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1.05.14-2021.05.20

by 드플레

<코미디의 왕(The King Of Comedy)> (마틴 스콜세지, 1982)


욕망을 연료 삼아 매 순간 도박을 즐기는 승부사들이 있다. 먼저 <코미디의 왕>의 루퍼트 펍킨이 생각나고 뒤이어 <언컷 젬스>(2019)의 하워드 레트너가 떠오른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스콜세지가 사프디 형제의 연출작인 <언컷 젬스>의 제작에 관여했다는 사실도 제법 흥미롭다. 두 영화의 남자들은 무언가를 강하게 욕망한다. 이러한 욕망의 표출은 각 영화에서 아주 강박적인 행태로 묘사되는데, 사회적 통념과 어긋나는 기이한 행동들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코미디언 데뷔를 향한 펍킨의 욕망은 과대망상과 기행으로 이어진다. 나는 펍킨을 보면서 소름이 돋았던 순간이 종종 있었다. 드 니로의 전성기 출연작을 다 챙겨 보진 못했지만, 루퍼트 펍킨만큼 독보적인 존재감이 있을까 싶다. 스콜세지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리며 펍킨의 강박과 집착이 가닿는 지점을 불분명하게 만든다. 남들은 펍킨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자신만의 소우주를 창조하고 그 세계의 원칙에 따라 살아간다.


자신만의 논리를 끝까지 관철시키는 펍킨은 뉴욕 어딘가에서 <언컷 젬스>의 레트너와 만난다. 하워드 레트너 역시 그만의 소우주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 그에게 도박, 그러니까 불확실한 가능성에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지는 행위는 일종의 자기 확신에서 비롯된다. 펍킨의 기행 역시 자신을, 자신만의 세계를 확고히 믿고 있는 데서 출발한다. 이 믿음이 소우주에서 벗어나 세상과 조우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언컷 젬스>의 세상은 레트너가 활개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렇게 레트너는 세공되지 않은 보석(Uncut Gem)으로 남는다. 펍킨은 어떻게 되었는가. <코미디의 왕>의 모호한 묘사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다. 정말로 펍킨이 유명 코미디언이 되어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면, 그만의 논리가 세상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암시로 작용할 수 있겠다. 하지만 결말부의 묘사가 펍킨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쩌면 스콜세지의 시선이 사회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펼치는 레트너를 더 이상 신음하지 않도록 만든 사프디 형제의 선택보다도 잔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P.S. 드 니로 특유의 멋쩍은 표정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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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의 왕(The King Of Comedy)>



<빅 피쉬(Big Fish)> (팀 버튼, 2003)


이런 영화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극장에 간다. 팀 버튼은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했고, 왜 그래야만 했는지 영화를 통해 증명한다. 개인적으로 실사 영화 중에서도 현실감이 들러붙은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라 판타지에 큰 감흥을 느끼는 타입은 아닌데, 어쩐지 팀 버튼의 <가위손>이나 <빅 피쉬>라든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을 볼 때면 장르를 향한 묘한 거부감이 눈 녹듯 사라질 때가 종종 있어서 제법 신기하게 느껴진다.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그럴듯한 허구를 동원하는 일은 생각보다 낯선 일이 아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가족이나 지인과 친구, 애인, 직장 동료들과 스몰 토킹부터 사뭇 진지한 이야기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대화를 나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뱉는 말에 무의식적으로(혹은 의식적으로) 약간의 조미료를 더한다. 어떨 때는 도저히 드러내기 싫은 치부를 감추기 위해, 아니면 상대방의 기분을 섬세하게 고려하는 차원에서, 가끔씩은 도통 지루하고 따분하다 싶을 때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별생각 없이 각자의 이야기를 가공한다.


본질적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술 문화는 유동성과 맞닿아 있다. 인쇄술 이전부터 인류와 함께해 온 이 구술의 마력은, 비록 진실과 멀어질 가능성을 내포하더라도 매혹적인 형태로 오랫동안 가공되어 세대를 거쳐도 잊히지 않고 전승되는 데에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아기자기한 러브 스토리, 부모님의 청춘 시절 이야기는 아들에게, 손주들에게 전염되며 또 다른 생명력을 획득한다. <빅 피쉬>는 은유와 매개물로 얽힌 거대한 구술 문화의 장이다. 에드워드 블룸은 한 마리의 빅 피쉬이자 풍성한 이야기 자체이고, 블룸의 이야기는 아들과 며느리, 아내, 주변 지인들에 스며들어 한 사람의 인생을 타인과 매개하고 있다. 원작 소설은 영화화되어 관객과 만나고, 관객은 영화를 통해 현실 속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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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피쉬(Big Fish)>



<킬링 디어(The Killing of a Sacred Deer)> (요르고스 란티모스, 2017)


