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1.05.28-2021.06.03

by 드플레

<킬러들의 도시(In Bruges)> (마틴 맥도나, 2008)


벨기에 브뤼헤는 살벌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시니컬한 유머가 반복되는 기이한 연극 무대가 된다. 원제 'In Bruges' 때문이라도, 브뤼헤(Bruges)와 영화 속의 요소들을 연결 짓는 작업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두 명의 킬러는 브뤼헤에서 저마다의 사정으로 인해 사소한 충돌과 갈등을 겪는다. 여기에 한 명의 킬러가 가세하게 되면서 균열이 점점 커져 파국을 맞이하는 양상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레이와 켄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킬러들이 내세우는 직업윤리가 문득 거슬렸다. 어딘가 망가진 듯한 이들의 윤리관 말이다. 인간쓰레기는 죽여도 좋다, 죄 없는 사람을 실수로 죽여선 안 된다는 따위의 말들이다. 아이를 죽인 자는 반드시 속죄해야 한다는 이 기묘한 원칙이 극을 지배한다. 이들의 신념에는 많은 게 생략되어 있다. 도대체 기준이 무엇이고 어디서부터 인간쓰레기와 비인간쓰레기의 경계를 설정할 것인가. 웃긴 점은 영화 속 인물들 중 일부, 특히 레이는 차별주의적이고 폭력적이며 합리화에 능한 인간쓰레기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런 그가 실수로 인해 죄책감에 사로잡히면서도 일상에선 서슴지 않고 난쟁이를 향해 폭언을 일삼는 모습은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 안개로 둘러싸인 중세의 모습이 보존된 브뤼헤라는 운치 있는 관광 도시, 한편으로는 지옥과 천당 사이 위치한 연옥처럼 보이는 이 킬러들의 도시는 이러한 인물의 양가적인 면모를 형상화한 듯한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영화는 그러한 윤리적 고찰 자체에 깊게 천착하지는 않는다. 그런 딜레마의 연속을 설정한 뒤 파멸로 향하는 인물들을 관찰하기만 한다. 다시 말해 선택의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하고 인물을 몰아세운다. 그렇다면 방점을 찍어야 하는 부분은 죄책감을 어떻게 극복하고 해소해야 하는가, 즉 속죄와 구원에 관한 문제일지 모른다. 속죄의 끝은 어디인가. 총구에서 나오는 총알만이 심판할 수 있을까? 영화는 레이의 생사 여부를 생략한 채 끝낸다. 어쩌면 그의 속죄는 임산부를 보호하려는 데서 완료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순에 둘러싸인 킬러들의 촌극에서 레이는 심판받는 죄인으로만 취급받지 않는다. 레이를 죽이러 온 해리가 자신이 철석같이 지키던 신념 앞에 무릎 꿇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 역시 심판자와 피심판자의 지위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이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마음에 든다. 마틴 맥도나는 감히 내가 판단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자조가 동반되는 냉혹한 참극을 한껏 벌여놓고는 매듭을 짓지 않은 채 끝내는 쿨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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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들의 도시(In Bruges)>



<세븐 싸이코패스(Seven Psychopaths)> (마틴 맥도나, 2012)


영화 속 인물들 하나하나(정확히는 사이코패스들)가 '모두' 마틴 맥도나의 대변인처럼 보였다. 다시 말해, 특정한 몇몇 인물에만 감독의 의중을 투영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느꼈다. 쉴 새 없는 냉소와 자조, 섬뜩한 복수와 응징의 대척점에 서 있는 '간디'스러운 비폭력주의까지 정신없이 시선을 옮겨가다 보면 뭐가 남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나는 그래서 이 영화가 오히려 감독의 솔직한 고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답을 모르겠으니 일단 풀어 헤쳐 놓고 보자는 마인드 말이다.


