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ep.19 외면받는 설비 공간

by Celloglass

물론 장수명 주택이나 리모델링 제도 같은 움직임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획일화된 평면을 전제로 한 단기적 대책일 뿐, 미래를 대비하는 장기적 해법과는 거리가 있다.

대학병원에서는 물품 수발이 복도 천정 레일이나 파이프를 통해 이루어진다. 인력이 직접 나르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언젠가 우리가 드론으로 택배를 받게 된다면 베란다 창문으로 받지 않을 것이다. 천정을 통해 연결된 통로로 물품이 집 안 보관소까지 바로 전달될 가능성이 높다. 세탁물의 수거와 배달도 같은 방식일 수 있다.

이처럼 설비 공간은 건축물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제도와 규정에서는 늘 후순위로 밀린다. 사업주는 높이가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한 층이라도 더 올려 사업성을 확보하려 하기에, 설비 공간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결국 미래 세대를 위해 천정 속 설비 공간을 법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 건축물 높이 산정에서 이 공간을 별도로 인정하거나 확보를 강제하지 않는다면, 사업성을 이유로 누구도 자발적으로 이 공간을 확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건축물의 설계란 수많은 법규를 적용하여, 주어진 땅 위에 건물을 앉히는 과정이다. 건축물의 용도와 규모에 따라 적용되는 법의 범주가 달라지는데, 단독주택과 오피스빌딩을 비교하면 그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건물의 크기만큼 적용되는 법의 종류가 달라지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법규는 새로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면서 진화해왔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 즉 설비 공간과 같은 영역에 대한 규정은 민원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늘 관심 밖에 머물러 있다.

건축물의 높이에는 층고와 천정고라는 개념이 있다. 층고는 한 개 층 전체의 높이를 말하고, 천정고는 실제 실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높이를 뜻한다. 현행법에서 정한 최소 천정고는 2.1미터다. 하지만 최소 층고에 대한 규정은 없다. 층고가 3미터라면 천정고가 2.1미터이므로, 천정 속 설비 공간은 약 0.7미터가 된다. 층고의 기준은 바닥 슬래브에서 윗층 바닥 슬래브까지, 즉 콘크리트 면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마감 두께는 별도로 고려해야 한다.

여기서 0.7미터라는 수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근대 한국 건축물의 천정 속 설비 공간에는 단순히 우·오수관, 하수관, 증기 배관, 전등 배관 정도만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그 공간에는 스프링클러 배관, 에어컨 배관, 전열교환기 배관 등이 더해졌다. 이미 공간은 한계에 다다랐고, 앞으로는 AI 관련 설비까지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설비는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교체가 필요하다. 대체로 10년을 전후로 수명이 다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설비가 가득 찬 공간에서는 일부만 교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모듈화된 천정재를 사용하는 업무시설이라면 교체가 비교적 수월하겠지만, 석고보드나 합판 위에 마감재를 덧댄 구조라면 전체 천정을 철거해야만 가능하다.

과거 신축 아파트에는 천정형 에어컨 설치가 없었다. 지금은 전열교환기까지 들어가 강제 급배기를 통해 실내 공기를 순환시킨다. 미래의 건축물에는 더 많은 설비들이 추가될 것이 분명하지만, 천정 속 공간은 이미 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여전히 법이나 제도의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우리 사회는 리모델링보다 신축을 선호한다. 급격하게 바뀌는 라이프 스타일을 따라가기 위해서다. 대단지 아파트의 등장은 과거 단지와 형태를 크게 바꿔 놓았다. 이런 환경에서 기존 설비 라인을 전면 교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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