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2-2021.04.08
왕가위는 이 영화에서도 역시나 시간에 관한 사유의 한자락을 펼쳐 보인다. 시대의 공기를, 빗물 한 방울과 흩날리는 눈발들마저도 집요하게 담아내서 당시의 분위기를 한껏 음미하게 만든다. 어쩌면 잊혀 가는 것들에 대한 헌사인가. 흥망성쇠를 겪는 엽문의 일대기에 과거에 갇혀 사는 궁이의 서사를 엮어내는데다가 무리하듯 일선천의 이야기 조각까지 꿰내려는 왕가위의 시도에선, 무드로 둘러싸였던 지난날 자신의 영화들과는 조금 다른 노선을 택하겠다는 마음가짐이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에는 역사 문헌에 나올 법한 단체 사진에 과거를 묻어두고, 격동하는 시대를 관통하고야 마는 인물들이 나온다. 과거를 향한 미련에 얽매여 돌아봐야만 하는 삶과 미래를 바라보며 돌아보지 않는 삶을 택한 자들의 이야기도 동시에 녹아 있다.
각기 다른 인물들이 짊어진 상실을 창석을 매개로 담담하게 펼쳐놓는다. 기교를 줄여 공간을 응시하는 이 영화는 어찌 보면 일상의 공간을 비일상화하는 미묘한 영화적 체험을 유도하고 있다. 미영의 커피숍, 유진의 산책길, 성하의 카페, 주은의 술집, 창석의 전화 부스. 이런 공간 속에선 짙게 깔린 공허한 무드를 파고드는 생경함이 드문드문 느껴진다. 창석과 유진을 어둠에 가둔 채 응시하는 쇼트가 기억에 남는다. 직관적으로 보면 굉장히 무겁게 받아들일 법 했지만, 이따금 명멸하는 희미한 담뱃불이 그런 장면들을 마냥 침잠으로만 밀어 넣는 대신, 조금 더 관조적인 혹은 미약하게나마 산뜻한 느낌을 환기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내겐 김종관 감독의 첫 영화다.
스포일러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몇 가지 물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물음은 여러 요인들 중에서도 우선 헐거운 인과성, 그러니까 구멍이 숭숭 뚫린 서사의 맥락에 기인한다. 왜 사토코(아오이 유우)는 마음을 바꿔 남편을 돕는가, 영화를 보는 사토코의 얼굴 표정의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사토코의 밀항을 진정 남편이 밀고한 것인가,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가 어떤 목적으로 몰래 필름을 바꿨는가와 같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영화의 서사 구조는 평이하다 못해 의도적으로 헐겁게 구축된 느낌도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매혹적인 이유는 그러한 허점을 보완하는 독특한 시도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감히 넘겨짚건대 영화의 동력원은 첫째로 종종 클로즈업되는 인물의 얼굴이고, 둘째로는 목도한 현상에 대해 인물이 드러내는 리액션에 있다.
다소 느슨하지만 최소한으로 기능하는 서스펜스, 미장센에 묻어 있는 1940년대 일본의 정서, 소재에 관한 역사 성찰적 접근, 첩보나 멜로 등이 배합된 장르적인 질감 등이 영화를 향한 감상 포인트를 다채롭게 가공하고 있지만 정작 이 영화 자체는 앞서 말한 특징적인 몇몇 표지로부터만 동력을 얻는 듯 보인다. 그 동력원을 통해서 가닿는 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쉽게 단언할 수 없다. 마냥 몇 가지 키워드로만 집약하고 싶지 않다. 이런 모호한 영화들의 특징이라면 품고 있는 다채로운 기운을 음미하는 과정에서 문득 다른 사유로의 확장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성찰적인 뉘앙스를 풍겼던 이 영화에선 어쩐지 끝내 유사쿠가 망명하여 자국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는 이야기, 대의를 위해 국가를 저버린 양심적인 개인들의 서사는 결국 소멸되고야 만다. 대신 영화가 끝을 내는 방식은 사토코의 울음소리와 함께 삽입되는 몇 가지의 문장들이다. 어쩐지 불필요해 보이는 결말부의 문장들이 과연 불투명한 매혹성을 강화하는지 석연찮은 의구심을 키우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아직까지는 이 모호한 인상을 뿜어내는 영화에 호의적이라는 사실이다.
아래의 글도 같이 링크로 남깁니다.
https://brunch.co.kr/@cena0223/99
이 영화가 좋은 이유는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다. 르윈이 부르는 포크송들이 단순히 음악 영화에서만 허용되는 장르적 몰입의 순간을 만드는 데에만 일조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에게 음악은 평생의 꿈이자 생계 수단이고 현존하는 나를 지탱한다. 르윈은 자신의 모든 걸 투영한 나만의 음악이 그래서 소중하다. 영화의 형식과 내용(굳이 분리하자면)의 조응이 매우 뛰어나다고 느꼈다. 직선 대신 원운동, 그러니까 멀끔한 원이 아닌 울퉁불퉁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원을 그리면서 배회하는 르윈의 인생처럼, 영화의 시작과 끝이 절묘하게 대응된다. 영화가 끝나도 르윈의 퍽퍽한 삶은 계속된다. 지리멸렬한 인생의 반복 속에서 방황하는 르윈의 순환적 움직임이 문득 프레임을 뚫고 나와 현실의 르윈들을 파고드는 직선적인 움직임으로 탈바꿈하는 듯한 마법 같은 매개 효과가 일어나는 듯하다. 르윈은 개인적으로 공감이 많이 가는 캐릭터다. 보통 영화 속 인물에게 감정 이입을 안 하는 편인데, 르윈에게까지 그런 냉랭한 태도를 유지하고 싶지는 않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