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도감 #.006

“The Documenting Architect.”

by Celloglass

투자운용사와 전체 메일을 주고받는 동안,

시공사에선 부서별로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온다.


피곤하다.
정말 피곤하다.


그 와중에도 자기 입장 관철에만 급급한 전화 한 통.


공무팀장이다.

설계변경은 예정대로 진행하자고 한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임의 시공된 현장문제들은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사람을 기만했던 행동에 대한 사과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공사기간이 길어지며
초기 투입된 인원들은 다른 곳으로 발령 났고,
공무 과장은 올해 초 새로 왔단다.


그렇다.

늘 나오는 그 말.


“저랑 상관없는데요.”


그래서 나도 똑같이 말했다.


“기존 협의안 외에 추가된 변경 사항도,
저랑 상관없습니다.”


나도 상관없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아는 모양이다.


시공사의 작은 트릭이다.

현장에 문제가 생기면 담당자 교체를 통해 상황을 진정시키려고 한다.


본인들은 그게 지략이라 생각할 줄 모르지만,

내 눈에는 자충수로만 보인다.


설계자를 바꾸는 과정에서
기존 협의 내용은 반영되지 않은 채
설계자 변경이 이뤄졌고,
이제 와서 나에게 처리해 달란다.


난 전달받은 바 없다.


하지만,
결국 이 일이 내 몫으로 남을 걸 알기에 묵묵히 들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만평이 넘는 현장을 맡은 공무과장의 입에서

그토록 천한 말이 나올 줄이야.


이건 조직이 아니다.
무책임 집단이다.


곰에게서 철저히 교육받은 듯하다.


죽었다 깨어나도
“잘못했다”는 말은
그들의 입에선 절대 나오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공사진행을 위해 설계변경은 빠르게 처리해 달란다.


도대체,

그동안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을 해온 건가?


따지고 보면,

우리도 한 분야의 선후배다.


사명감까진 아니더라도,
직업적 윤리의식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전공했고,
전공 관련 일을 하며
부끄럽지 않은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가슴속 어딘가에서

‘에네르기 파’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일을 마음대로 하면서,
뭘 자꾸 바꿔달라는 겁니까!
임의 변경한 부분, 투자운용사 승인은 받았습니까?


당신들… 지금 사기 치는 겁니다!”


나는
사무실이 떠나가라
전화기에 대고 고함을 쳤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전화를 끊었다.


한동안
분이 가시질 않았다.


이 길을 같이 걸어가는

선배로서.
후배로서.


스스로가 부끄럽다.


그리고 이 현장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한 건물이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정성과 노력이 모인다.


그 건물이
누군가의 보금자리가 되든,
누군가의 투자 대상이 되든.


그 과정에는 최소한의 진심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이 현장은
정신 나간 자들의 방만함 속에서
산으로 가고 있다.


현장소장의 탈을 쓴 곰.

공사팀장.

공사과장.

공무팀장.

무엇보다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할 감리단.


이 일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부끄러운 현장이 될 것 같다.


나는 이 부끄러움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브런치 스토리’의 작가가 되었다.


“The Documenting Archit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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