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를 의뢰받으면 가장 먼저 현장을 방문한다. 미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내가 설계할 땅에서 어떤 기운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첫 현장 방문은 늘 설레고 즐겁다.
기본적인 자료는 미리 찾아본다. 로드뷰도 확인하고, 차로 도착한 뒤 걸어서도 둘러본다. 때로는 저녁에 다시 와보기도 한다. 땅은 그렇다.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매력을 발산한다.
현장에서 전봇대가 보이면 늘 고민이 생긴다. 적어도 내가 설계하는 집 앞을 가로막는 전봇대만큼은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파주에 설계한 상가주택이 있었다. 코너 땅이었는데, 하필 코너에 전봇대가 있었다. 현장 소장에게 전봇대를 옮기자고 했더니 불가능하다고 했다. 쉽지 않고 거리가 너무 길다는 이유였다.
나는 주변을 살폈다. 전봇대를 없애더라도 다른 전봇대와의 간격이 길지 않았다.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한전에 확인해 보라고 했다. 돌아온 답변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늘 해보지도 않고 변명부터 하는 이유는 뭘까. 나중에 건축주를 만나보니, 현장소장이 자기 아이디어라며 전봇대를 없앴다고 했다. 참 어이없는 사람들 많다. 씁쓸했다.
전봇대는 늘 골칫거리다. 건물을 가리거나, 주차장 입구와 인접하면 차량 진출입에 방해가 된다. 하지만 효과 대비 비용이 크지 않으니 가능하다면 미리 옮기는 게 더 낫다.
건물을 지으면 메인 전기를 건물로 인입해야 한다. 이 부분을 의외로 많이 놓친다. 집이나 상가건물을 보면 전봇대에서 바로 건물 벽 속으로 전선이 연결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전기 인입선이다.
가끔 대형 건물임에도 전봇대에서 직접 전선이 이어진 모습을 보기도 한다. 누구나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메인 전기 인입선은 지중 매설이 가능하다. 전기 설계비 몇십만 원과 인입 비용을 공사비에 포함하면 어렵지 않다. 전봇대를 옮기는 이유와 같다. 이런 비용은 절대 아껴서는 안 된다.
이 글을 읽은 뒤에는, 이제 당신의 눈에도 전기 인입선이 보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 집이 지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사는 동안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