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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짜오 베트남 Dec 25. 2019

새로운 '타이틀'을 갖는다는 것

2019년 하노이 생활을 되돌아보며... 

벌써 크리스마스다. 하노이에서 보낸 두 번째 해가 지나가고 있다.

갑자기 베트남 주재원으로 발령이 난 남편을 따라 급하게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이 곳으로 넘어온 지도 이제 3년 차로 접어드는 것이다.

   

처음 하노이에 가야 한다는 것을 남편으로부터 들었을 때, 나는 내 일도 있고 아이들의 생활도 있어서 선뜻 맘을 먹지 못했다. 그렇게 1년간은 남편과 떨어져 있었는데 뒤늦게 '가족은 떨어져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와 아이들은 급하게 짐을 꾸렸다. 1년 간을 머뭇거렸지만 막상 베트남행을 결정하고 나서는 부모님의 건강을 빼고는 그리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처음엔 자신만만했다.

2년의 유럽 생활로 외국생활 경험도 있었고, 방학 때 와서 아이들과 잠시 지내 본 결과 치안이나 음식을 포함한 생활면에서도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이들 또한 어디에서든 잘 먹고 잘 자는 엄마의 성격과 신체를 닮아서 큰 탈도 없었고, 오히려 한국에서 보다 윤택해지는 부분도 많았다. 


물론 힘들게 쌓아 온 내 일을 잠시 쉬어야 하는 것이 아쉽긴 했지만, 그것 또한 "그래. 지난 외국 생활에서 아쉬웠던 것들을 이번엔 꼭 해 보자"는 마음으로 달래니 베트남 생활이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가 있고 없고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다른 나라, 게다가 영어도 안 되는 상황에서 외국학교에 다녀야 하는 (한국 학교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 아이들을 신경 쓰느라 처음 몇 달은 초긴장상태였다. 다행히 아이들은 좋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 적응을 잘했다.    


문제는 나였다. 쾌적한 날씨에 몇 시간을 카페에 앉아 책을 읽으며 유유자적 보내던 유럽 생활을 떠올리며 자신만만하게 시작하던 베트남 생활. 날씨부터 달랐다. 무더움과 습함이 동시에 오는 베트남 날씨에 몸은 늘어지기 쉬웠고, "2년 정도 배움 그래도 짧은 영화 한 편은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야심 차게 시작한 베트남어는 무시무시한 성조의 벽을 넘지 못한 채 답보 상태로 그만둘까 말까를 고민하는 날의 반복이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꾸준히 하고 있는 나에게 박수를... ㅠ)


가장 큰 건, 남편과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난 뒤에 몰려오는 공허함이었다. 방송작가로, 엄마로, 딸로, 아내로, 며느리로... 항상 바쁘게 생활했던 나, 갑자기 주어진 낮 시간은 자존감을 뚝뚝 떨어뜨렸다.


돌이켜 보며 한국에서 나는 늘 시간에 쫓겼다. 시사를 앞두고는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 날이 허다했고, 원고를 쓰는 날은 며칠밤을 새는 건 다반사였다. 그나마 한가하다고 하는 날엔 섭외 전화를 하고, 촬영 구성안을 쓰고 촬영 테이프를 보고 편집 구성안을 썼다. 아이템이 엎어지기라도 하는 날엔 초조함과 짜증이 극에 달했다.

우리에겐 일요일, 명절이라도 방송이랑 겹치면 여느 날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무엇보다 늘 방송이 우선이었다.

