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1.07.02-2021.07.08
<블랙 위도우(Black Widow)> (케이트 쇼트랜드, 2021)
주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 <블랙 위도우>는 늘 자신을 감추기 바빴던 나타샤의 내면을 탐색하면서도, 동시에 조금 더 넓은 차원의 서사를 품으려 한다. 마블 스튜디오라는 막강한 공룡의 손아귀 안에서, 감독이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철저히 대중의 코드를 겨냥한 지점이 제법 보이고, 장르적인 면에서의 기시감(첩보 액션 등)이 느껴지는 구간도 많고, 촬영과 편집에 있어서의 필연적인 형식들 또한 그 당위성과 독창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떠받치는 무언가가 느껴진다면, 그건 서사에 있지 않을까. <블랙 위도우>는 고독을 씹으며 자신을 고립시켰던 나타샤가 타자와 맺는 관계를 조명하는 영화다. 어벤져스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나타샤의 숨겨진 과거를 통해 또 다른 가족이 드러난다. 피를 나누지 않은 이들이 결합된 가족의 모습, 이 뒤틀린 채로 삐걱대는 연대의 형태는 영웅들의 집단 서사를 줄곧 다뤄온 MCU 세계관 속 영화들이 좋아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영화는 어딘가로 피신하는 나타샤의 가족들의 분주한 모습을 담으며 시작한다. 이 단란한 부모와 두 딸이 실은 전부 피가 섞이지 않은 남남 관계고, 부모는 공작에 능통한 유능한 요원들이며 딸들은 스파이 훈련 기관 레=드룸에 강제로 이송되어 제이슨 본처럼 자신을 잃어간 채 킬러 첩보원으로 개조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가짜 동생은 가짜 언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극 중 나타샤와 옐레나의 대화를 통해서도 이들의 정체성은 혼란과 분열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나타샤는 자신이 몸담았던 가족 관계, 더 나아가 그 시기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듯 보인다. 전부 가짜라고 말이다. 근데 옐레나는 위장 가족, 위장 혈연관계였을지라도 그 당시의 내게 있어 그건 진짜 가족이었고 나의 전부였다고 말한다.
네 명의 스파이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 과거를 회상하는 어색한 순간이 찾아온다. 각자에게 있어 몇 년간 가족처럼 지냈던 시기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자동차에서 흘러나오던 팝송과, 늘 같이 하던 식사 시간들과 같은 추억을 떠올리다 보면 혼동이 오기 시작한다. 분명 가짜 관계였다는 걸 인지하고 있지만, 당시 내가 감각했던 건 진짜 같고, 그 흔적 또한 선명하게 남아 있다. 네 명의 인물들은 상처만 남았던 과거를 잠시 묻어두고 지금 이 순간 함께하고 협력하는 연대를 선택하기로 한다. <블랙 위도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이들, 지금 내 곁에 함께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이들의 모습을 담는다. 그리고 뒤틀린 가족의 형태가 어쩌면 피를 나눈 사이보다도 더 진한 결속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나타샤와 옐레나의 언행을 통해 구체화된다. 나타샤에겐 두 가족이 있다. 어벤져스와 위장 스파이 가족 모두 그녀와는 아예 남남이었다. 타자를 향한 환대, 타자와의 유대 형성의 또 다른 가능성을 묻는 <블랙 위도우>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도 맞닿아 있다.
물론 <블랙 위도우>는 이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지닌 존재들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영화는 아니다. 대중적인 장르 영화라는 한계로 피상적인 수준에서 이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방황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들의 서사에 집중하는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낯선 타자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내가 몸담은 세계와 나를 둘러싼 타자들과의 관계는 끊임없이 재형성되며 결국 타자에서 내게로 향하는 탐색의 과정 또한 진행된다. 이 지점을 사유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블랙 위도우>는 충분히 매력적인 영화다.
P.S.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를 집어삼킨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 오늘도 너바나 정주행하러 갑니다.
