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9-2021.04.15
검은 옷으로 자신을 칭칭 감싼 채 만나자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일부러 멀리하는 여자가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과연 파니가 스스로를 고립시킨 걸까, 세상이 파니에게 고독을 강요한 걸까.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있다. 왜 그럴까, 뭐가 문제일까라고 되뇌면서 변화와 개선에만 목매는 일들, 이런 자잘한 고뇌의 순간들을 어쩌면 잠시 접어둬야 하는 건 아닐까. 작가인 파니의 엄마는 평론가들의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딸의 앞날을 걱정하며 더 나은 인생을 갈망하는 따위의 고민들만 늘어놓고 있지만, 정작 파니는 가족과 친구들이 아닌, 사기꾼인지 무속인인지 외계인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르페오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오르페오는 말한다. 너의 뒷모습이 과거고, 앞모습이 미래니까 언제나 현재를 살아갈 때는 과거와 미래가 함께 가는 거라고. 그리고 시계는 차지 말라고 한다. 시계는 항상 몇 시인지만 알리려고 하니, 그냥 '지금'이라는 시간만 갖고 앞으로만 나아가라고 말이다. 그는 곧 현존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라고 외친다. 물론 삶을 꾸려나가는 데 있어 발전을 염두에 둔 성찰과 개선을 향한 의지들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전에 필요한 게 있다. 과거의 나도 지금의 나도 미래의 나도 언제든지 나는 나일 뿐이다. 그걸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누가 날 수용할 수 있는가. 나는 내가 보듬어주어야 한다. 그 누구도 나를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없으니, 나부터 나에게 좀 신경을 써보자는 말이다. 우리는 주체적인 삶, 더 나은 삶에 필요한 것들을 찾기 위해 열심히 헤맨다. 근데 사실 그것들이 내게 들러붙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냥 삶이라는 게 그렇다.
절망과 고뇌의 순간들을 마냥 당돌하면서도 따스한 화법으로 풀어내는 위트 있는 영화다. 매번 죽음을 생각하면서 관을 짜고 고독을 씹는 파니와 악착같이 살아보려는 오르페오가 해골과 같은 모습으로 분장한 뒤 춤을 추는 상황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둘은 모두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타자들이다. 차마 죽지 못해 삶을 겨우겨우 꾸려가는 여자와, 살고는 싶은데 자꾸 아른거리는 죽음의 순간들에 고통받는 남자의 만남이 아닌가.
이 영화에선 인물의 혼란스러운 내면이 독특한 플롯의 연결을 통해 관객과 동화될 수 있다. 영화를 자세히 뜯어보면 연결되는 사건들 사이의 인과 관계를 따지는 작업이 무용하게 보이기도 한다. 반복되는 장면들과 변주가 이루어지는 특정 요소들이 앤서니의 내면세계를 형상화하고, 관객에게 생생한 체험의 장을 열어 준다. 관객은 환자를 포함한 주변 인물들이 겪게 되는 어려움을 관찰하는 형태가 아니라 환자 주체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형태로 수용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몰입도가 뛰어난 영화지만 한편으로는 관객을 교란하여 능동적인 감상을 유도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감독이 되기 전부터 극작가로 활동했던 플로리앙 젤레의 다음 연출작이 몹시 기다려진다.
세상이 그를 이해하려 들지 않으니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무도 그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살피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아프다는 그의 신음을 들은 채도 안 하고 오히려 그의 행동들을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난동으로 인식한다. 물론 람보가 잘했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영화 속의 대령도, 극 바깥의 관객도 모두 람보가 울부짖을 때 더 이상 그를 향해 건넬 말을 떠올릴 수 없다. 왜 민간인들을 죽이고 사회를 어지럽혔느냐는 식의 추궁 따위는 의미가 없다. 끝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람보의 입을 통해 그의 상흔을 맛볼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이 영화가 매력적인 SF 영화로 기능할 수 있다면 그 원동력은 시각적으로 유려하게 구현된 극의 무대에 있다. 디테일한 질감과 장엄한 스케일을 모두 챙기면서 미니멀한 색감까지 보기 좋게 구성하는 미장센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 흰색이 이렇게나 근사하게 녹아들 수 있다는 걸 느끼기도 했다. 어딘가 구멍이 뚫린 듯한 비약적인 전개와 밋밋한 서사의 굴곡이 극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점이 다소 아쉽다. 기억이라는 소재는 주체의 실존과 맞닿아 있기에, 어떤 '나'를 진짜 '나'라고 할 수 있는가 등과 같은 질문들을 생성해내지만, 영화 자체는 그러한 담론들을 향해 깊이 있게 파고들지 않는 듯 보인다.
이미지 출처
- http://egloos.zum.com/supul2/v/4269019
- 네이버 영화
-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