마틴 맥도나의 세 편의 장편 영화 중 이 영화가 가장 마음에 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또 있다. 경계를 흐리는 영화의 작법 때문이다. <세븐 싸이코패스>는 일종의 메타 영화이자 메타 각본처럼 보인다. 극 중 마티가 쓰는 시나리오 '세븐 사이코패스'는 영화화까지 된다. 이 시나리오 속 이야기는 마티가 직접 겪은 일이기도 하면서 그가 상상한 것들이 들러붙어 있으며, 영화의 각본을 실제로 쓴 마틴 맥도나의 생각들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이 영화 자체가 마티가 쓰는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것인지, 마티가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인지, 단순히 마틴 맥도나의 각본을 영화로 만든 것인지 모를 그 어딘가의 생경한 감각, 그 형식적인 의뭉스러움 자체가 영화의 화법으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이 실제와 허구를 넘나드는 영화의 복잡한 시나리오는 예술을 통해 윤리를 탐구하려는 사람(마틴 맥도나의 영화 세 편을 통해 그가 천착하고 있는 특정 테마가 있다고 느꼈다)이 내릴 수 있는 굉장히 겸허한 선택이다. 윤리적 주체가 수행하는 행위, 높은 차원의 숭고, 갈등과 고뇌에서 내리는 선택들을 감히 재단할 수 없다면 각본과 영화 자체에 균열을 가한 뒤 농도를 옅게 하여 농담조로 가볍게 던지는 식이다. 극 후반부에 마피아 조직 보스가 술을 들이켠 뒤 운전대를 잡는 마티에게 건네는 "술 먹고 운전하려고?"와 같은 대사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P.S. 마틴 맥도나의 추상적인 사유를 있는 그대로 형상화한 듯한 두 명의 배우가 나온다. 푸석푸석한 냉소와 자조의 아이콘 콜린 파렐, 일상의 느슨함과 광기의 표출을 마음대로 오가는 예측 불가능한 샘 록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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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 싸이코패스(Seven Psychopaths)>



<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마틴 맥도나, 2017)


망가진 인물들의 윤리관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차갑게 응시하고 나열하던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다소 모호한 입장으로 선회한다. 두 사람의 선택은 죄지은 자에 대한 응징이 아닌, 죄 자체에 대한 응징으로 귀결된다. 마틴 맥도나는 이 지점에서 갈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고뇌는 두 인물이 대화를 차를 타고 가면서 대화를 나누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들로 구체화된다.


<쓰리 빌보드>에선 정교한 각본을 통한 캐릭터의 구축 및 변모의 지점들이 비교적 뚜렷하게 제시된다(설득력, 당위성의 확보는 별개의 문제다). 밀드레드와 딕슨은 각자 처한 상황과 저마다의 이유로 변화하는데, 윌러비 서장만큼은 두 사람을 동시에 매개하는 어떤 절대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 윌러비에게 부여된 테마는 '이해와 관용'이라는 단어로 집약할 수 있을 텐데, 그래서인지 밀드레드와 딕슨의 마지막 선택은 묘한 이질감을 불러온다. 충동적인 결정 이후 '회의에 사로잡히는' 양상 자체는 동의하나, 이것이 진정 캐릭터들의 성장(내지는 변화)으로부터 나온 최선의 결단이었는지는 의문이 든다. '죄를 지은 자'가 아닌 '죄 자체에 대한 응징'을 지지할 수 있겠다는 인물들의 결정. 윌러비를 매개로 변화한 인물들이 뜻을 모으는 지점이 이 결정이라는 점은 어딘가 찝찝하다.


밀드레드는 초반부에 자신의 집에 찾아온 신부에게 일화를 늘어놓으며 '죄를 지은 자가 속한 집단의 모든 구성원에게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라는 논리를 펼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적 노력을 요구하는 듯 보이나, 결말에 이르러 이러한 연대 의식이 어딘가 뒤틀린 방향으로 발전하는 듯 보인다. 책임을 모두가 져야 한다는 명목 아래, 마치 사회의 쓰레기들을 걸러내듯 복수와 응징의 대상을 가려내는 건 아닌가. 영화는 단죄의 순간까지 가지 않고 고민과 회의까지만 담아냈기에 내게 이러한 고민을 안겨주었다. 어쩌면 이 자체로 불완전한 감독의 사유와 맞닿아 있어 보이기도 한다. 분노와 혐오의 표출을 다루는 데 있어서 굉장히 예리한 논점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영화이긴 하나 결말부의 선택은 이 영화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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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인트로덕션> (홍상수, 2021)


의문이 생기는 지점들이 제법 많았다. 사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처음 접하는 홍상수의 영화이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인장이나 스타일에 익숙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해둔다. 홍상수의 전작들과 비교하여 음미하는 작업은 나중에 그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본 뒤에 하도록 하자. 우선은 영화 자체가 주는 오묘한 기운을 곱씹어 보고 싶어졌다. 방 안에서 기도하는 아버지로 시작해 탁 트인 바다를 응시하는 아들로 끝나는 영화. 세 덩어리로 나뉜 이 영화의 형식 혹은 구성을 뜯어보는 일은 어쩌면 영화를 향한 자연스러운 접근이다.


