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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주 Oct 31. 2023

극복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삶은.

오랜만에 아침 출근했다. 몹시 피곤했다.

10년 전 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아침 8시 10분부터 수업이 있어도 그냥 그런가보다 했었는데, 돌이켜보니 어떻게 그랬지!

오전에 일 있으면 반드시 잠을 설친다. 그래도 9시 50분 수업에 맞추기 위해 더 일찍 일어나서 더 일찍 출발했다.

모든 피곤도 다 제쳐둘 만큼 중요한 취재였다. 내일부터 들어갈 대본 작업 전에 꼭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어, 지난 주부터 부탁드려둔 일이었다.

인천정보과학고등학교 성실관 3층 끝 특수 1반.

특수교육 대상 학생들의 바리스타 활동 수업.


주문서를 작성할 때는 꼭 이름을 쓰고 뭐 마실지 체크해야 한다. 이 아이들이 본인이 만든 커피를 트레이에 받쳐들고 주문서와 함께 가져가, "조은주 선생님 주문하신 연유라떼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이 멘트를 해내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담당 선생님은 쟁반을 든 아이에게 어떠어떠하게 말하라고 당부한 뒤 아이를 주문자에게 보낸다. 그러고는 아이가 그 말을 빠짐없이 잘 하는지 지켜본다. 그 아이들은 샷잔에 든 에스프레소를 커피컵에 흘리지 않고 붓는 일조차 몇 개월씩 연습하는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주문서에 아메리카노를 썼다가, 공정이 조금 더 복잡한 메뉴로 마음을 바꿨다. 아이가 이런저런 작업을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어서였다. 과연 아이는 연유와 투샷을 어떻게 하면 잘 섞는지, 시럽이나 드리즐이 들어갈 경우 우유는 얼마쯤 부어야 하는지 연습했다. 그러고선 주문서 멘트를 무사히 잘 말하고 내게 커피를 가져다 주었다. 맛있었다. 근데 유명한 사람이에요? 오늘의 첫손님이네요. 하는 말들을 듣자 함박웃음이 나왔다. 고사리손이 만든 커피라니. 감격하지 않을 수가.

담당 선생님은 아이들의 담임선생님과 다른 교직원분들을 초대해서, 모든 아이들이 직접 커피를 만들고 서빙하는 일을 하게 하셨다. 내가 이걸 돈 주고 사먹어야 되는데 껄껄! 하는 전형적인 아저씨 부장쌤의 안 웃긴 멘트를 들으며 안 웃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다. 도대체 학교마다 저런 캐릭터의 선생님들은 왜 유구히 존재하시는 건데요. 나 학교 때도 계셨잖아요. 여고괴담이세요?ㅋㅋ


미안하게도 내 세계가 참으로 좁아, 어릴 때 이후로는 장애아동들을 만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다른 아이들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미안하고 숙연해지는 두 시간 수업이 끝난 뒤 선생님이 하신 말씀에 그 자리에서 울고 싶었다.


"전 이 아이들이 뭔가를 극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얘들은 나름대로 다 자기 행복이 있고, 그 행복을 지금 찾아가고 있어요."


어떤 삶은 뭔갈 극복하지 않아도 된다.

힘들게 자신을 넘어서지 않아도 된다.

성장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영영 성장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들도 자란다. 다만 속도가 느릴 뿐.

그런데 그게 꼭 어떤 삶뿐이랴.


나는 상처를 통해 인간이 성장한다고 믿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상처를 통해 성장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들은 상처가 없어도 잘 자랐으리라 믿는다.

나는 당신을 상처없이 지켜주고 싶다.
심지어 그대, 전혀 성장하지 못한대도 상관없다.

-시인 이상이 연인 금홍에게 주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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