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사건 등은
현실과 무관하며 수면 중에 일어난 망상으로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
나의 내신점수는 늘 바닥을 기어 다녔다. 공부를 한다곤 했는데, 그저 흉내만 냈던 것인가. 흉내만 내다가 고3 수능날이 다가왔다. 내일이면 끝난다. 내신 성적은 안 좋았지만, 수능 점수 잘 받아서 좋은 대학에 가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은 채 수능 전 마지막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수능 당일,
나는 자리에 앉아 심호흡을 하며 시험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아니... 풀려고 했으나, 정말 풀 수 있는 문제가 1도 없었다. 그래서 시험지를 곱게 접어두곤, OMR카드를 노려보며 맘에 드는 숫자를 하나씩 골라서 색칠했다. 그렇게 수능이 끝났다. 그날 저녁, TV에서는 '수능 난이도 실패, 역대급 불수능'이라는 자막과 함께, 이번 수능에서는 만점자가 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는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역시, 나만 못 푼 게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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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수능 성적 발표날이 되었고. 놀랍게도 만점자가 딱 1명 나왔다. 역대급 불수능이라는 상황 속에서 만점자가, 그것도 단 한 명의 만점자가 나오니 방송 프로그램 섭외 요청이 쏟아졌다. 의례 만점자가 나오면 온갖 교육 프로그램에서 "저는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라는 인터뷰 모습을 볼 수 있듯이, 단 한 명의 만점자를 인터뷰하고자 하는 열기는 대단했다. 그러나 그 만점자는 모든 인터뷰를 거절했다. 만점의 비결, 공부방법 따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만점자가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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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방송으로 진행하는 교육 프로그램에서 또다시 섭외 요청이 왔다. 인터뷰 요청에 질릴 데로 질린 나는 어쩌다 하겠다고 답했고, 생방송 당일이 되었다. on-air가 되기 전, 진행자는 "어려울 것 없어요. 그냥 제가 물어보는 말에 솔직하게 답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후배들한테 응원 한마디 건네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생방송이 시작됐다.
진행자: 수능 만점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받게 된 비결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공부하신 거죠?
나: 아.... 그게...
진행자: 긴장하지 마시고,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나: 찍어서 수능 만점 받았어요.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그냥 다 찍었어요. 저도 만점이 나올 줄 몰랐어요.
생방송 중이라 진행자가 당황했고, 그 사이 내 대답은 그대로 송출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내 인생은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송이 나간 후, 며칠 안되어 학부모들이 나를 찾아왔다. 학구열이 높았던 학부모는 공부 못하는 자식들을 데려와 나에게 족집게 과외를 부탁했다.
학부모: 우리 애 족집게 과외해줄 수 있을까요?
나: 아... 방송을 못 보셨나 본데, 저는 찍어서 만점 받은 거라 누굴 가르치고 말고 할 수준이 아닙니다.
학부모: 네. 알아요. 그 방송 보고 찾아왔어요. 우리 애 공부시켜달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냥 이번에 우리 애 중간고사 보는데 시험 답안지에 체크할 숫자만 알려달라는 거예요. (봉투를 건네며) 과외비는 넉넉히 넣어 씁니다.
나: (돈을 확인한 후) 숫자를 찍어드릴게요. 대신 빵점 받아도 저에게 책임을 묻지 마세요
학부모: 걱정 마세요. 원래 우리 애가 하도 빵점 받아서 공부는 안 되겠다 싶어서 찾아온 거니까요. 받아줘서 고마워요
이후, 중간고사 하루 전날에 찾아온 그 아이에게 어떤 과목 인지도 묻지 않은 채 그저 생각나는 대로 숫자만 말했고, 그 아이는 열심히 숫자를 받아쓰고 돌아갔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학부모가 찾아왔다. 속으로 나는 "이럴 줄 알았지, 책임지라고 찾아왔네 왔어"라며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다를 거 알고 있었기에, 받았던 봉투를 가지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학부모의 반응은 내 예상과 달랐다. 환한 미소로 나에게 고맙다며, 우리 애가 전교 1등을 했다며, 기말고사도 부탁하러 왔다면서 그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까지 데려왔다. 이후, 나는 각종 시험 기간이 되면 학교별로 학생들을 앉혀놓고 숫자만 불러주었고 그놈의 '족집게 과외' 덕에 강남에 빌딩까지 샀다. 그리고 그 학생들까지 모두 만점을 받자, 학부모 사이에서만 돌던 족집게 과외 소문은 다른 방향으로 퍼지고 있었다.
족집게 과외로 산 강남 빌딩 집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학생들의 시험 기간도 아니었기에 올 사람이 없는데.. 하면서 문을 여니 3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있었다.
30대 남: 소문 듣고 왔어요. 그렇게 답을 잘 맞힌다고 하던데...
나: 아 네, 그렇긴 한데.. 무슨 일로? 혹시 공무원 시험 때문인가요?
30대 남: 아니, 그건 아니고.. 로또 번호 받아보고 싶어서요.
나: 네? 저는 시험 답안 숫자만 찍어봤지, 로또는...
30대 남: 알아요. 아는데, 저한텐 로또가 시험이에요. 그러니 제발 (봉투를 건네며) 6개 숫자만 불러주세요. 다른 거 안 바랄게요.
나: (망설이다가도 봉투 속에 들어있던 거액을 보며) 그럼 로또 당첨 안되어도 책임을 묻지 마세요
30대 남: 네 약속할게요
토요일, 로또 번호 추첨하는 날이 되었다. 방송을 틀어놓고 속으로 '나는 왜 로또를 안 샀지, 이 정도 운빨이면 로또 진작에 샀어야 했는데'라고 아쉬워하며 숫자가 적힌 공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아쉬울 것도 없이 그날 나온 숫자들은 내가 그 남자에게 줬던 번호와 단 한 개도 맞지 않았다. 이후, 남자는 책임지지 않겠다던 말과 다르게 찾아와서는 거칠게 문을 두들이며 내 돈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부렸다. 문을 여니 그 남자만 온 게 아니었다. 그 남자는 나에게 받은 숫자를 여러 사람에게 공유했고, 그걸 믿고 로또에 투자했던 많은 이들과 함께 찾아왔다. 이들은 문을 비집고 들어오면서 나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몇 명인지 모를 사람들이 서로 밀치며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겁에 질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난 침대에 누워있었다.
'쓰러졌었나? 여긴 어디지? 강남 그 집은 아닌데..'
몇 분 후, 너무나도 생생했던 모든 순간들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와,, 수능 만점부터 학생들 과외, 어른들의 협박까지 모두 꿈이라고?'
꿈이라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에 감사의 기도를 했다. 그때, 문 밖에서 엄마의 소리가 들려왔다.
"딸, 그만 일어나! 그러다가 수능날까지 지각하겠다!!"
수능 당일이 되었다.
작심삶일 / 글: 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