시작, 도입, 첫 경험, 입문, 안내...'인트로덕션'은 단 하나의 의미로 치환되기는 힘든 단어다. 그래서일까, 묘하게 각 부가 끝나는 지점이 인트로덕션처럼 보였다. 영호와 간호사의 포옹, 커플의 포옹, 두 친구의 포옹에 이은 응시. 영호의 어린 시절만 기억하던 간호사가 영호와 어색해하면서도 살갑게 추억을 끄집어낸다. 영호는 언젠가 또 이 병원에 올 수도 있다. 간호사가 그때도 근무하고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흩날리는 눈발 속의 따스한 포옹은 어떤 대목의 소소한 출발점일 수는 있겠다. 둘의 관계가 특정한 층위로 변화하고 확장할 거라는 말이 아니다. 그냥 일상의 한자락을 잘라냈을 때의 시작점일 수 있겠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인의 포옹은 복잡한 심경과 애틋함에 둘러싸인 채 또 다른 인트로덕션이 되는 듯 보이고, 물에 젖은 영호를 감싸 안는 친구의 모습에서도 역시 막연하게나마 무언가를 해소하고 또 다른 어디론가 흘러가는 삶의 도입부가 포착된다. 우리는 삶(혹은 일상)을 딱 잘라 분절할 수는 없다. 어떤 대목이 시작점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순간은 끝과 시작이 공존할 수도 있고. 그래서인지 1~3부의 시간대가 선형적으로 연결(건너뛰는 감이 있더라도)된 듯 보이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구성을 뒤섞어도 크게 이질감이 없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세 덩어리가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몇 개의 가닥이 발견될 수 있지 않을까. <인트로덕션>이 홍상수 영화의 분기점, 변곡점 혹은 확장판 정도에 위치한 작품이라는 평자들의 의견이 종종 있었다. 이것에 관한 이야기는 그의 연출작을 정주행한 뒤, <인트로덕션>을 다시 꺼내들 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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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덕션>



<퍼스널 쇼퍼(Personal Shopper)> (올리비에 아사야스, 2018)


주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미스터리가 중첩되는 듯한 서사 구조에 매달리는 작업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느꼈다. 그보다도 어딘가 생경한 감각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가공하는 듯 보였다. 이는 카메라가 프레임 내부에 무엇을 담는지, 어떤 시점으로 피사체가 표현되는지와 관련된 문제다. 실험적인 순간들도 보였고, 의아한 지점들도 있었다. 결말부에 모린이 문득 깨닫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잠시 생각할 수 있다. 아 그럴 수도 있겠다, 그냥 지금까지의 여정에는 늘 모린의 망상이 들러붙어 있었던 건 아닐까. 모린은 그 순간 유령(혹은 영혼)과의 소통이 허상임을 자각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왜 허상에 매달려 왔는지, 기이한 소통의 구조 속에서 허우적댔어야만 했는지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익명의 상대와 대화를 이어나가는 때나, 루이스의 영혼을 기다리는 때는 모두 모린이 누군가와 만나는 시간이다. 상대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존재다. 사실 'unknown'은 유령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모린은 유령처럼 보이는 그 기묘한 존재에게 자신이 가진 영매의 직감을 적용하려 든다. 적용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점에서, 모린은 일차적인 소통에 실패한다. 또한, 모린은 비행기 모드를 켜서 소통을 와해시키려고 한다. 상대는 떠벌리고 모린에게는 정보가 차단된다. 다시 한번 소통은 실패한다. 소통의 구조가 변형될수록 모린은 고립된다. 그녀는 누구와 대화하는 것인가. 그녀는 스스로 소통의 대상을 유령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보 교환의 불균형, 유령화된 대상과의 기이한 소통은 개체를 방황하도록 만든다. 어쩌면 이 영화는 현대인이 직면한 문제들인 소통의 불완전성, 존재적 불안, 자아의 분열적 양상 등을 은근슬쩍 꼬집으려는 영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으로 이 영화에선 모린은 모르는 정보가 관객한테는 제공되는 구간이 몇 군데 있었다. 호텔의 엘리베이터 문과 로비 자동문이 열리고 닫히는 장면에서 유령이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모린이 없을 때 관객에게만 제시된다. 게다가 후반부 루이스의 유령으로 보이는 존재가 유리컵을 떨어뜨릴 때, 모린은 그 사실을 모르지만 관객은 유령을 마주한다. 어째서 호텔에선 관객에게 유령이 보이지 않도록 하고 친구의 집에선 유령을 보이게 연출하였는가. 이쯤 되면 관객을 단순한 관찰자의 위치에 서게 하려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가닿는다. 이 두 지점 사이엔 카페에서 살해 사건의 진범이 밝혀졌다며 모린이 친구에게 말하는 신이 자리한다. 그렇다면 이는 모린의 심리 상태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사실 호텔과 친구네 집 신에서 나타나는 차이점에 관해서 어떤 평자의 설득력 있는 의견(해석에 가깝다)에 속으로는 곧바로 동의했지만, 어쩐지 다르게 접근해보고 싶기 때문에 우선은 이에 관한 사유는 공백으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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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 쇼퍼(Personal Shopper)>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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