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도감 #.001

상견례

by Celloglass

도감이란,
건축과 수리 업무를 총괄하던 사람을 수선도감이라 불렀다.

이 이야기는 현장소장과 감리단장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이 둘을 합쳐 ‘도감’이라 칭했고,
그들의 실체 없는 통제를 빗대어
‘그림자 도감’이라 부르기로 했다.


손목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너무 피곤하다.

새벽 4시 반.

비행기를 타야 한다.


공항.

오늘은 현장사무실에서 첫 미팅이 있는 날이다.

지난달 체결한 설계계약 이후 처음이다.


기존 설계자와 시행사, 시공사 간 갈등이 길어지며

셋이 합의 끝에 계약을 해지했고,

나와 재계약을 진행했다.


솔직히 말해,

남이 하던 설계를 공사 중간에 이어받는 건

리스크가 크다.

하지만 투자운용사에서 함께하자는 요청이 있었고,

마침 나도 한가했다.


현장사무실 도착.


삭막하다.

숨이 턱턱 막힌다.

무슨 남자고등학교에 온 기분이다.

단체복 입은 직원들.

조폭인가? 조기축구회 같기도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처음 방문한 현장이라 모든 게 낯설었다.

나도 한 인상하지만

여기 있는 축구부원들도 만만치 않다.


그래도 짬은 있어선지

누가 대빵이고 누가 선발인지는 구분이 된다.


시공사 직원들이 먼저 자리를 채우고 명함을 주고받았다.

그다음은 투자운용사.

내 건너편엔 노인 한 분이 앉아 있었다.

감리단장이라 한다.

그냥 고집 센 노인네처럼 보였다.

내 스타일은 아니었고,

명함만 짧게 주고받았다.


자리가 거의 찼을 무렵,

대빵처럼 보이는 곰 한 마리가

촌스럽게 랩핑 된 문을 열고 등장했다.


아— 현장소장이구나.

처음 만나는 사람도 있었기에

대학교 레크리에이션 하듯 우측 방향으로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왜 맨날 밥 먹는 손 방향으로 도는지 모르겠다.

닭살 돋았다.

다 늙어서 뭐 하는 건지.


설계자 교체 후 첫 미팅이었지만,

사실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공사비 조정.


내용도 파악 안 된 나에게

설계 변경 사항을 줄줄이 읊어대기 시작했다.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기존 도면이 잘못돼 있다며

무조건 바꿔야 한단다.


건축사가 공사할 수 없는 도면을 그렸단다.

현장도 모르면서 도면을 그렸단다.

우락부락한 축구부원들이

하이에나처럼 나를 둘러쌌다.


혹시… 다구리?


그간 전 건축사사무소 실장과 수차례 미팅을 했지만

잘 못 알아듣더란다.

사실, 계약 해지된 건축사사무소는

내가 전에 다녔던 직장이다.


내부 사정으로 허가 완료까지만 마치고 퇴사했는데,

초안은 내가 직접 계획한 것이다.


그래서 투자운용사가 나에게 부탁한 것이기도 하다.

내용을 가장 잘 알고 있고,

당시 어렵던 상황에서도 허가까지 마무리했던 걸 기억해 줬다.


무엇보다…

개업할 때 화분도 보냈다.

물론 지금은 사망 직전이지만.


이 축구부원들이 나를 둘러싸고 이래라저래라 하지만

큰 틀의 내용은 내가 더 잘 안다.

담당 실장이 실력이 부족했던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내용 파악도 없이

무조건 바꾸자고 떼쓰는 건 아니다.


그냥

‘너는 짖어라. 나는 모르겠다.’

그런 심정이었다.


얼른 이 하이에나 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건설사 직원들과 대화할 땐

두서도 없고 자기 얘기만 한다.

“저 건축과장인데요.”

“설비팀장입니다.”

“전기과장이에요.”

“토목담당인데요.”


건축공사는 다양한 축구부원이 필요하다.


이 모든 걸 조율하는 게

건축사의 역량이자 덕목이다.


이렇게 떼로 덤비면

일단 ‘이해했습니다’라는 제스처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정답이다.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


안 되는 일은 애초에 안 되는 것이고,

되는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된다.


무엇보다

건축주의 이익이 우선이다.


내가 이 일로 돈을 받는 이유는 그것뿐이다.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도

건축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이 판단이 건축주에게 유리한가?”

그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게 건축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