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1.06.25-2021.07.01

by 드플레

<시리어스 맨(A Serious Man)> (조엘 코엔, 에단 코엔, 2009)


이창동의 <밀양>에서 신애는 신(개신교)을 향해 외친다. <시리어스 맨>의 래리 또한 신(유대교)을 향해 하소연한다. 인간은 우연으로 가득한 삶 속에서 정해진 무언가를, 원하는 바를 얻어내려 한다. 어떤 신을 믿는 사람이건 늘 자신의 선택에는 신의 뜻이 함께했다고(혹은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늘 답을 구하려고 한다. 오프닝 시퀀스의 랍비를 부정하는 아내처럼, 인간은 그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랍비가 다른 인간보다 통찰력 있는 지혜로운 자들이긴 하나, 그들 역시 답을 주지는 못한다. 어쩌면 인생은 정해진 답 없이 몸을 맡겨야 하는 거센 물살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답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각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시리어스 맨>은 래리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의 부인과 자녀들 및 주변인들의 이야기이고, 더 나아가 관객 모두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카메라는 아들의 뒤편에서 같이 토네이도를 응시한다. 불가해한 일들이 연속되는 가운데,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고, 영원히 살 것만 같다가도 한순간에 죽는 게 인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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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어스 맨(A Serious Man)>



<프라미싱 영 우먼(Promising Young Woman)> (에머랄드 펜넬, 2020)


주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프라미싱 영 우먼>은 클럽을 찾은 남자들의 신체 일부를 클로즈업하며 시작한다. 카메라는 집요하게 얼굴이 아닌, 춤을 추는 남자들의 허리춤과 엉덩이를 탐닉한다. 이후 제시되는 장면에선 저 멀리 보이는 술 취한 여자를 향한 남자들의 잡담이 오간다. 이러한 신(scene)들의 접합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얼굴이 특정되지 않은 신체의 형상 일부가 곧 술 취한 여성에게 치근덕대는 남성 이미지로 구체화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봉준호의 <마더>에서 망각을 선택한 마더가 춤추는 어머니들 사이로 녹아들어 가서 그 형상이 군중 속 어머니상으로 확대되던 엔딩 시퀀스의 역(reverse) 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소재와 서사를 고려했을 때, 이 영화는 젠더 담론을 경유하여 군중에게 경종을 울리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단히 사회참여적인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앞서 나는 '경종을 울린다'는 말 대신 '경종을 울릴지도 모르겠다'는 표현을 썼다. 이건 영화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다. 영화에 내포된 정치성이 함의하는 바가 그 자체로 위태로워 보인다는 사실과도 맞닿아 있다. 우선 영화의 엔딩 신을 떠올려 보자. 죽은 카산드라가 예약을 걸어놓은 메시지를 차례차례 읽으며 당황해하는 라이언의 모습과 알 먼로가 경찰에 체포되는 과정이 교차로 제시된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에서 방점이 찍히는 구간은, 바로 카산드라가 보낸 메시지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카산드라의 통쾌한 복수극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막을 내린다. 영화는 분명 니나의 은폐된 죽음과 죽음 이후 남겨진 자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카산드라, 그녀의 부모, 니나의 부모는 끔찍한 사건 이후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니나를 위한 카산드라의 응징은 개인적인 복수의 차원을 넘어 사회의 공권력을 개입시키는 방향으로 마무리된다. 일차원적인 피의 응징으로 귀결되지 않기 때문에 억지스럽게 보이진 않아도, 어쩐지 피해자의 사연을 어루만지는 진정 어린 공감의 태도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든다.


인상적인 오프닝 신을 지나 타이틀 시퀀스로 넘어가면, 마치 자신에게 작업을 걸어 집으로 데려간 남자를 처리(?)한 것으로 보이는 카산드라의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우리는 4장으로 구성된 카산드라의 복수극에서, 사실 카산드라가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녀는 가해자를 두둔하고, 묵인과 방조로 일관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도록, 속죄하게 만들도록 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다시 말해 카산드라가 원하는 건 개개인의 망가진 윤리 의식을 바로잡는 일이다. 카산드라가 가해자(와 방조자, 관련자들 모두)들에게서 여전히 잘못을 뉘우치고 속죄하는 마음을 찾지 못하자, 그녀는 다소 폭력적인 방법을 택한다. 방관자 친구였던 매디슨을 술에 잔뜩 취하게 하여 낯선 남자와 호텔 방에 같이 있도록 만들고, 가해자를 두둔했던 학장인 워커 여사를 향해 당신 딸이 유괴되어 낯선 남자들이 있는 곳에 있다는 소식을 알리며(실제로 딸은 안전한 곳에 있었고 워커를 속인 것이다) 협박한다. 매디슨과 워커는 자신이 혹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일을 겪고 난 뒤에서야 내가 그때 잘못 생각했다며, 내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며 자책한다. 카산드라가 얻어낸 건 과연 진심 어린 뉘우침일까.


