싫은데 약 먹으려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자마자 뭘 밀어넣어야 되고, 그러고 나서 의욕 없이 누워만 있으니 살은 계속 찌고, 그 와중에 먹고 살아야 되니까 커피도 못 마시는 채로 할 일은 다 해야 되고 사람들 앞에서는 애써 밝은 척. 나름 병력 있는데 이처럼 정신을 무너뜨리는 약은 없었다. 몸이 아파서 개고생하는 것보다 정신이 다운돼서 우울증인 채로 견뎌내는 게 더 죽을 맛. 좋은 건 없고요, 나쁜 건 다예요.


완약을 하던 날 치킨과 비빔국수와 맥주를 먹었다.훗.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하루에 한 잔 씩 커피를 마셨다.

몸 안에 모든 좋고 나쁜 균들이 난사당해 황무지가 되었으므로 빈땅에 거름이 필요하다. 하루 세번 각종 영양제와 유산균을 꼭꼭 챙겨먹었다.

못 했던 운동과 못 쓰던 글도 다시 시작했다. 이 둘은 내 정신건강에 상당히 좋다.


건강이란 무엇인가.

돈과 같다.

태어나길 많이 갖고 태어나는 사람과 적게 갖고 태어나는 사람이 정해져 있으며

대부분은 그냥 적당량 있고, 생애주기에 따라 있다가도 있고 없다가도 있다.

젊을 땐 많이 가질 수 있지만 늙을수록 시원찮아지고, 다음 세대에게 싫든 좋든 물려줄 수도 있다.

저승길에 내가 가져갈 수는 없지만 자식들에게 전승 가능하다.

보통은 없어지면 하늘이 무너지고 모든 걸 다 잃는 상실감을 동반하지만,

특히 건강은 레버리지 효과(쉽게 말하면 +든 -든 2배 이상의 버프)로 인해 돈 잃고 절망하는 것보다 그 상실감과 슬픔이 어마어마하여 돈은 없어도 살지만 건강은 잃는 순간 다 잃는 거다, 라는 조상님들의 통찰력이 맞다.


건강하세요.

라는 문장은 문법적으로 맞지 않지만,

건강하세요.

그리고 쾌유가 당신과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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