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2시, 숙소도 짐도 없는 홀로 여행을 시작하다.
여행을 하다 보면 밤이 정말 까만 밤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저 낮 다음에 오는 밤이 아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오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는지 의심이 드는 그런 밤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밤도 몇 번 지나고 나면 면역이 생긴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는 사실은 세상에는 내 뜻 대로 되길 기다리는 것보다 해내고자 뛰어들었을 때 얻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
어느 순간부터 여행을 통해 밤도 여정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번 코펜하겐 여행에서 겪은 밤도 그런 밤 중 하나였다.
이전 이야기 요약 : 비행기 연착 + 숙소 강제 취소 + 짐 도착 안 함
속절없이 빙빙 도는 빈 컨베이어벨트를 보며 벤치에 앉아 혹시나... 숙소가 취소되는 상황을 대비해
만들어둔 숙소리스트를 보며 주변 지도에서 하나씩 고르고 있었는데 짐은 정말 오지 않았다.
그렇다. 순식간에 매콤 3단계까지 올라간 것이다.
짐도 숙소도 없는 여행의 시작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공항은 급격하게 한산해졌고, 나는 콧구멍 벌렁이며 곧장 고객센터로 달려가 나와 같은 사람들 뒤로 줄을 서서 기다렸다. 대기하던 중 에어비앤비 고객센터에서 연락이 왔고. 자기들도 호스트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다른 숙소로 바꿔주거나 환불해준다고 한다. 그 사이 대체 가능한 숙소들을 이미 봤던 나는 'No, cancel please'를 단호하게 외쳤다. 하지만 단호한 나에 비해 고객센터 직원은 이 늦은 시간에 외국인 혼자 공항에서 방황할 것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혹시 숙소를 못 찾으면 꼭 연락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그 호의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짐이 안온 이유는 매번 그렇듯... 늦게 온다고 한다. 인천 - 암스테르담 - 코펜하겐으로 오는 비행기인데 내 짐은 지금 런던에서 오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몇 번 유럽 내에서 환승 혹은 비행기로 이동할 때 짐을 바로 못 받은 경험이 몇 번 있어 그렇구나.. 했다. 무엇보다 분실이 아닌 지연이라는 것에 크게 안도했고, 나는 '나 지금 혼자 왔고, 짐이 없으면 빈털터리야'를 강조하며 받을 수 있는 키트를 받고, 신상정보를 적었다.
잠깐, 여기서 문제... 짐을 받으려면 숙소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원래 마지막 이틀을 예약해 둔 나의 회심의 카드... 객실수가 가장 많고, 도심에 위치한 그 호텔이라면 이 극 성수기에 하루정도는 나를 받아주겠지 싶어 적어냈다. (-40만 원 당첨, 어느 호텔인지는 뒤에서 밝힐 예정)
짐은 내일 저녁 7시 전에 온다는 말을 듣고(그 말을 믿기로 하고) 나는 곧장 공항 근처 호텔 중 후보 3개에 모두 전화했다.
다행히 1순위 호텔에서 바로 입실 가능하다는 확인을 받았고, 걸어서 5분 거리이지만 이 까만 북유럽의 밤을 헤쳐나갈 용기는 없었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이동하니 3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도착한 호텔은 공항 바로 앞의 Scandic CPH Strandpark 호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아주 굿초이스였다.
첫인상의 '첫'은 내가 정한다.
이번 여행의 코펜하겐에 대한 '첫인상'을 나는 이 호텔 프런트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폭풍 같던 도착 후 한 시간이 내 여행의 기대감을 꺾게 놔둘 수는 없었다.
