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09-2021.07.15
미래를 볼 수 있다면,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의 인물들처럼 가상화폐라든가 스포츠 도박 등에서 비롯되는 일확천금의 기회를 탐색하려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가 제시하는 시간 놀이는 2분 뒤의 미래를 쌓아가는 방식으로 가까운 미래로부터 먼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욕망은 2분 단위로 끊어지는 시간의 장난에 매혹되기만 할 뿐 성취되기 힘들다.
관객은 근미래를 목도한 뒤, 연속된 시간 속에서 결정된 미래로 나아가는 인물의 모습을 그대로 감각한다. 카메라는 <1917>의 그것처럼, 롱테이크를 이어붙여 관객과 인물의 시공간을 동기화한다. 인물이 겪는 시공간의 뒤틀림이 관객에게 핸드헬드 카메라(놀랍게도 핸드폰이다)로 생동감 있게 인지되지만, 사실 관객이 제대로 감각할 수 있는 건, 인물이 처한 현재이다. 즉, 관객이 체험하는 인물들의 과거와 미래는 매체(모니터, 텔레비전)를 통해서만 포착되기 때문에 관객은 역설적으로 인물의 현재 모습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다른 차원으로 감각한다.
정해진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모순에 빠진다며, 결정론을 따르려는 인물들, 그들이 처한 세계관의 논리에 영화는 자그마한 균열을 가한다. 바로 '우연'이다. 재채기는 패러독스를 생성하고, 예정된 미래를 거부한 채 현재를 관통하는 인물들이 느끼는 감각을 오롯이 지켜낸다.
부천 영화제에서 발견한 보석과도 같은 이 영화는, 제한된 공간적 배경으로 인한 연극성을 띠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매체적인 담론을 만들어내고, 또한 시간의 흐름이 어긋날 때 발생하는 파열적 양상을 변주하고 적극 활용하는 영화적 순간을 생성한다. 그러면서도 따스한 손길을 잊지 않는다. 팬데믹 시국에 관객들과 함께 웃으며 관람한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은, 당분간 내게 진한 여운으로 남아 훈훈하게 맴돌 것만 같다.
P.S. 나... 따스한 휴머니즘도 좋아하네..?
영화를 추동하는 힘은 경험을 사고파는 사람들 각자의 사연이다. 각 에피소드마다 인물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가는 설정들에선, 따로 떼고 보면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인물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경험을 사는데, 그 이유는 무언가에 대한 결핍 때문일 수도 있고 욕망 때문일 수도 있다. 타인의 경험이 내게 전이된 것만으로 나는 그 경험을 내 것이라고 여길 수 있을까. 나를 구성하는 건 과연 무엇인가. 기억? 경험? 영화는 소재에 관한 심층적인 담론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그간 많이 다뤄온 소재이다 보니, 기시감 또한 드는 구간이 많았다. 영화는 그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기획된 영화임을 강조하면서, 다양한 인간상을 담아내려 한다. 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 또한 충분히 조명되어야 한다는 의도가 반영이 되어 있다.
경험을 넘겨주고 회사의 도구로 편입되는 사람들, 그렇게 도구화한 사람들을 이용하는 기업, 기업이 요청자(손님)에게 경험을 이식하기 위해 경험을 건네줄 대리인을 고용하는 이야기와 이를 통해 경험을 건네받은 이들이 바뀐 '나'를 감각하며 남은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조각난 채로 뒤섞이듯 편집되다 보니 무엇을 말하려는지 잘 와닿지 않았다. 다양한 인물이 나오는 군상극에서 파편화된 서사가 펼쳐지는 상황을 지탱하려면, 각 에피소드가 표상하는 바 혹은 메시지가 뚜렷하든가, 각 에피소드를 묶어서 관통하는 중심 소재가 느껴지든가 둘 중 하나는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부분에서 <에이아이 허>는 다소 헤매는 듯 느껴졌다.
너무 선명하게 주제 의식을 드러내려는 시도가 오히려 영화의 매력을 반감시킨다. 기계(넓은 층위에선 기술)가 본격적으로 인간 세계에 편입된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서도 알 수 있듯, 기계 문명은 인간과 다층적인 관계에 놓여 왔고, 자연 또한 도구적인 인간의 폭력과 대립해 왔다. <킹 카>는 하야오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까지 무대로 소환한다. 영화는 정해진 방향을 향해 달려간다. 선택지를 열어놓지 않고 뚜렷한 결론으로 이르는 <킹 카>는 금속의 질감을 연상시키는 감각적인 전자음을 곁들여 브라질의 사회상을 조명하면서, 인류 보편적인 담론까지 품으려 하지만 밸런스를 지키지 못한 채 표류하고야 만다.
