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6-2021.04.01
내일은 없다며 즉흥에 몸을 맡기는 인물의 불안정한 삶을 매력적으로 가공하는 왕가위의 센스가 눈에 띈다. 왕가위 영화 중에 가장 통속적인 인상을 주긴 하지만, 영화 곳곳에선 그만이 뽐낼 수 있는 특유의 감각이 발견되기 때문에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소화의 세계엔 결국 지리멸렬한 몸부림만이 있다. 소화는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줄 수도 없고, 사소한 약속 하나 제대로 지킬 수 없고, 끝내 자신마저 낭떠러지로 내몰고 만다. 소화는 종종 낭만을 꿈꾸지만 그가 속한 암담한 뒷세계는 절대 낭만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소화는 <아비정전>(1990)의 아비처럼 정착하지 못하는 왕가위 영화의 인물들의 원형이 된다.
P.S. 한국판 제목인 <열혈남아>보다는 홍콩판의 <왕각가문(몽콕 카르멘)>을 그대로 살리는 편이 더 나은 선택으로 보인다.
느린 템포로 서서히 조여오는 스릴감을 곁들인 풍자극이다. 이름조차 공개되지 않는 유령 같은 대필 작가 주인공이 의도치 않게 수렁으로 빠져드는 구조가 흥미를 자극한다. 서사 자체가 치밀하지는 않고 비밀을 파헤치려는 동력, 사건 전개를 위한 디테일한 장치들이 비교적 심심해서 매력이 조금 떨어지지만 후반부의 인상적인 연출 덕에 작품의 정체성이 느껴지긴 한다. 이 영화의 위트 있는 화법에 숨겨진 묵직한 담론들은 마냥 가볍게 지나치기만은 어렵기도 하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애덤 랭 역시도 자신의 처지를 모른 채 당하고만 있었던 입장으로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배회하다 소멸될 수밖에 없는 유령들의 이야기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왕가위 영화의 매력이 부유하는 도시(홍콩) 속 청춘들의 모습에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왕가위는 사막 한가운데의 떠돌이들을 통해서도 이처럼 매력적인 텍스트를 구축할 수 있구나. 굉장히 놀랐다. 결국 왕가위의 세계를 지탱하는 건, 형식적인 요소나 배우들의 연기 등이 아닌 그만의 뚜렷한 사유 체계일지도 모른다. 다른 평자들이 말하듯 왕가위의 영화에선 늘 시간과 기억, 관계를 향한 탐구가 진행되어왔다. 그의 탐구 대상은 때로는 대사나 내레이션 등의 직설적인 수단으로, 때로는 은유적인 이미지와 음악 등으로 다층적으로 가공되면서 관객에게 확장된다.
이 영화의 서사적 배경 특징은 왕가위의 연구 테마를 바라보는 데 있어 더욱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시공간과 인물들이 분명하게 다르다. 홍콩 같은 도시가 아니라 황량한 사막이다. 20세기 이후의 현대가 아니라 남송-금국-몽골이 대립하던 저 옛날 어딘가의 시점이다. 근대화 이후 소외된 부품 같은 현대인들 대신 무협 소설 《사조영웅전》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동사서독>은 다양한 인간 군상을 탐구하는 데 있어 가장 매력적인 왕가위의 영화가 아닐까 싶다.
다양한 장르물의 질감을 덧대고도 방향을 잃지 않은 채 기괴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점이 인상깊다. 사회구조에 따른 다양한 인간상, 초자연적인 현상과 심리 요소들이 얽힌 복합적인 소재를 추리극을 통해 다루면서도 밸런스를 끝까지 유지하는 솜씨 또한 인상적이다. 기괴한 연쇄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음산한 스릴러라는 점에서 데이빗 핀처의 <세븐>이 자연스레 오버랩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사건에 얽힌 다양한 인물들의 입체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주요 인물의 변모 과정 또한 놓치지 않기 때문에, 영화의 어느 시점부터는 마냥 미스터리물 혹은 수사극로서의 매력을 넘어서는 독특한 접근이 돋보인다. 사실 진범을 밝히는 과정에서의 장르적 쾌감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 아마 감독이 원했던 건 장르물의 형식을 빌려서 전하고자 하는 바를 시청각적으로 독특하게 가공하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P.S. 선혈이 낭자한 신체 훼손 등의 고어 요소가 적나라하게 표현되니 취향에 맞지 않으면 감상에 주의하세요.
고질라와 콩의 인상적인 대격돌은 다채로운 형광빛으로 둘러싸인 빌딩 숲에서 벌어진다. 배경은 과할 정도로 화려하고, 괴수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호쾌하고 스피디해서 게임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는 점이 어딘가 찜찜하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일단 다짜고짜 부딪히는 괴수들의 모습은 분명히 감독과 제작진이 의도한 공식에 따라 기능한다. 분명히 영화는 관객에게 장르적인 쾌감을 선사하는 데 오롯이 집중한다. 문제는 이 영화를 보면서 짜릿한 쾌감 대신 뭔지 모를 공허감이 맴돌았다는 점이다. 어쩐지 전편들에 비해 이번 영화는 초월적 존재들이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듯하다. 자연의 섭리 혹은 신적인 존재로서 은유성을 띠는 괴수들의 특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고질라의 매력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에서 기도라를 무력화시킨 후 타이탄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고질라의 위용이 유독 이 영화의 고질라와는 괴리감이 들기도 했다. 또한, <고질라>의 후반부에 고질라가 방사능 열선을 뿜는 장면을 떠올린다면 이 영화의 고질라는 그냥 콩과 싸우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