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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송 Dec 30. 2020

아무 말도 안 들려

요즘 온라인 수업을 하다 보니 안 그래도 기성세대보다 컴퓨터와의 친화력이 빠른 아이들이 거의 종일 컴퓨터를 끼고 산다. 이렇게 저렇게 얼러보고 같이 계획도 세워보고 다짐도 해보지만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이 워낙 무궁무진하다. 재미있는 것을 직면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어린이인 것을.

책임감 있고 자기 할 일을 나름 알아서 잘하는 아이. 막내이다 보니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고 크게 혼 날 일도 없다. 어쩌다 한 번씩 엄마의 잔소리 비스무레한 것이 조금만 튀어나와도 자기가 다 할 건데 누군가 지적한 것에 벌써 자존심을 상해하는 아이라 내가 직접 말을 내뱉지 않아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쪽으로 유도만 하려고 한다.

그 날은 낮부터 "오늘은 이건 꼭 먼저 낮에 하도록 하자"라고 이야기를 나눴더랬다. 아이가 컴퓨터를 하든 놀든, 할 일이 있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것은 알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늦어지면 어린 아이다 보니 잊어버릴 때도 있다. 요즘엔 특히 온라인 수업으로 장시간 피로하기에 엄마 마음에는 할 일이 있다면 맑은 정신일 때 마무리 했으면 하는 바람이라.

그랬건만 늦은 저녁시간이 되도록 진작 끝내기로 이야기 나누었던 할 일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30분정도면 할 수 있는 것인데.  아이는 컴퓨터로 인트로 영상 같은 것을 만드는 데에 푹 빠져 있었다. 영상편집이란 건 정말 한번 자리에 앉으면 끝도 없이 하게 되는 것을 나도 모르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이 잘못된 일도 아니다. 하지만 나를 본 아이의 얼굴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뭔가 미안함 같은 것이 가득했다. 아이에게 지금 어떤 기분이냐고 물었더니 엄마에게 혼날 것 같단다.

'김미경 TV'의 김미경 선생님이 짚고 넘어가지 말라고 그렇게도 이야기하셨는데 그 기억은 안드로메다로 흘려보내고 나는 아이를 소파에 앉혀서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엄마는 시간을 유용하게 잘 쓰자는 말을 하는 거야. 시간 많을 때 미리 하면 될 것을 그때는 안 하고 있다가 엄마에게 혼날까 봐 걱정하고 있는 마음은 버려. 엄마에게 미안해할 일이 아니란 이야기야. 자기 일을 엄마에게 혼날까 봐 해서는 안돼. 그리고는 학생의 본분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블라블라 마치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졸업 축사처럼 원대하게 말이다. 아들 엄마는 자고로 말을 아껴야 하는 것이거늘.

아이는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더니
"나는 할 일 다 할 수 있어!"라고 큰소리로 말하며 울음보가 터졌다.
"엄마는 나를 버리고 싶은 거잖아!"

이건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내가 자기를 얼마나 맨날 이뻐해 주는데?
혹시 '혼날까 봐 하는 마음 버리라'고 한 거? '스스로 약속 안 지키는 그런 마음으로는 살지 말라'고 한 거?
나는 이 말이 어찌 저렇게 들릴 수도 있나 싶어 "얘야 엄마의 말뜻은 이 뜻이잖아."라고 설명을 해보려고도 했지만 아이는 너무나 속상해하며 자기는 할 일을 하겠다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엄마 말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니?"라고 큰 아이에게  물었더니 큰 아이는 그런 걸 다 떠나서 지금은 계속 말을 하지 말고 동생을 내버려 둬야 할 것 같단다.

붙잡고 이해를 시켜야 직성이 풀리지만 나도 나이를 헛 먹지는 않았는지 잠시 쉼표를 찍기로 했다. 무념무상으로 샤워를 하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속상할 때에는 어떤 한 가지에만 마음이 꽂힐 수도 있는데, 이런 모습을 버리라고 했던 표현이 자기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나 싶었다. 게다가 아이니까 더더욱 말이다. 버려야 할 모습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이렇게 해 보자'라고 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어떻게 마음의 실타래를 풀면 좋을까 싶었다. 일일이 설명을 하는 것은 더 꼬이게만 하는 것 같다. 좀 더 한 발짝 뒤에서 생각해보니 시간이 늦어지든 어떻든 결국 할 일을 다 한다면 내가 잔소리를 할 일도 아니지 싶었다. 일장연설을 했던 그 수많은 것들은 다 됐고 무엇보다 내가 말했던 소위 '버려야 할 모습'이 '온전한 본인 스스로'와 동일시되지 않게 해주는 것이 필요한 듯싶었다.

문득 생각이 났다.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과거 마음의 상처로 인해 내면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던 내담자의 심리치료 연극이었다. 예전의 상처를 종이에 다 쓴 다음 손으로 막 구겼다. 그리고 그 종이를 쓰레기통에 넣는 장면이었다. 이런 기억이 떠오른 나 자신이 좀 기특했다. 그래서 평소에 많이 보고 듣고 읽고 하라는 것인가 보다.

자기가 계획했던 할 일을 다 마친 아이는 부드러운 엄마 얼굴을 보자 다시 옆에 와서 뒹굴뒹굴한다. 고마웠다.
"막내야 우리 세리머니 하나 하자"
빈 종이에 '엄마에게 혼날까 봐 무언가를 하는 모습'이라고 써보자고 했다.
"이 종이에는 스스로 안 갖고 싶은 모습들을 써볼 거야. 엄마에게 안 보여줘도 되니까 네가 더 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여기에 써 보면 좋겠어."
아이는 몇 개를 더 써넣었다.
"우리 이거 박박 찢어보자."
아이는 "이걸?" 이라며 주섬주섬 종이를 들더니 죽죽 찢기 시작했다.
"이거 모아서 막 구겨볼까?"
아이는 신났다고 종이를 꾸깃꾸깃 마구 구겨댔다.
"우리는 인제 이 종이를 버릴 거야.
중요한 건 소중한 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 사람은 완벽하지 않아서 우리는 늘 더 좋은 모습을 향해 나아 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깨닫고 더 나아지면 되는 거야.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너는 그대로 온전히 소중해. 아무도 마음대로 버리거나 할 수 없고 사용하지 않게 되거나 하는 존재가 아니야. 이 종이에 쓴 걸 버리자"
우리는 꾸깃한 종이뭉치를 쓰레기통에 가서 유쾌하게 버렸다.

깨끗한 종이에 다짐 하나 써 볼까?
'내 할 일을 하는 것은 소중한 나와의 약속이다.' 아이는 또박또박 이쁘게 써서 책상머리에 붙여놓았다.

브래드 피트의 리즈시절을 볼 수 있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아버지가 그랬다.

"우리는 상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 (We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

정석의 고지식한 목사님 아버지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둘째아들. 달라도 서로 너무 다른 부자이다. 그렇지만 몬태나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함께 플라이 낚시를 하는 햇살 아래서 온전히 아름답다.


때로는 머리로 말로 이해하려는 것이, 이해시키려는 것이 여의치 않다면 가슴으로 느끼자.


무슨 말이었든 어떤 내용이었든

아들아, 중요한 것은 내가 너를 언제나 항상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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