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도감 #.010

수분양자

by Celloglass

허탈한 마음을 뒤로한 채

나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이제 그들은 선택해야 한다.
구조보강이라고 끝까지 우기든, 철거하든.


하지만 내가 본 이상, 바뀔 건 없다.


전체 이메일을 전송했다.
“건축주의 승인 없이 임의 공사한 부분이 있을 경우,

사용승인 접수는 불가하다.”

더는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아마 시공사는 콧방귀를 뀌고 있을 것이다.
대기업들은 늘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하는 게 하나 있다.


나도 만만한 인간은 아니다.


본 사업장은 뉴스에서 흔히 보던 PF(Project Financing) 사업장이다.
쉽게 말해, 이 건물을 짓기 위해 미래의 완공될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구조다.


대부분 대출 조건에 ‘건설사의 책임준공’이 포함된다.
정해진 공사 기간 내에, 어떤 사정이 있든
자연재해가 아닌 이상 반드시 공사를 완료해야 하는 조건이다.


책임준공을 명분으로 건설사는 시행사로부터 높은 공사비로 계약한다.
자신들의 리스크를 금액으로 환산해 반영하는 것이다.


그 결과 뉴스에서 접하게 되는 평당 천만 원이라는 공사비가 나온다.


문제는,
이런 구조 체계를 알지 못하는 소규모 공사 현장에서도

그에 준하는 공사비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장 건설사 입장에선 기회 수익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결국 그 화살은 다시 자신들에게 향하게 될 것이다.


이 건설사 역시 마찬가지다.
공사기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와중에
듣도 보도 못한 한 건축사가 앞길을 막고 있으니
어떻게든 밀어붙이고 싶겠지만,


설계자의 승인 없이 진행된 설계 변경은 무효다.


그전에도 공사비 상승, 공기 압박을 이유로
자재를 바꾸고, 공법을 바꾸고,
복잡한 시공 부위는 자기들 입맛에 맞게 조정해 왔을 것이다.


이처럼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속에서
이 사업장을 원리원칙에 따라 정리하기란
사실상 매우 어렵다.


시행 주체인 투자운용사,
책임준공을 맡은 건설사,
대출을 실행한 금융사.
이들 모두가 바라던 건 분양 완판이었겠지만,
분양시장이 식자 지금은 서로 눈치만 보는 싸움이 됐다.


그 사이에서
내가 계속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어느 누구도 수분양자의 권익을 대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축법상 감리가 마지막 방어선이라지만,
지금 이 구조 속에서 제 역할을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침묵하고, 모두가 회피한다.


PF 사업의 구조 자체를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임준공’이라는 제도는 철저히 재검토되어야 한다.


책임준공이라는 단어는 그 이름과는 다르게 신뢰를 주지 않는다.

책임준공을 명분으로 공사비는 폭등하고,
책임준공을 이유로 설계 변경은 남발된다.


특히 지금처럼 분양률이 저조한 시기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진다.


분양률이 떨어지면 공사비 지급도 어려워지고,
이를 핑계로 건설사는 시행사를 압박한다.


시행사는 공사 지연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올까 두려워, 감히 맞서지 못한다.

결국, 시행사가 건축주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구조 안에서
건설사의 횡포를 막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 제도가 정말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단지 책임을 떠넘기고, 공사비를 올리는 수단에 불과한 건 아닌지
지금이라도 다시 묻고, 다시 짚어야 한다.


결국, 이 건물은 그들의 소유가 되고, 그들의 삶이 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뒤이어 더 깊이 짚겠다.

이전 09화그림자 도감 #.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