프런트에서 나를 맞아준 건 중년의 남자 직원과 도착 전 통화했던 젊은 여자직원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도 안도감에서인지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들은 정말 친절했고, 다행히 나는 그제야 상대방의 친절을 알아차릴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조식이 포함된 싱글룸을 결제하고, 간단하게 층별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 모자를 눌러썼음에도 나의 피곤함이 보였는지 공항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많이 지쳐 보인다고 했다. 뿌엥 하며 쏟아낸 내 사연을 들은 그 둘은 대 공감의 리액션을 해주며 호스트가 너무 무책임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코펜하겐에는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 보다 더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아마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그 한 사람 때문에 이 도시를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라며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 공감과 위로 가득한 스몰토크를 하고 나니 마음이 좀 풀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코펜하겐 신고식..
사실 진짜 마음이 더 풀린 건 호텔 방 문을 열고서였다.
북유럽 스타일의 파스텔톤으로 깔끔하게 디자인된 방은 아늑했다. 키가 큰 그들에게 맞춰져서 인지 160cm인 나에게 침대는 점프를 해야만 올라갈 수 있었고, 샤워기와 세면대, 변기 모두 높았다. 그리고 지속가능성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샴푸, 컨디셔너, 샤워젤을 제외한 나머지 어메너티는 모두 유료로 별도 구매를 해야 했다. 다행히 나는 로밍센터에서 받은 칫솔과 치약, 폼클렌징과 기초화장품 등 을 가지고 있어서 하룻밤 보내기에는 충분했다.
밤 12시가 넘은 시각이라 한국도 활동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남편과 가족들에게 호텔에 들어왔으니 걱정 말라는 전화를 하고 나는 빠르게 나머지 호텔을 예약해야 했다. 그전에 우선, 씻고 싶었다.
씻으려 샤워실에 들어가는데 골반쪽 파스를 붙여둔 곳이 가려워 파스를 떼어내는데 아차..... 순간 눈앞이 번쩍 하면서 따끔함에 '윽' 소리를 질렀다.
너무 오래 붙이고 있어서 저온화상을 입은 것 같다. 살점이 동그랗게 떨어져 나간 것이다. 정말 육성으로 '가지가지한다'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그 채로 어금니 꽉 깨물며 샤워를 하고 비상용 밴드를 임시로 붙여두고 침대로 뛰어들었다.
우선 나는 내일 짐 받을 호텔과 나머지 4일의 숙소를 예약했다. 다행히 짐 받을 호텔은 남은 방이 있었고, 다른 호텔도 여러 개 알아둔 덕분에 빠르게 남은 방을 찾아 예약했다. 이 상황에서 다시 에어비앤비를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안전제일..)
순식간에 예산보다 두 배가 넘는 금액의 숙소를 예약하고 나니 이게 맞나? 싶었다. 그때 내 케이스를 담당했던 코펜하겐 에어비앤비 직원이 메시지가 왔고, 숙소를 구했냐며 안전을 걱정해 주었다. 그제야 나는 걱정해 줘서 고맙다며 지금 공항 근처 호텔에 왔고, 여러 가지 환불이나 보상 관련해서는 한국 지사와 연결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흔쾌히 괜찮다며 안내해 주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내가 알게 된 에어비앤비 이용에서 새롭게 알게 된 점을 몇 가지 공유한다.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연락이 안 되면 한 시간의 유예 시간이 주어지고, 이후에는 자동 취소가 된다.
> 자동 취소된 숙소 비용은 100% 환불이며 24시간 내 처리된다. (카드사마다 다를 수 있음)
호스트의 잘못으로 예약이 취소된 경우 '보상금'을 신청할 수 있다.
> 보상금은 새로 예약한 숙소 금액의 최대 3박 혹은 30%까지 보상받을 수 있다. (하지만 방문 나라와 숙박 일 수 등에 따라 차이가 있음)
보상금은 상담 직원분과 꼭 통화 후 안내받고, 결제한 영수증을 모두 메일로 보내면 심사를 통해 결정된다. (나는 총 이틀 정도 걸렸다)
나머지 숙소도 모두 예약했고, 에어비앤비 보상금까지 신청하니 시간은 벌써 새벽 두 시.
