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도감 #.012

두 번째, 그림자

by Celloglass

건축물의 설계와 감리는 원래 ‘건축사’의 고유 권한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양한 사업 방식이 등장하면서,
감리도 기술사 등 다른 자격자가 수행하는 일이 많아졌다.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은 ‘상주 감리’ 제도의 적용을 받는다.
이때, 감리자 대신 건축사사무소의 직원(건축사보)이 현장에 상주하고, 건축사는 비상주 감리를 수행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인력 수급이다.
대부분의 사무실이 인력난을 겪는 현실에서 직원을 장기간 상주시키긴 어렵다.
그래서 감리원 자격이 있는 외부 인력을 단기 채용해 ‘상주 감리자’로 앉히는 경우가 많다.


현장에 방문하면, 연로하신 감리자분들이 계신 이유다.


우리는 이들을 감리원, 혹은 건축사보라 부른다.


그런데 이 현장은 이상했다.
모두가 그 감리원을 ‘감리단장’이라 부르며 따르고 있었고,
공문서에도 그분의 사인이 ‘감리단장’으로 올라가 있었다.


나는 곧장 이의를 제기했다.

“앞으로 설계변경 요청서 등 모든 문서는,
정식 감리자의 날인이 없으면 인정하지 않겠다.
감리자와 감리원의 날인을 모두 첨부해라.”


이 현장은 누가 감리자인지도 모른 채
2년 가까이 공사를 진행해 왔던 셈이다.


그러니, 산으로 갈 수밖에.


실랑이가 있었다.

“감리단장이 다 책임지는 거다.”
“감리하는 사무실에서 문제없다 했다.”
“우리는 늘 이렇게 해왔다.”


늘 하던 대로.
그 익숙함이 모든 현장을 병들게 한다.


나는 건축법 조문들을 열거해
각 회사에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들 감리업무 수행 계약서에
감리자는 누구로 기재되어 있는가?”


이 업무 체계를 바로잡는 데까지
무려 3개월이 걸렸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감리원들은 자신이 어떤 책임을 지는지도 모른 채
서류에 사인을 해왔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자
그간 제출됐던 설계변경 문서들이
감리자의 날인을 추가해 다시 제출되었다.


분양건축물은 자재를 변경하려면
수분양자들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감리자가 동등 이상으로 판단하면 동의 없이도 가능하다.


이 시점부터 감리자의 판단은
누군가의 재산을 지킬 수도,
시공사의 공사비를 지킬 수도 있다.


부정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설계변경 사항을 보면
객관적인 판단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하나.

이 과정에서 설계자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


설계한 자가
자신이 의도한 재료조차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


법이 정한 요건만 갖추면,
설계자는 거부할 수 없다.


시공사가 감리자를 포섭한다면,
단 몇 줄의 설명과 사인만으로 재료는 전면 변경된다.


어느 누구의 동의 없이.

이 상황을 제동 걸 수 있는 주체는
오직 시행사뿐이다.


하지만 이들 또한
책임준공이라는 족쇄 앞에서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두 그림자가 손을 잡는 순간,
현장은 눈뜨고 코 베이는 구조로 흘러간다.


뉴스에서 자주 볼 것이다.

“모델하우스와 다르다.”
“분양사무실에서 설명한 것과 다르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완벽하다.


무능한 감리자가 '동등 이상'이라 판단했다면,

그건 곧 '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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