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1-2021.05.27
선명하게 구분된 흑백의 머릿결만으로 에스텔라 혹은 크루엘라를 오가는 여자의 불안정한 면모를 형상화한다. 영화를 매력적으로 가공하는 요소가 있다면 가장 먼저 캐스팅이다. 크루엘라의 기괴하거나 과장된 비주얼은 선명하고 큼직한 이목구비를 지닌 엠마 스톤과 호응하는 지점이 많다. 따라서 단번에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이 비주얼적인 면을 극대화해서 광녀와 순수악 혹은 갈등과 파괴, 혼돈의 주체로서 그 어딘가를 맴도는 크루엘라의 언행 그 자체를 조명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어야 더욱 매력 있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영화를 보면서 내내 아쉬웠다.
여러 이해관계에 질식당한 채 영화는 표류한다. 영화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데, 이 내레이션이 실행되는 시공간적 배경(후반부에 정체가 드러난다)은 그 자체로 상징적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에스텔라로부터 크루엘라가 탄생하는 순간의 매력을 다변화하여 관객에게 전이시켜야 한다. 그러나 분명 희미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고는 크루엘라(혹은 에스텔라)가 공원에서 독백을 내뱉는 쇼트가 전부 아니던가. 게다가 크루엘라가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과정은 신문 헤드라인 등과 몽타주가 동원된 채로, 그저 빠른 호흡으로 정신없이 커트되며 전시되기만 할 뿐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디즈니의 빌런 프로젝트를 따라 암묵적인 통제 아래 은근슬쩍 디즈니 입맛에 맞게 재단되는 듯 보인다. 유려한 카메라 워크와 형형색색의 미장센이 눈을 즐겁게 만들고, 가족의 비극이 얽힌 플롯의 연결과 장르적인 재미 등 여러 요소가 일사불란하게 배열될 뿐, 엠마 스톤의 크루엘라는 비주얼의 강렬함을 진한 여운으로 전환해내지 못한다. 배우의 역량이 부족하다기보단 영화의 문제다.
세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몰입감이 좋은 영화다. 시대를 관통하는 개인의 서사를 담는 데 있어 방대한 규모와 디테일을 동시에 살리는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격변하는 사회의 흐름, 전쟁의 참상과 더불어 그 속에서 사라지고, 희생당하고, 방황하고, 끈질기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담겨 있다.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 화가의 삶을 통해 영화는 우리에게 오랜 기간에 걸친 한 사람의 고뇌를 드러낸다. 그렇다고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이 창작에 자신을 투영한다는 말은 아니다. 당연히 그러지 않는 예술가도 얼마든지 많다. 그러니까 이건 정확히 말하면 <작가 미상> 속 쿠르트의 선택과 그를 둘러싼 환경에 관한 이야기다.
"이건 자네가 아니야"라는 교수의 말에 쿠르트는 자신을 찾아가려 하지만, 찾기는커녕 방황과 고뇌를 거듭하면서 탈출구를 알 수 없는 미로에서 헤매기만 한다. 쿠르트가 확신을 가지게 되는 순간은 우연이 가져다준다. 그는 신문에서 본 사진,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자신의 그림으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아주 어릴 적 보고 듣고 겪었던 몇몇 강렬한 순간들은 머릿속 어딘가에 묻힌 기억들로만 남아 있다. 쿠르트가 성장한 이후, 문득 이모의 흔적을 느끼는 때가 있다. 그러니까 내가 겪지 않았는데 불현듯 그 사람이 점유하던 무언가가 내게 희미하게 전이된 듯한 느낌과 가깝다. 쿠르트가 그림을 그리면서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과거의 감각들을 마침내 끄집어내는 순간은 의도한 게 아니다. 신문 속 사진을 그림으로 옮기려고 하는 시도 역시 계획되지 않았다.
이렇게 우연히 만들어진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뒤샹에게 바치는 오마주'가 아닌지 물어보며 의미 부여를 한다. 나는 이 말을 들은 쿠르트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해 보기도 했다. 쿠르트는 본인과 모친을 그렸냐는 기자들에게 내 사진이 아닌 아마추어 사진이라며 누굴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나는 왜 쿠르트가 이런 대답을 했을지도 역시 곱씹어 보았다. 진실을 원한다는 쿠르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당장은 잘 모르겠다.
폭력과 살인에 무뎌질 대로 무뎌진 야쿠자의 세계에서, 무라카와가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피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 기타노 다케시가 직접 연기한 무라카와의 그 공허하고 무력한 표정, 어딘가로 가라앉는 듯한 시선 처리를 담아내는 쇼트는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지점들이다. 자신이 사유하던 것들을 장르의 문법을 슬쩍 빌려 관객에게 스며들게 하는 다케시의 역량이 돋보인다. 참 솔직한 영화다. 그러니까 과시하지 않고, 그냥 허심탄회하게 풀어놓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 어쩌면 계산된 솔직함일 수는 있겠다. 어쨌든 있어 보이는 척하지 않아서 좋다는 말이다.
서정적인 자연의 풍광은 예정된 비극과 대비를 이루면서 괴리감을 생성한다. 아마도 박훈정 감독이 <낙원의 밤>의 레퍼런스로 삼은 많은 영화들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무라카와는 오랜 야쿠자 생활로 인한 권태 속으로 맥없이 침잠하는 듯 보인다. 오키나와의 해변가에서 종종 그는 모래사장에 함정을 파놓고 조직 식구들을 심술궂게 골려주거나,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불꽃놀이를 즐긴다. 이렇게 실없이 웃고 즐기다가도 한순간에 처절한 총성과 싸늘한 시체가 뒤따르는 게 야쿠자들의 인생이다. 즐거움, 냉소, 무력감, 아쉬움 등이 어지럽게 뒤얽힌 감정들이 삶과 죽음을 오가는 인물들과 맞물리는 지점들이 참으로 인상 깊다. 무라카와에게 도대체 죽음은 뭘까, 아니 기타노 다케시에게 죽음은 뭘까.
비록 단번에 기시감(<본> 시리즈, <히트> 등)을 유도하는 지점들(특히나 액션 신에서의 편집, 결말부의 캐릭터 묘사)이 있음에도, 여러 지점에서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영화다. 시종 건조하고 차가운 톤을 유지하면서 장르적 쾌감을 살리는 연출법이 무난하게 녹아든다. 다양한 인물 관계로 만들어내는 다층적인 플롯 구조는 그 깊이가 비교적 얕다. 그래서 그만큼 설득력이 떨어지는 점은 아쉽다. '선택과 집중'이 잘 실행된 구간도 있고 그렇지 못한 구간도 있는 묘한 영화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소년이 마침내 고백하는 순간이 이 영화를 강렬하게 만든다. 소년이 말할 때 카메라는 이고르 대신 아미두의 아내를 더 프레임에 오래 머무르도록 한다. 관객은 말하는 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마주하는 자의 모습을 더 오랫동안 관찰할 수 있다. 독백이 끝난 뒤, 카메라는 이고르의 얼굴을 잡는 일을 놓치지 않는다. 한 명씩 카메라에 담기다가 마침내 두 명이 동시에 프레임에 갇히는 순간이 오면, 다르덴의 마법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더 나아간다. 카메라는 파국을 맞이한 자들을 조명한 뒤 어떤 선택을 내리는가. '그래, 이렇게 서로 진실을 알고 나면 그 이후엔 뭐가 있는데?'라는 비아냥에 응수라도 하듯이, 카메라는 그들을 따라가기를 떳떳하게 포기한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야', 라며 다르덴 형제가 속삭이는 듯하다. 데뷔작이 이랬으니 그들의 영화 세계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