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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셔스 Aug 06. 2023

미국물 먹는 중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마치 예전에 우리나라 차 번호에 지역 명이 쓰여있던 것처럼, 미국 차량의 번호판은 주마다 다르다. 우연히 주차장을 지나가다가 뉴햄프셔 주의 번호판을 보게 되었다.

Live Free or Die.

발번역을 하자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혹은 자유롭게 사는 게 아니라면 차라리 죽겠다) 정도로 번역이 될 것 같다.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1945년 채택된 미국 뉴햄프셔 주의 공식 모토 라고 한다. 이 문구는 1809년 7월 31 일 뉴햄프셔에서 가장 유명한 미국 독립 전쟁 군인인 존 스타크 장군이 쓴 축배에서 채택되었다고 한다. 건강이 좋지 않아 스타크는 베닝턴 전투 기념일 재회 초대를 거절했고 대신에 편지로 다음과 같은 건배사를 보냈다.


Live free or die: Death is not the worst of evils. (자유롭게 살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겠다. 죽음은 최악의 악이 아니다.) 



자유롭게 살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다고? 목숨보다 자유가 소중하다고? 자유의 여신상으로 대표되는 미국은 자유의 국가이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자유가 없냐? 민주화 운동을 통해 개헌한 헌법을 기반으로 한 대한민국도 명실상부한 자유 국가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공동체 의식(a.k.a 오지랖)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속박이 존재한다.


회식에 가기 싫어도 가야 하고, 누가 음식을 권하면 먹기 싫어도 먹는 척이라도 해야 하고, 상사가 술마시면 같이 분위기 맞춰 마셔야 한다. 남들이 오마카세를 먹으면 나도 오마카세를 한번 먹어줘야 하고, 남들이 해외여행 가면 나도 왠지 해외여행 가야 할 것 같다.


외모나 외양도 남들과 비슷하게 해야 욕을 먹지 않는다. 가을이면 비슷한 모양의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성들이 지하철 플랫폼에 나란히 서 있고, 여름이면 남성들은 이른바 모나미 볼펜 룩(흰 셔츠에 까만 슬랙스)을 입는다.


학력은 어떠한가. 옆집 엄친딸 순이가 서울대를 가고 나는 지방대를 가면, 우리 엄마가 순이 엄마 앞에서 고개를 못 들고 다닌다. (사실 순이의 삶이랑 내 삶이랑 1도 관련이 없는데도)


명절에 어쩌다 한번 보는 얼굴도 잘 기억 안 나는 5촌 당숙이 "대학 어디니, 직장은 어디니, 애인은 있니, 결혼은 언제 하니, 애는 있니, 애는 공부 잘하니"라는 끝도 없는 정해진 질문을 내 나이에 따라 순차적으로 한다.




대표적인 퀴어 아티스트 중 한 명인 영국의 팝 가수 샘 스미스(Sam Smith)의 보스턴 콘서트에 갔다 왔다.  샘 스미스는 이미 네 살 때부터 자신이 퀴어임을 깨달았다고 하고, 생물학적(sex)으로는 남성(male)이지만 자신의 성(gender)을 남성, 여성 어느 것으로도 성별을 규정할 수 없는 논바이너리(non-binary)라고 한다.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귀걸이를 하고, 가터 펠트를 입고 콘서트를 하는 샘 스미스에게 보스턴의 관객들은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샘 스미스의 새 앨범 사진. 네덜란드의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오마주로 보인다.


미국에 살아보니, 미국은 정말로 "자유"로운 국가라는 걸 새삼스레 깨닫고 있다.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아무도 관심도 없다. 길거리에서 반은 헐벗은 채로 조깅을 해도 공연 음란죄로 잡혀갈 일은 없다. 뚱뚱해도 비키니를 입고 바닷가를 돌아다닌다. 남성이 여성과 같은 복장을 하고 얼굴에 화장을 하고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아무도 지적하거나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남성끼리 길거리에서 키스를 해도 남들은 쳐다보지 않는다.


자유롭고 싶어도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 유교걸, 눈치로 먹고 살고, 책임감 빼면 시체인 K-장녀인 나에게, 미국 물이 어느새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 자우림의  '일탈'이라는 노래에서는 "머리에 꽃을 달고 미친 척 춤을" "선보기 하루 전에 홀딱 삭발을" "비 오는 겨울밤에 벗고 조깅"을 일탈이라고 한다. 그런데 미국에선 이런 걸 아무도 일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가 아니면 죽겠다고 길거리에 달리는 차 번호판이 외치는 나라에서, 나도 진정으로 자유롭고 눈치 보지 않는 삶에 대한 용기가 조금씩 생기는 것 같다. 엊그제 아마존(amazon)에서 가슴이 깊게 파인 티셔츠와 짧은 반바지를 배송 받았다. 아직 용기가 없어서 한번도 밖에서 입어본 적이 없었다. 오늘 밤엔 입고 나가 여름 공기를 맞으며 맥주를 한잔 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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