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30-2021.05.06
지구를 침략하러 왔으면서 개념을 수집하는 외계인들이나 침략당하는 마당에 외계인과 협력하고 대화하는 인간이나 다들 어설퍼 보인다. 어딘가 빈틈이 느껴지는 설정이지만 어쩐지 그 빈틈이 영화의 기묘한 활기를 만들어낸다. 산책과 침략, 제목부터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 역시 흥미롭다. 인간의 몸을 빌려 인간들이 사는 장소 구석구석을 활보하다가 기회가 될 때마다 인간이 가진 개념들을 학습하는 섬뜩한 외계인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무턱대고 너는 인간이고 너는 외계인이라며 존재를 규정지을 수 있는가.
신지와 나루미를 통해서는 인간다움 혹은 인간성을 성찰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교회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을 가져가려는 신지의 모습이 기억난다. 구체적으로 말해주세요, 이미지를 생생하게 그려주세요, 신지는 여느 때와 같이 한껏 준비하고 사랑의 개념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하지만 교회의 성가대 아이들과 선생님은 마치 가져가 볼 테면 가져가 보라는 듯 저마다 사랑은 이런 거야, 라며 늘어놓기 바쁘다. 영화에서 인간이 외계인에게 뺏기는 개념들은 그 관계의 층위에 있어 우열을 가릴 수도 없고 효용성이나 실효성을 따질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인류 최후의 보루가 사랑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건 그만큼 사랑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이미지나 발화되는 속성들을 구분 가능한 지표들로 형상화하기도 힘들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랍스터>는 이 영화보단 상대적으로 좁은 영역에서 사랑을 탐구하고 있는데, 두 영화 모두 사랑을 실체와 허상을 넘나드는 기이한 관념이자 이미지들의 어떤 총체로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잠시 사랑 이야기에서 나와서, 외계인이 개념을 뺏는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기표나 기의 같은 언어학 지식을 거쳐 사유하지 않더라도(사실 내가 소쉬르나 비트겐슈타인 등의 언어 관련 사상에 무지하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을 생각이다) 충분히 이 영화에서 묘사된 어떤 지점들에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 어떤 단어가 있다. '외로움'이라고 해보자. 발화된 생각들이나 언어화된 개념들이나 구체적인 이미지들, 그러니까 '외로움은 혼자가 됐을 때 느끼는 공허하고 쓸쓸한 느낌이야'라든가 혹은 '고요한 사막 한가운데 한 남자가 희미한 달빛만을 받고 있는 이미지'같은 것들이 과연 '외로움'이라는 추상적인 관념과 완벽하게 대응되는가? 그렇지 않다. 영화에선 게다가 '일'이라는 개념을 뺏긴 인간이 놀이 혹은 유희에만 집중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 개념들은 이항 대립 관계에 놓여 있지는 않다. 일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는가, 난 대답할 수 없다. 어떤 개념을 잃으면, 그 빈자리는 도대체 무엇으로 채워져야 할까. 보고 났더니 재밌는 생각들이 제법 많아지는 영화는 오랜만이다.
길을 가다 멈추고 문득 아래를 내려다본다. 난간에 기대서 저 아래 차를 수리하는 정비공들을 보며 시답잖은 잡담을 나눈다. 영화는 떠도는 인물들의 시점 쇼트를 자주 활용하는데, 이러한 인물들의 시선은 건조한 응시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공감하기엔 그 감정의 깊이가 얕아 보이지만, 그냥 무시하기엔 흥미가 생기는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게 이 영화의 매력이다. 잠깐의 마주침은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 틈에서 피어나는 낯설고 불편한 기운들은 응큼하게 인물들의 주변을 맴돈다. 티가 날 듯 말 듯 하게 말이다.
저마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은 자연과 도시를 오간다. 어쩌면 자연은 답답한 관계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방의 공간인가. 스쳐가는 사람들은 친구일 수도, 이방인일 수도 있다. 친밀함과 생경함 그 어딘가를 머금은 현대인들의 텁텁한 인간관계가 드러난다. 레이의 엄마는 데이비드와 대학 동창인데, 각자의 강의실은 달랐는데 같은 층을 공유했다는 이유만으로 금세 서로를 친구처럼 대한다. 레이는 처음 만난 앨리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려 하지만, 앨리스는 레이를 가볍게 여긴다. 만남은 늘 설렘과 긴장을 동반한다. 영화는 그 순간 피어나는 미묘한 균열을 포착하고 있다.
핸드헬드로 인물을 따라가고 타이트한 클로즈업으로 숨죽여 포착하는 시선이 마치 초창기 다르덴 형제의 눈과 닮아 있다. 다르덴의 <로제타>, <아들>, <로나의 침묵> 등에서 드러난 개인의 죄의식과 무력감, 고뇌의 흐름 속에서 내린 선택들이 이 터키인 감독의 영화에서도 느껴지는 듯하다. 영리한 상황 설정을 통해 다채로운 인간상을 제시하고 은근슬쩍 풍자하는 재치도 느껴지는데, 이 지점에서 카라한은 다르덴과 달라진다. 기숙 학교라는 특수한 공간 설정을 내세워 기성세대의 권위적인 폭력을 드러내기 때문에, 대상을 향한 비판적인 논조가 살아 있는 시선을 숨기지는 않는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공존하는 서사를 통해서 그 대비를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분명히 이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 중 하나는 주인공 유수프를 포착하는 카메라다. 서로 추궁하고 분열하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담아낼 때 침대 뒤편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움츠러든 유수프 역시 프레임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 쇼트의 화법은 그래서 더욱 강렬하다. 관객에게 무게추를 옮기는 유수프의 응시에 담긴 응축된 감정들이 인상 깊게 전달된다.
전쟁을 마주하는 혼란스러운 시대상과 낭만적인 영상미가 대치를 이룬다. 불편하고 추악한 요소들과 순수한 감정들 역시 함께 영화를 떠다니면서 괴리감을 발산한다. 극중 오다(파울라 베어)는 또래의 십대 소녀답지 않게 해부나 죽음, 인체 실험 따위의 것들에 익숙하게 반응하는데, 실제로 배우가 십대의 나이임에도 매우 훌륭하게 이 모호한 무게감을 살린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라서 더 인상 깊게 봤는지도 모른다. 극중 오다와 슈납스의 만남과 그에 얽힌 사연들은 다소 작위적이긴 해도 두 사람의 이야기가 어긋난 사랑 등의 전형적인 로맨스 공식으로 귀결되지는 않는 인상을 준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 전주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