사실 복수심에 불타는 킬러의 사연에 관심이 크게 가진 않았다. 하지만 타란티노는 내게 속삭인다, '이래도 관심 안 가질 거야?'. 그는 강요에 가까운 설득으로 나의 감각 기관을 사로잡는다. 그의 스타일은 신기하다. 난잡스러운 표층을 슬쩍 걷어내면 확신과 진중함, 그리고 센스가 일사불란한 형태로 공존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이 쇼트에선 왜 이런 구도로 찍었고, 왜 이런 조명을 썼는지, 이 음악은 즉흥적으로 삽입한 건지 혹은 치밀하게 계획하고 배치한 건지, 커트할 때 이것 대신 왜 저런 방식으로 전환하는지 납득이 가면서도, 한편으론 끝없이 궁금해지는 지점들도 많다. 그게 바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타란티노라는 장르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오랜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블랙 맘바가 자신의 인생을 망친 어쌔신 집단 동료들 그리고 애인 관계였던 자신의 보스를 죽이러 간다는 지극히 단선적이고 명료한 플롯으로 관객을 설득하려면, 블랙 맘바의 행동을 이끄는 동기를 납득시킬 필요가 있다. 그게 아니라면, 그 행적 자체를 매력적으로 가공해야 한다. 타란티노는 후자를 선택한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킬 빌>에서 흥미로웠던 지점은 유독 공을 들여서 오렌의 서사를 확보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상실의 고통을 복수로 가려 온 인물들의 사연을 연동시키려는 장치가 아닐까. 복수는 끝맺음을 선사하지 않고 또 다른 복수만을 낳는 걸지도 모른다. 딸이 보는 앞에서 엄마를 죽인 키도는 얼어붙은 어린 딸아이에게 말한다. 나중에 커서 복수하고 싶으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이다. 벗어날 수 없는 복수의 굴레는 그렇게 슬쩍 꼬여 있는 플롯에서 각 인물을 연결한다.
파이 메이와의 일화를 끼워 넣어 탈출하는 구간의 전개를 다소 우스꽝스럽게 만들긴 해도(물론 분위기는 한없이 진지하다...), 빌이 키도에게 슈퍼맨을 언급하는 신, 키도를 'aka. mommy'로 마무리하는 크레딧 덕분에 어쩔 수 없이 타란티노의 야심찬 기획에 마음을 뺏겨 버린다. 전편은 플롯의 연결을 은근슬쩍 조작해서 테마를 수면 위로 끄집어낸 뒤 강렬한 시청각적 기법으로 그 테마를 요리했다면, 후반부에 해당하는 이 영화는, 인물의 변모 혹은 서사성이 다분히 강조된 듯한 인상을 풍기는데, 그런 정형화된 틀을 깨부수는 타란티노의 센스와 인장이 곳곳에 배어 있기 때문에 보는 내내 흥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랑종>은 방황한다. 페이크 다큐라는 형식을 통해 무당 가문을 취재하는 촬영팀의 카메라맨들은 열심히 균열과 파국의 순간들을 포착하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카메라를 들이대며 생생한 현장을 담아내는 데 집중한다. 이런 집착 가운데 영화는 문득 자신이 정해 놓은 원칙을 스스로 거부하는 모순(쇼트/역쇼트의 배치, 사운드의 과도한 개입 등)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때 영화는 길을 잃는다. 전하려는 바와 형식 간의 호응이 매끄럽지 않을 때, 영화는 정체성을 의심받는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불가해한 일들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불가사의 앞에 노출된 무력한 인간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성실히 표출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랑종>의 카메라는 오히려 상황을 수동적으로 목도한다기보단 상황을 적극적으로 가공하는 임무를 수행한다는 점(후반부, 촬영자의 손을 떠난 카메라가 무엇을 담는지 떠올려 보자)에서 또한 의문을 남긴다.
<랑종>은 믿음과 운명을 말한다. 님의 인터뷰, 퇴마 의식 교차 시퀀스가 그걸 적나라하게 표상한다. 믿음이 무너진 순간, 펼쳐지는 파국의 현장을 매우 구체적인 사례들로 나열하는 <랑종>은 극복할 수 없는 이 수렁 속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이때 <랑종>은 장르적인 쾌감을 중시하면서, 전하려는 바 또한 직접적으로 표출한다. 따라서 관객은 수동적인 자세로 감독이 구상한 틀에 사로잡힌다. 불가해한 악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로 작용하는지 탐구하는 나홍진의 기획은 원안과 각본 등을 통해 감독에게 전달되었지만, 이 영화는 어느 순간 특색이 사라진 장르물로 선회하면서 그 매력을 퇴색시킨다.
발언권이 주어진 스미스를 조명하는 후반부 시퀀스는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할 때묻지 않은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워 준다. 이때 흥미로운 건, 스미스가 견지하는 순수한 진실의 힘이 페인 의원을 교화시키는 듯 보이나, 정작 관객은 스미스의 몸부림을 통해 테일러가 무너지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화는 맹목적인 긍정을 유보한 뒤, 양가적인 태도 사이에서 갈등하는 속내를 솔직히 표출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마냥 판타지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늘한 현실감을 환기한다. 지나치게 도식화된 서사적 설정들이 달갑지는 않지만, 스미스를 집요하게 따라가는 영화가 어떤 지점에서 한계를 느끼고 고뇌에 사로잡히는지 잘 와닿는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이미지 출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네이버 영화, IMDb