한국에서 출발 후 약 22시간 만에 찾은 지상에서의 휴식. 쌓인 피로와 잠이 몰려와 나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나는 아직 여행 첫날의 햇살과 바람, 소리를 기억한다.
오전 7시, 눈을 번쩍 뜨고는 황급히 커튼을 열어젖혔다.
파란 하늘과 회색구름, 붉은 벽돌 건물, 거기에 창문에 맺힌 물방울까지. 나 정말 북유럽 왔네!!
참고로 나는 여행지에서 늦잠을 안 잔다. 아침이 오는 풍경을 감상하거나 산책과 조깅을 하기도 하고, 그렇게 여유롭게 시작하는 아침이 여행지에서 특히나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왠지 내가 그 도시에 더 잘 녹아드는 것 같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에 빠르게 씻고 뭔가 기록하고 싶을 것 같은 마음에 노트북을 챙겨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그리고 곧 뭉클해질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는데.....
레스토랑의 풍경은 마치 슬로 모션을 건 듯 다가왔다. 잔잔하게 울리는 그릇과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 따뜻한 햇살과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의 풍경까지. 어제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 같았다.
나는 풍경이 잘 보이는 긴 식탁에 자리 잡았다. 모든 음식은 정말 너무 신선하고 맛있었는데, 특히 빵과 치즈, 요거트는 박수가 절로 나왔다. 유럽에서 조식으로 감동받아 보기는 처음.
속으로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그야말로 그 풍경 속에 내가 녹아든 듯했다.
지금 이 순간의 감동을 잊기 전에 노트북을 열어 오빠에게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꼭 같이 와보자는 그리움을 담아 일기 같은 메일을 보내고, 숙소 이동 등으로 변동이 생긴 여행 일정도 재정비를 했다. 저녁 까지는 여벌 옷이 더 없기 때문에 날씨가 더 추워지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날씨도 지내는 동안은 계속 좋았고, 변경한 숙소도 가까운 거리라서 큰 변동은 없었다. 마음껏 걷고, 보고 즐길 일만 남았다.
맛있게 조식을 먹은 후 북유럽 디자이너들의 가구로 도배된 로비를 지나 항구 근처를 산책하러 나갔다.
쨍 한 아침 햇살이 바다에 그대로 부딪혀 생긴 윤슬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고,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 사진에서나 보던 작고 멋진 요트와 배가 줄지어 정박해 있는 모습, 그 반대편에는 초록 풀과 꽃이 넓게 펼쳐진 정원이 있었다.
그 사이를 걷는 나. 그 풍경과 공기, 바람을 맞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정말 혼자만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오늘의 첫 행선지는 우선 짐을 받기 위해 예약해 둔 호텔. 나의 코펜하겐 방문 이유 중 하나였던 '빌라 코펜하겐'으로 간다. 가능하다면 얼리 체크인을 해두고 도시를 한번 훑어볼 계획으로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고 나섰다.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 준비에서 잘했던 것 중 하나는 혹시 몰라 챙긴 샤워용품과 옷차림. 비상시에 용품을 쓸 수 있었고, 첫날 짐이 오지 않아 비행기 출발 복장 그대로 입어야 했는데 혹시나 싶어 레깅스가 아닌 구김이 잘 안 가면서 깔끔한 캐주얼 복장으로 입었는데, 여행 첫날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택시를 타지 않겠어'라는 나의 다짐은 첫날 바로 무너졌다.
시간 절약이 필요했고, 택시를 타고 도시로 들어가는 길을 훑어보고 싶었다.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택시에 올라 '빌라 코펜하겐'으로 가는 내 여행의 시작. 이제부터 하루 2만 보 걷는 여행을 소개한다.
이번 편의 마무리는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마주한 코펜하겐의 맑은 날씨. 아름다운 들판과 호수, 공원, 집, 그리고 사람들의 여유로운 주말의 모습을 담은 영상으로 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덧붙이는 다음 화 예고.
이미지로 대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