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도감 #.011

첫 번째, 그림자

by Celloglass

인허가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시공사 선정에 나선다.

이 현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투자운용사와 시행사는 책임준공이 가능한 시공사들을 두루 만났다.


PF사업에서는 책임준공이 핵심이다.
하지만 이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시공사는 많지 않다.
시공능력, 신용등급, 채권발행 조건 등 금융사의 기준을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건을 만족하는 시공사는,
공사비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제시해도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당시는 공사비가 가파르게 상승하던 시기였고,
분양시장은 역사상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분양가 회의를 할 때마다 호가를 갱신했고,
시행사는 부담 없이 그에 호응했다.


시장의 분위기가 그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 호황이 영원하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곧, 사업의 오판으로 이어진다.


시공사가 선정되고 공사가 본격화되면,
지하층 공사 도중 어김없이 공사비 증액 이야기가 등장한다.


“자재 수급이 어렵다”,
“기존 설계는 공기 맞추기 어렵다”,
“구조 변경이 필요하다.”


입찰 당시 자신들이 제출한 금액과 조건을 뒤집으며,
설계변경을 자연스럽게 요구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시공사는 사업의 주도권을 쥔다.


앞서 설명한 책임준공의 구조가, 현장에서는 이렇게 직접적인 압박으로 나타난다.


책임준공이라는 명목을 방패 삼아, 시행주체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책임은 시공사에 있지만,
공사가 지연되면 수분양자의 민원이 발생하고,
그 화살은 시행사에게 돌아온다.


결국 시행사는 ‘을’이 되고, 시공사는 ‘갑’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건축사사무소는 보통 시공사의 논리를 무력화시킨다.
설계자는 하나의 공사에 오래 매달리는 시공사와 달리,
짧은 시간 수많은 프로젝트를 경험한다.


그만큼 구조와 사업 흐름에 대한 파악이 빠르다.

하지만 시행사는 매번 같은 방식으로 설득당한다.


“공사비를 줄이면 공기도 맞출 수 있다.”
“사업비를 줄이면 수익이 늘어난다.”


그럴듯하다.
고민도 잠시,
설계변경을 결정한다.


그 순간, 설계자는 무력화된다.
감리자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사업은 이제 시공사의 입맛대로 흘러간다.


이 현장은 그 중간쯤에 있었다.


설계자가 교체되며 흐름이 잠시 멈췄다.


긴장을 깨는 틈이 생겼다.


이런 경우, 설계자나 감리자는 법적 권한을 정확히 행사해야 한다.
정당한 요구가 아니라면, 일절 끌려다녀선 안 된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감리자,
혹은 단기 계약으로 현장에 앉혀진 감리자는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이 현장도 다른 수많은 현장처럼
건설사의 입맛대로 움직이게 된다.


지금이 바로잡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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