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1.04.23-2021.04.29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 (고레에다 히로카즈, 2004)
영화는 시종 감정에 호소하지 않으며 절제하고 관조한다. 카메라는 감상에 매몰될 법한 특정한 순간을 응시하는 대신, 들끓는 순간과 순간의 사이, 그 침잠하는 여백을 응시해서 관찰자로서의 거리를 유지한다. 종종 클로즈업되는 피사체들, 그러니까 닳아 없어진 크레파스 조각이나 동전 몇 푼들은 시간의 경과, 비극성의 강화 등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장치로 영리하게 활용된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다가 문득 생긴 의문이 있다. 분명히 이 영화는 감상에 젖어드는 걸 피하려고 하거나,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려는 걸 지양하는 듯 보이는데, 어째서 아키라 등의 주요 인물의 시점 쇼트를 종종 동원해서 주체의 시선을 통한 감정적 몰입을 은근슬쩍 유도하는 전략을 사용했을까. 이건 희망이 사라져가는 인물을 위로하려는 감독의 따스한 손길일까, 어려움에 처한 인물들의 감정을 기만적으로 다루는 듯한 경솔한 터치일까. 의뭉스러운 인상이 맴돌긴 해도 이 영화는 분명히 매력적인 텍스트로 기능할 수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구축한 극영화의 세계가 너무나 섬뜩하고 현실적이어서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짓이겨버리는 듯한 그 묘사 자체가 인상적이다. 온기와 냉기가 공존하는 히로카즈의 시선이 잘 드러나 있는 영화다. 내겐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첫 영화다.
<호문쿨루스(ホムンクルス)> (시미즈 다카시, 2021)
타인의 마음속 깊숙한 어딘가를 꿰뚫어볼 수 있다는 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두개골에 구멍을 뚫어 지각 방식에 변화를 주려는 듯한 독특한 설정이 눈길을 끈다. 엄청난 분량의 원작 만화(단행본 기준 15권)를 극단적으로 압축하여 각색한 이 영화는 매끄러운 서사 전개는 포기하고 시각화된 내면의 트라우마, 기묘하게 형상화된 감정과 기억의 덩어리들의 묘사 자체에 무게를 싣는다. 현실감 있는 고도의 시각 효과가 아닌, 그래픽의 질감이 묻어나는 비현실적인 묘사들은 이상 심리의 기이한 표출을 유도하기 위해서 기획된 듯 보인다. 반전과 복선 등 장르 문법의 활용과 더불어 상징이나 비주얼 측면에서의 피상적인 쾌감 요소들이 극을 계속 지배하는데, 어쩐지 이런 연출적 접근들은 유기적인 총체로서 영화를 지탱하기보단 분열된 전시품들처럼만 느껴진다.
<2030(NUOC)> (민 뉴엔보, 2013)
영화가 상상하는 2030년의 베트남의 모습은 이상기후로 인해 해수면이 급격하게 높아져 사방이 물로 가득한 곳이다. 수상 가옥이나 배 위에서의 생활은 사실 현대 베트남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문화이기 때문에 이 영화에 묘사된 생활상이 아주 낯설어 보이는 건 아니다. 가까운 미래상을 그리는 SF 영화에는 현시대의 모습들이 은근슬쩍 투영되곤 한다. 이때 문득 달라진 디테일이 와닿는다. 수상 오두막의 상단부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의지하는 사람들의 고단함, 식량이 바닥나서 그물에 자그마한 물고기조차도 잡히지 않는 냉혹한 현실이 빚어내는 자질구레한 차이들 말이다. 그래서 마냥 서정적이고 아름답게만 보이는 물로 뒤덮인 정경들은 인물들이 처한 현실과 대비를 이루면서 괴리감을 강화한다.
한편 영화를 보며 아쉬웠던 건, 국가나 기업이 연루된 거대 담론과 사람 사는 모습이나 여러 감정들이 뒤얽힌 자그마한 서사들 사이를 오가는 감독의 시선이 도무지 어디를 향해 있는지 말끔하게 와닿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의 무대는 바다와 강과 호수와 연못이 하나로 뒤섞여버려서 이젠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 그런 혼란스럽고 막막한 삶이 펼쳐지는 공간이다. 이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인물들의 사연과 호응하며 매력적인 사랑 서사 구축을 도울 수 있었으나, 영화 자체만으로 보면 다소 아쉬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강렬한 치정극을 원했다면 거대해 보이는 몇몇 설정을 쳐내고 작은 줄기의 서사에 집중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더 랍스터(The Lobster)> (요르고스 란티모스, 2015)
이 아찔한 이분법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뜨겁게 사랑할 수 있을까. 다른 그 무엇보다도 세계관에 녹아든 설정이 참 인상깊다. 사람과 동물, 하나와 둘, 싱글과 커플. 44의 반이라는 신발 사이즈는 존재할 수 없고, 44와 45만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 지독한 논리. 이때 영화 속 세계가 마치 44의 반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아니라, "존재해서는 안 되는" 세상처럼 묘사된 게 흥미로웠다. 도입부에도 분명히 호텔 직원이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고, 양성애자는 선택지에 없다며 말하는 신도 있지 않은가. 이거 아니면 저거, 그 중간 어딘가는 있을 수 없다. 문제는 현실 속 우리들의 삶에선 그렇게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양극단의 이분화 논리가 적용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뒤틀린 우화다. 이 기이한 시공간에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개념을 탐구할 수 있는가. 아니 진정한 사랑은 존재하는가? 이쯤 되면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2002)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 <더 랍스터>의 사랑은 실체가 있는 무언가로 묘사되면서도 허구 그 자체로 취급되면서 통렬한 냉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