거의 모든 '방송인'들의 일과라 딱히 생색낼 것도 없지만, 그 사이 아이들은 늘 학원과 할머니 집을 전전했고, 특히 남편 없이 혼자 아이들을 돌봐야 했던 1년은 정말 내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나야 내 일이고 힘들었지만 정말 즐기며 했으니까, 할 수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을 함께하며 '알아서' 잘 커준 아이들에겐 늘 고맙고 미안하다. 나는 그 시간에 아이들도 힘들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기 와서 아이들이 그때의 일을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들어보면 아이들은 그 시간이 온전히 싫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엄마라면 하지 못했을 음식 - 번데기 같은 ^^- 을 할머니가 해 줘서 함께 먹었던 일, 휴일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시장에 놀러 갔던 것, 늦은 저녁 봐줄 사람이 없어서 엄마와 엄마 사무실에 갔던 일, 더빙실에서 더빙하는 모습을 봤던 일, 엄마가 썼던 원고가 방송에 나오고 방송 끝에 화면에서 엄마 이름을 찾았던 것... 나도 아이들도 힘들었지만 꽤나 즐거웠던 추억이었나 보다.


특히 큰 아이는 늘 엄마가 하는 일에 늘 관심이 많았다. 

누군가 엄마의 직업을 물었을 때 쑥스러워하면서도 자랑스럽게 말하던 엄마의 직업.    

나를 수식하던 여러 가지 것들 중에 '방송작가'라는 타이틀이 하나 빠졌을 뿐인데, 나에게 그 공백이 꽤 컸다. 아이템과는 무관하게 읽고 싶었던 책을 읽고, 듣고 싶었던 음악을 듣고, 미뤄뒀던 영화를 찾아서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가끔 예전에 같이 일하던 피디들이나 작가 친구들로부터 기획안을 써 달라는 부탁이 들어오면,  이렇게 가끔 쓰는 것도 재미있군... 하는 생각으로 정말 즐겁게 써 주기도 했다.

하지만, 회의 없이 기획안만 쓰는 건 좀 무리가 아니던가. 몇 달이 지나자 그것도 뜸해졌고, 가끔 작가 친구들과 통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주고받은 후엔 나만 도태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줘야 한다지만, 무너지는 자존감을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선 새로운 타이틀이 필요했다.


그때, 둘째 출산을 위해 잠시 일을 쉴 때 우연히 따 뒀던 '한국어 교원 자격증'이 생각났다.

k-pop의 열풍으로 외국에서 한국어의 인기가 폭발적이라며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도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다는 광고에 혹해 8년 전 따 둔 것. "그래 나에겐 또 다른 무기가 있었다!!"   

때마침, 여기에서 만난 지인의 남편이 한국에 있는 대학 부설로 하노이에 어학원을 열기 위해 왔다며, 몇 달 뒤 어학원을 열 것은 같이 일해보자는 '콜'을 하기도 해, 면접까지 보고 학원이 문을 열기만을 기다렸는데, 여러 가지 문제로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급기야 그 계획이 무산되었다.

"여기저기 얘기가 오가던 학원도 다 미뤘는데..." 기운이 빠졌다.  

"뭐 내 인생이 언제 한 번에 쉽게 풀렸던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몇 달 뒤, 다른 학원과 연이 닿아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일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 페이는 없었지만 (어차피 돈이 목적이 아니었다) 일은 나름 재미있었다. 명함도 나오고 새로운 '타이틀'도 얻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뭐 그것도 쉽지 않았다. 하나 둘 크고 작은 문제들이 터지더니 얼마 전, 경영난을 이유로 학원은 문을 닫았다. "아~ 역시 인생은 쉽지 않다"

그렇게... 새로운 타이틀을 갖고자 혼자 소심하게 꿈틀 했던 나의 계획은 잠시 '보류'다.  


이제 며칠 있으면 하노이 생활 3년차에 접어든다. 비록 그동안 내 인생 자체는 조금 무료했지만, 우리 가족에게 더 크고 즐거운 일들이 많았음에 감사한다. 무엇보다 아무 탈 없이 2년을 보낸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내년엔 또 어떤 일들이 생길까? 인생이 뜻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나쁜 일은 잘 피해 가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 내 글을 알람 설정까지 해 놓고 구독하고 있는 남편과 딸에게. 

걱정하지 마시라. 당신들이 사랑하는 아내와 엄마는 (새로운 '타이틀'을 만들) "계획이 다 있다~" 

지금까지 그랬듯 쉽지는 않겠지만, 결국엔 내 뜻대로 이뤄지도록 만들 테니... ^^


+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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