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 292명, 생존 70명
2014년 한 사람을 만났었다. 그와의 대화는 늘 우울함이었다. TV에서는 하루 종일 세월호 참사가 이어졌고 그는 그것을 푸념처럼 말하곤 했다. 그 시절 직장 근처서 점심을 먹었다. 나도 무서워서 못 들어갈 것 같은데 어떻게 들어가냐 사람들이 얘기했다. 듣기가 너무 거북했다. 우리가 모두 걱정해야 할 사건이었고, 부끄러워해야 할 우리의 민낯이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외면했다. 당연히 그 현장은 무서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인명을 구조해야 하는 사람들이었고, 또래의 학부모였다. 지켜보고 한탄할 위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외면했다.
나는 참사가 일어난 해에 팽목항을 가지 못했다.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어른으로서 부끄러웠다. 이런 나라에서 그들이 온전히 청년으로 자라길 바랐다는 안일함이 부끄러웠다.
1년이 지난 후 팽목항을 찾았다. 그리고 그 초라함을 보았다. 다시 서울로 향하는 길에 기억저장소를 들렀다. 정부의 지원 없이 유가족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아파트 상가 2층에 초라하게 마련된 장소를 마주했다. 그 당시에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그냥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유가족분들께 전했던 말이 아직도 남는다.
“진짜 나쁜 나라입니다.”
오늘은 서해 훼리호 참사가 있던 날이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지금 시기에 바쁠 것이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감성돔 기름이 오르기 시작하고, 무늬오징어·갑오징어·주꾸미를 낚기 좋은 계절이 된다.
32년 전 오늘도 그랬다.
1993년 10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임수도 북서쪽 3km 해상에서, 정원 221명이던 서해 훼리호는 362명을 태운 채 운항했다. 주말을 맞아 찾은 관광객과 낚시꾼들이 일시에 육지로 향하자, 모두를 데리고 가려는 욕심으로 무리한 출항을 선택했다.
그날 오전, 위도 파장금항은 300명이 넘는 인파로 북적였다. 낚시 명소로 각광받던 위도는 주말이면 전국에서 몰려든 낚시꾼들로 이용객이 급증하던 시기였다. 김장철을 맞아 액젓과 수산물을 팔기 위해 육지로 향하던 주민들이 합류하며 인파는 더 늘어났다.
그 섬의 교통수단은 하루 한 차례 왕복 운항하는 서해 훼리호뿐이었다. 그날 기상은 최악에 가까웠다. 파도가 높고 강풍이 불며 돌풍이 예상돼 선박 운항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경보가 나왔다. 초속 10~14m의 강풍, 파고 2~3m. 소형 여객선이 출항해서는 안 되는 악천후였다.
그럼에도 출항은 강행됐다. 일요일이었고, 대부분의 승객들은 월요일 출근을 앞두고 있었다. 생업에 지장을 우려한 승객들에게, 출항은 빚진 시간처럼 강요됐다.
출항 직후부터 항해는 위태로웠다고 전해진다. 멸치액젓 9톤과 자갈 7.3톤 등 화물에 더해 초과 승선 인원까지 겹친 과적은 여객선에 무리였다. 생존자들은 배가 출항할 때부터 심하게 뒤뚱거렸다고 증언했다. 그럼에도 과적이 일상이던 시절, 선장은 회항을 결정했다. 그만큼 악천 후는 심했다는 증거다. 뱃머리를 남쪽으로 약 40도 돌리는 순간, 강력한 돌풍과 파도가 배의 측면을 강타했다. 그리고 출항 30분 만인 오전 10시 10분, 임수도 북서쪽 해상에서 차가운 바다로 사라졌다. 침몰은 너무나 갑작스러워 대피나 구조신호를 보낼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정원의 1.6배를 태운 채, 경보를 무시한 결과였다. 여기에 부실한 안전 장비와 미숙한 운항이 겹쳤다. 구조는 늦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32년 전의 대참사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과정을 10년 전에도 경험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과거의 과오를 기억하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면 나의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억에서 지운다.
이 글은 두 달 전 기획했지만 쓰지 못했다. 두 달을 키보드만 바라보다 말다를 반복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연휴가 길었음에도 좀처럼 시작하지 못했다. 하루가 다 지난 이 시간에서야 겨우 시작한다. 그래도 누군가는 이 시간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