당시 사건을 맡은 변호사만이 유일하게 망가진 삶을 살고 있었다. 카산드라는 이 자의 집에 찾아가 당시의 사건을 들추며 그를 추궁하는데, 그는 정신병에 걸려 휴직 중이었고 그 사건 변호 이후로 잠을 제대로 못 잔다며 울면서 고백한다. 문제는 이런 가해자-피해자 관계의 전도를 통한 개인의 윤리성을 매만지는 영화의 흐름이 밀도 있게 테마를 밀고 나가지 못하는 듯 느껴진다는 점이다. 카산드라의 복수는 일반적인 피의 응징이 아니고, 가해자가 스스로 잘못을 자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교정 프로그램과도 같은 것인데, 이런 과정에서 영화는 어떤 인물의 사연에 집중할지 선택하는 데 있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며 방황한다. 게다가 엔딩에서 강조되는 응징의 완수, 복수의 성공, 정의 구현에서 오는 쾌감은 소외된 타자의 영역을 어루만지려는 이 영화의 진중한 정치적인 논조를 흐리게 만든다. 전반적으로 볼 때, 사회 속의 수많은 잠재적 가해자들에게 경고를 날리고 싶은 건지, 끔찍한 사건을 겪은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사연을 강조하여 윤리 담론을 환기하고 싶은 건지, 피해자의 상처가 가해자의 속죄로 온전히 보상될 수 있는지에 관해 자문하고 있는 건지 명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어느 것 하나 명료하게 느껴지지 않는 애매한 영화의 정체성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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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미싱 영 우먼(Promising Young Woman)>



<트립 투 그리스(The Trip to Greece)> (마이클 윈터버텀, 2020)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두 남자의 대화, 레스토랑의 고급스러운 음식들, 따사로운 그리스의 풍광들이 계속해서 감각기관을 자극한다. <트립> 시리즈의 마지막이라는데, 내겐 이 영화가 <트립> 시리즈의 첫 관문이다. 이 영화는 50대 중년 남자들의 대화를 경유하면서 삶의 철학이나 얕은 곁가지 교양들, 일상의 소재들을 담아낸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두 남자의 서사가 대비된다는 점이 영화에 나름대로의 텐션을 부여한다. 스티브의 서사가 강조되는 지점이 몇 군데 있다. 악몽 속에서 아버지를 접한 그에게 이번 여행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유쾌하게 농담을 던져왔던 친구 롭은 스티브가 급하게 떠나자 때맞춰 오기로 한 아내와 함께 그리스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가벼운 스몰 토크가 지배하던 영화의 초반부는 후반부에 이르러 어딘가 진중한 무게감을 살리면서 여행이 곧 인생과 맞닿아 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아름다운 이국의 땅에서, 마냥 휴식과 대화로만 채워질 수 없는 짙은 무게감이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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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립 투 그리스(The Trip to Greece)>



<내일을 위한 시간(Deux jours, une nuit)>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2014)


쉬운 문제가 아니다. 노동자들은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강요당한다. 산드라와 천 유로의 보너스. 보너스를 고르면 자연스레 산드라는 해고된다. 산드라는 한동안 아파서 휴직했다. 그런 그녀가 복직하려고 하자, 반장은 그녀가 전처럼 일을 잘하지 못할 거라는 명목으로 그녀를 해고하려 든다. 다르덴 형제는 촘촘한 이해관계의 교착 상태가 펼쳐진 난감한 딜레마의 장으로 친히 관객을 인도한다. 잘잘못을 따지기도 애매한 이 골치 아픈 상황 말이다. 카메라는 산드라와 남편 혹은 직장 동료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넓게 담아낸다. 관객은 이들의 대화를 통해 각자가 가진 나름의 사연과 고충을 발견하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지켜볼 수 있다. 그런 와중에 산드라가 티무르를 만날 때는, 티무르를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보너스를 택한 게 마음에 걸렸다는 그의 고백에선, 갈등에 사로잡힌 그의 복잡한 심경이 관객에게 잘 드러난다. 이 영화는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응시하고 따라간다. 이때 마지막 산드라의 선택은, 사회적 연대의 어떤 가능성을 제시하는 몸짓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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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위한 시간(Deux jours, une nuit)>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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