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꾸미기, 기억 꾸미기.
한국과 다르게 일본은 집을 구해도 또 다른 임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의 원룸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냉장고, 세탁기와 같은 기본 가전 옵션을 갖춘 곳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에어컨과 전등이 있는 곳들도 꽤 많지만 그것마저 없는 곳들도 있다고 한다. 다행히 내가 살게 된 집은 전등이 달려있었다.
2월 19일. 온돌이 없는 일본의 겨울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침구였다. 한국에서 전기요는 들고 왔지만, 막상 집에 도착하니 맨바닥에 전기요를 깔아도 무용지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본 적도 없는 동네에서 구글지도에 의지하며 침구류를 사러 신주쿠라는 번화가로 나갔다. 29년 인생 신주쿠라는 곳도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엄청 많은데 이렇게 혼자인 느낌도 참 오랜만인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감성적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고, 생존본능에 따라 몸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추운 집에서 입이 돌아가지 않고 싶다는 마음과, 그래도 처음으로 내 마음에도 꾸밀 수 있는 집인데 좀 더 신중하게 채워 넣고 싶다는 마음이 충돌을 일으키며 매장을 배회하다가 고민 끝에 바닥에 깔 수 있는 3단 토퍼와 겨울 담요를 구매했다. 침대나 매트리스를 구매하더라도 토퍼는 그 위에 돌릴 수도 있고, 당장의 바닥의 한기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첫날은 ‘살아남기‘ 위한 쇼핑이었다면, 둘째 날부터는 ’살아가기‘ 위한 쇼핑이 시작됐다.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신다는 중고가게를 방문해서 이것저것 비교하며 필수 가전들을 골랐다. 집 꾸미기가 이틀 만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살아가며 필요한 게 생기면 인터넷 쇼핑도 해보고, 택시비가 아까워 오프라인으로 구매한 무거운 가구도 직접 들고 와보고.
‘0‘에서 ‘100’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모든 게 나의 선택으로 채워진 게 생각보다 좋았다.
이렇게 내 공간을 채워가는 게 내 일본 생활과 너무 똑같다고 느껴졌다. 정해진 일자리도, 지인도 없는 무연고 타국 생활로 문을 연 나의 홀로서기.
29년 인생 도쿄라는 곳은 처음이라 오기 전 어떤 곳인지 찾아봤어도 실제로 내가 머무는 모든 공간이 낯설었다. 집에서 전철역을 가는 길도, 집 주변에 있는 모든 골목이 처음엔 게임에서 주는 답이 없는 선택지 같았다. 일본어도 아직 서툴러서 식당이나 카페를 가서 대화를 하면서도 일본어보다 눈치가 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이나 사람들의 표정, 억양에 맞춰 말 뜻을 이해하며 살아가는 느낌이었달까? 처음엔 나의 일본어 실력을 탓했지만, 점차 이것도 경험치가 되지 않을까? 이 눈치들도 쌓여서 무언가의 내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재미가 붙었다. 조금은 헤매기도 했지만 하나씩 해나가다 보니 안 되는 건 없었다. 이제 집 주변은 지도 없이도 다닐 수 있게 되었고, 핸드폰에 눈을 고정시키지 않으니 주변의 더 많은 것들이 보였다. 집 주변 마트들도 하나씩 찾아가며 뭐가 다른지, 뭐를 살 때는 어느 마트가 더 좋은지 알아가기도 하고, 한 두 정거장 정도는 걸어 다니며 사람 구경, 주변 구경에 재미를 붙였다.
집을 나의 선택으로 채웠다면, 일본 생활을 내 기억으로 채워가고 있다. 어떤 경험이든 오롯이 내가 선택한 온기로 가득 채워 나를 지켜줄 나의 포레스트를 만들었다. 앞으로 더 좋게 만들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