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은 항상 무지하고 어설프다

by 루비나

2025. 02. 19. 일본 워킹홀리데이가 시작됐다.

처음 하는 해외살이, 거의 처음 가는 일본인데, 신기하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공항에서 부모님과 인사할 때도 그냥 집을 나서면서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느낌뿐이었고, 비행기가 일본으로 가며 후지산이 보일 때도, 나리타 공항에 내려 재류카드를 만들 때도 무던했다. 진정한 독립을 시작한다는 벅차오름은 없었지만, 당황과 어설픔은 가득했다.


일본 여행을 해본 적 없는 나는 비짓재팬이라는 온라인 입국 신청서도 처음이었다. 여행자와 워홀러의 신청서 작성 방법에 차이가 있다는 걸 봐서 열심히 검색하고 비행기를 타기 전 신청서 작성을 완료했다. 마음 편히 비행기를 타고 일본을 가는데, 도착하기 직전 비짓재팬 작성자는 QR를 미리 준비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네..? 무슨 코드요?


아까 작성하면서 그런 게 있었나 다시 확인해 보니 QR코드 같은 건 없었다. 알고 보니 정보 등록만 하고 중요한 입국심사를 안 했던 것이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내리기 직전, 전파가 잡힌 그 순간 재빠르게 심사를 완료했다. 전파가 잡힐 때까지 ‘제발… 제발…’을 몇 십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천천히 했어도 전혀 문제가 아닌데, 그땐 빨리 해야 다음으로 잘 넘어갈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공항에 도착해서 재류카드를 만들고, 짐을 찾고, 안내원분들께 물어물어 도쿄 시내로 가기 위한 스카이라이너 표를 발권하러 갔다. 표를 받아 스카이라이너를 타러 갔는데 내가 발권한 탑승 시간쯤 열차 한 대가 들어왔다.


내가 아무리 몰라도 스카이라이너보다는 일반 전철처럼 생겼는데… 스카이라이너 모양이 여러 개인가?


인터넷을 찾아볼 시간도 없어서 옆에 서있던 일본인에게 내 티켓을 보여주며 스카이라이너를 타고 싶은데 지금 열차를 타도 되는지 물어봤다.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그 일본인은 맞으니까 빨리 타라는 말만 툭 던지더니 같이 열차에 탑승했다. 타고나서도 조금 이상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열차가 느렸다. 그런데 다음 역이 ‘나리타유카와’ 역이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는 순간, 의심은 바로 분노를 머금은 확신으로 변했다. 스카이라이너 발권 당시 한 정거장만 가면 ‘닛포리’ 역이니까 바로 내리라고 했었는데? 아까 대화했던 일본인 여자분이 마침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어서 내 스카이라이너 티켓을 보여주며 다시 물어봤다. 누가 봐도 당황한 표정으로 이 열차가 아니라고 말하더니 그제야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아까는 빨리 타라고 하지 않았냐고 하니, 미안하다는 사과도 없이 공항으로 돌아가서 다시 타야 한다는 말만 하고 고개를 돌렸다. 45kg가 넘는 짐을 바리바리 챙기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보다, 건성건성 대답한 이 사람으로 인해 내 시간이 낭비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났다. 본인도 욕먹을 걸 알았는지 빠르게 돌린 고개를 다시 내 앞으로 가져와서 ‘귀찮으면 그냥 아무 대답도 하지 말지 왜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었냐’ 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시간 낭비까지 한 상황에 이런 사람 때문에 에너지 낭비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마음속으로 욕을 잔뜩 하며 아무도 내리지 않는 ‘나리타유카와’라는 역에 내려 역무원을 찾아갔다. 그리고 마주친 역무원에게 공항에 돌아가면 스카이라이너 표를 바꿀 수 있다는 정보와 걱정하지 말라는 친절함을 동시에 받았다. 어떤 사람의 무심함으로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분노가 다른 사람에게 받은 친철함으로 불과 5분 만에 녹아 사라졌다.

분노가 사라지니 마음에 여유 공간이 생겼고, 그제서야 역에서의 풍경이 보였다. 주변은 한적했고 그때의 하늘이 너무 예뻤다. 하늘색의 채도가 높았고, 한국보다 구름이 좀 낮게 떠있는 느낌이었다. 할 수 있는 건 전철을 기다리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하늘을 더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아마 계획대로 집까지 갔다면 중간에 하늘을 볼 생각을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돌아가느라 예상보다 시간이 걸렸지만 여하튼 일본에서 계약한 집으로 무사히 도착했다. 그래도 빨리빨리 민족답게 주소등록, 청소용품 등 필요용품 구입, 겨울날 온돌 없는 찬 바닥에서 입이 돌아가지 않기 위한 침구류 구입, 통신사 상담 및 개통 예약까지 완료했다. 아직 1일 차인데 자야지.. 하며 오늘 구매한 토퍼 위에 한국에서 가져온 전기장판을 펼치고 몸을 누였다.


내일부터는 일본에서의 첫날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처음을 마주하며 오늘처럼, 아니 어쩌면 오늘보다 더 많은 어설픔이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고 해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조급해하던 부분이 생각보다 천천히 해도 괜찮은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처음을 하는 동안은 이 사실을 모르겠지. 아무리 철저히 사전조사를 한다고 해도, 처음은 항상 무지하고 어설플 테니까. 그러니 그 완벽하지 않음을 탓하지 말고, ‘0’부터 시작해서 무언가를 해냈다는 마음으로 가득하게 생활할 수 있기를.

스스로 선택한 이 길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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