수술 사고로 인한 죽음에 스티븐이 책임을 얼마나 져야 하는가 따지는 작업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직면한, 그의 가족들에게 찾아온 재앙적 순간에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지 살피는 편이 더 유효한 접근이다. 란티모스는 인간을 탐구할 때 특수한 상황 조건을 세팅한다. 그는 뒤틀린 세계 속의 우화가 인간의 본성과 내면을 들추는 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제법 흥미로운 순간은 마틴이 비유를 드는 순간인데, 당한 그대로 되갚아 줘야 한다는 주장에 스티븐은 헛소리 지껄이지 말라는 식의 그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는다. 내가 상대에게 상처를 냈으면 나도 자신에게 똑같이 상처를 내야 한다. 이건 내가 당하면 너도 당해야 하고 모두가 당해야 한다는 폭력적인 압박이다. 누구는 덜 당하고 더 당할 수 없다. '관용'이나 '용인'이 '다름'과 '차이'로부터 촉발된다면, 이 세계에선 그러한 균열을 만들어내는 상황이 성립될 수 없다. 그래서 피비린내 풍기는 이분화의 구도가 계속하여 지배 논리로 자리 잡는다. 징벌과 구원, 선과 악, 선택과 포기, 등가교환과 양자택일의 세상이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허용될 수 없는 제한된 세계 속에서 인간은 불가피한 선택을 강요받는다.


<더 랍스터>의 이분화된 세계 속에서 인간들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때는 탈이분화의 양상이 포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킬링 디어>는 그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세계관에 인간을 가두고 파멸로 이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관찰 실험처럼 느껴진다. 실내를 집요하게 광각으로 찍은 화면들, 느리게 줌인 되는 피사체들, 결정적인 순간에 동원되는 직부감 구도(밥이 다시 넘어지는 순간)와 적당히 뒤틀린 부감과 앙각 쇼트들을 보고 있자니, 영화의 형식적인 틀 자체가 일종의 거대한 실험장이 아닐까 싶은 인상도 받았다. 이 관찰, 아니 관음이라고 해야 할까, 이를 관장하는 절대자는 과연 란티모스뿐일까. 실험의 기획자는 란티모스이지만, 실질적으로 카메라를 경유하는 시선을 판단하는 건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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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디어(The Killing of a Sacred Deer)>



<마미(Mommy)> (자비에 돌란, 2014)


독특한 화면비와 타이트한 클로즈업 촬영은 인물의 감정선에 오롯이 집중하겠다는 돌란의 의지가 투영된 듯 보인다. 배우들의 호연과 감독의 재치 있는 연출력 덕분에 그 과감한 시도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화면비가 변화하는 지점들, 오아시스나 라나 델 레이의 곡이 삽입되는 순간들도 참으로 여운이 남는다. 자비에 돌란은 능수능란하게 자신만의 리듬으로 영화를 매만진다. 음악과 영상을 매치하는 그의 센스는 마치 왕가위와도 닮아 있지만, 어쩐지 돌란은 내게 왕가위만큼 인상적이지 않다. 그러니까 돌란의 영화는 너무 명확한 지점들이 많다. 왜 이렇게 찍고 왜 이렇게 편집했을지 조금만 고민해 보면 의심의 여지없이 그 의도가 보인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왕가위의 영화는 늘 곱씹어도 언제나 조금씩 다르게 느껴진다는 점이 너무나 좋다. 그런 의미에서 돌란의 장편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는 조금 더 예측하기 어렵고, 발칙한 감각이 느껴져서 <마미>보다 훨씬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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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미(Mommy)>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Fast & Furious 9 THE FAST SAGA)> (저스틴 린, 2021)


사실 영화 자체는 언제나 그랬듯 확장되는 세계관의 규모를 견디지 못하고 침몰하고 만다. 솔직히 시리즈 중 가장 실망스럽다. 근데 영화를 보는 내내 그냥 영화와는 별개로 기분 좋은 설렘과 감동이 나를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건 극장을 찾은 사람들과 연결되는 느낌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생활화된 이후, 영화를 너무 좋아하는 나로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꾸준히 극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몇 달, 아니 일 년쯤 지났을까, 멀티플렉스든 아트시네마든 영상 자료원이든 간에 어떤 상영관이든 항상 나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만 드문드문 띄어 앉아 있었다. 어떨 땐 혼자 영화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휴일 늦은 저녁 시간대에 실로 오랜만에 개봉한 블록버스터급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은 극장을 채울 수 있는 만큼 채운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좌석 간 거리 두기가 적용된 상황이지만, 난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뒤늦게 고개를 숙인 채 삼삼오오 들어오는 사람들의 검은 실루엣이 스크린을 가리는 광경을 오늘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그래서 설렜나 보다. 이게 참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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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Fast & Furious 9 THE FAST SAGA)>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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