<악녀> (정병길, 2017)
오프닝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이는 철저한 과시처럼 느껴진다. 어쩔 수 없이 <하드코어 헨리>(2015)의 잔상이 짙게 남는 일인칭의 구도 하에 게임 화면 같은 액션 요소가 나열된다. 그러니까 이 무차별한 살육을 실감 나게 연출한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이를 이끄는 주체가 되는 숙희의 절박한 무언가(강렬한 복수를 구현하려는 인물의 내면 환기 등)를 관객에게 전이시키고자 함이었을까. 하지만 그런 진중함이 반영된 결과라기엔 카메라가 너무나도 현란하게 기교를 부리며 움직이지 않는가. 이는 살인을 가볍게 여기는 윤리의 문제라기보단, 전달하고자 하는 바와 형식 간의 조응에서 균열이 느껴진다는 문제이다.
영화는 숙희의 개인적인 사연에 집중하는 듯 보인다. 숙희가 감정을 분출하는 몇몇 장면은, 물론 그녀의 내면을 강력하게 환기하지만, 어쩐지 숙희는 영화 내내 서사의 주체라기보단, 말초적 쾌감을 유도하기 위한 RPG 게임 속의 캐릭터처럼 보인다. 시나리오는 숙희를 낭떠러지로 몰아가고, 카메라는 오토바이를 타며 전장을 누비는 숙희라는 게임 캐릭터를 최대한 자극적으로 전시하려고만 한다. 여러 오마주를 통해 탄생한 <악녀>는 눈에 띄는 장면들의 분투에도, 짙은 여운 대신 의문만을 남기는 영화다.
<쿠오바디스, 아이다(Quo Vadis, Aida?)> (야스밀라 즈바니치, 2021)
이 영화는 무력하다. 인물들의 무력감을 담아낼 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냐는 무력감을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니까 고뇌가 느껴진다. 실화에 기반을 둔 이 대학살의 비극을 어떻게 담아내어야 기만처럼 보이지 않을지 고심한 흔적이 느껴진다는 말이다. 얼굴 클로즈업이 영화를 지배하는 몇몇의 순간이 있다. 공포와 폭력이 휩쓸고 간 자리엔, 다시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 가운데 녹아든 몇몇 얼굴을 기억한다. 미래가 될 아이들은 살아남았고, 남자들은 소멸되었다. 아이들의 얼굴들에 이어 교차로 제시되는 이웃의 탈을 쓴 얼굴들, 그리고 누구를 향해 말하고, 어디로 갈지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아이다의 잔상만이 남는다.
<쿠오바디스, 아이다(Quo Vadis, Aida?)>
<로스트 인 더스트(Hell or High Water)> (데이빗 맥킨지, 2016)
<로스트 인 더스트>에는 <오션스> 시리즈의 인물들처럼 한탕을 위한 은행강도질이 아닌, 시궁창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만이 있다. 현실 문제를 잔뜩 떠안은 백인 형제가 다소 어설프게 은행을 터는 사연에선 사프디 형제의 <굿타임>이 보이기도 한다. <굿타임>은 수렁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에게 냉소와 연민을 던지는 영화였는데, 이 영화는 보다 노골적으로 각종 이슈를 형제의 사연에 편입시켜 서사의 폭을 확장하면서 냉랭하고 건조하게 바라본다. 텍사스라는 공간의 상징성, 미국의 역사를 경유하는 인종 담론, 지독한 빈곤의 대물림을 끊으려는 아버지의 초상이 한데 얽혀 황량한 영화의 무드를 만들어낸다.
딜레마처럼 보이지만, 실은 딜레마가 아니라 강요된 폭력일지도 모른다. 이때 형 태너는 신중한 선택 대신 충동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삶을 덧대 나간다. 끝내 살아남아 해밀턴과 조우하는 동생은 형과는 대립항에 놓인다. 인물들이 딛고 선 이 시공간에서 인물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자문할 틈도 없이 그저 눈앞의 무언가를 위해 기를 쓰고 살아간다. 낭만이 허락되지 않는 텍사스는, 그간 쌓아온 역사의 궤적이 언뜻 달라진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여전히 똑같이 반복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오로지 남은 건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을 받아 반짝여온 황야뿐이다.
<로스트 인 더스트(Hell or High Water)>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